148. 첫날밤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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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첫날밤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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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첫날밤에 (2)
2023.02.28.
스무 살의 윤태하에게 강시현은 여신과 크게 다름없는 존재였다.
여태 살면서 시현과 스킨십을 하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문제는 그게 현실이 되는 속도가 터무니없이 빨랐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다짜고짜 다음 날이 결혼식이라니!
문제는 스무 살의 윤태하는 강시현이 제 근처에만 다가와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상태라는 거였다. 하물며 첫날밤이라니, 이건 걸음마도 못 뗀 아이에게 다짜고짜 마라톤을 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단둘이 남게 되자 설렘보다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
혹시 내가 너무 서투르게 굴어서 첫날밤을 망쳐버리면 어쩌지.
내가 그녀가 아는 그 윤태하가 아니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결국 태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부탁했다.
“우리 첫날밤, 조금만 미룰 수 있을까?”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평생에 한 번뿐인 첫날밤을 망쳐버리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마음 넓은 여자는 실망하는 기색도 없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나 가서 씻고 올게. 오늘은 손만 잡고 자자. 그건 괜찮지?”
시현이 욕실로 가버리고 나서, 혼자 남은 태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레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걱정 마렴. 네가 누구 아들인데.]
태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 아들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앉아 있다가 나도 일단 씻어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키는데, 문득 소파 위에 놓인 샤워 가운이 눈에 띄었다. 아까 시현이 씻으러 가겠다고 꺼내 놓고는, 깜빡 잊고 트렁크만 달랑 끌고 간 모양이었다.
태하는 잠시 망설이다 샤워 가운을 들고 시현이 사용하는 욕실 쪽으로 향했다. 샤워 중일 테니까 살짝 앞에 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안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뭘 하고 있나 싶어서 살짝 욕실과 이어지는 파우더 룸의 문을 열어봤다가, 태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
검은색 잠옷을 입은 시현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얇디얇은 요정의 옷을 걸친 것 같은 여자는 혼자서 은밀하게 상상했던 것보다 천 배는 더 아름다웠다. 단언컨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제일 야하고, 제일 예뻤다.
순간 태하는 모든 잡념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수줍음도 긴장도 모두 날아간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뿐이었다.
아까 제 입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둥, 첫날밤은 좀 미루면 안 되겠냐는 둥 했던 것도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그녀를 안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태, 태하야……!”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시현을 번쩍 안아 들고, 태하는 침실로 향했다.
안은 채로 넓은 침대에 뛰어들었다. 맞춘 듯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에 짜릿한 환희가 일었다.
그래, 여기 내 품 안이 당신의 자리였다. 설령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태하는 정신없이 시현을 껴안고 입술을 찾았다. 기억하는 한 평생에 걸쳐 짝사랑해온 여자의 입술은 세상 모든 초콜릿과 캔디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달았다.
물론 기억을 잃은 그가 키스하는 방법 따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본능적인 충동에 휩싸여, 무작정 집어삼키는 것처럼 입을 맞출 뿐.
숨이 가빠 하면서도 한참 고분고분 응해주고 있던 시현도 결국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
기어이 가슴을 주먹으로 얻어맞고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와서, 태하는 그제야 입술을 떼었다. 잠깐 떨어지는데도 크나큰 결심이 필요했다.
“하아, 하아…….”
입술을 떼자마자 시현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짧은 사이조차 견딜 수가 없어서, 그는 시현을 꼭 껴안고 물었다.
“당신, 정말로 날 사랑해?”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을 거지?”
아름다운 신부의 눈동자가 안타까운 빛을 담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혼인서약 했던 거, 기억 안 나?”
낮에 결혼식 때, 그녀는 태하의 눈을 바라보며 혼인서약문을 읽었다.
[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손수 작성한 문장이었다.
“우리 할 일 없고 심심해서 결혼한 거 아니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 약속 하려고 바쁜 사람들 모아 놓고 결혼식 올린 거야.”
태하를 힘주어 마주 끌어안으며, 시현은 달래듯 말했다.
“이제 난 네 아내고, 너는 내 남편이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불안해해도 돼.”
태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꽤나 불안해했었나 보다.
왜 그렇지 않았을까. 평생토록 짝사랑해 온 여자가 나를 사랑해 준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기적 앞에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한마디가 그토록 황홀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내가 이 여자의 남편이라니. 이 여자가 내 아내라니.
큰 소리로 웃고 싶기도 하고, 반대로 엉엉 울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태하는 속삭이듯 부탁했다.
“오랜만이니까, 혹시 잘 못 해도 눈감아줘.”
“응.”
대답하는 숨결이 벌써 눈에 띄게 가빠져 있어서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서투른 내게, 사랑하는 여자가 흥분해준다는 게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좀 더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태하는 시현의 몸을 대했다.
“예뻐.”
눈부신 살갗에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흘러넘치는 마음을 고백했다.
“정말 너무 예뻐.”
“……이상해.”
가쁜 숨결 가운데서 시현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네가 되게 낯설게 느껴져. 그렇다고 다른 사람 같지는 않은데…….”
시현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태하가 제 입술로 입을 막아버렸다.
“…….”
달콤한 소리만이 간간이 흘러나오는 침실.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
레온과 희선은 호텔 뒤편에 따로 위치해 있는 프레지덴셜 빌라에서 첫날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레온이 그녀에게 선물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거짓 출장을 떠난 동안 지냈던, 바로 그곳이었다.
낮부터 조금씩 내리던 눈은 저녁이 되면서 점점 거세졌다. 피로연까지 끝내고 빌라 앞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눈보라에 가까운 폭설로 변해 있었다.
희선의 어깨를 안은 채 도망치듯 뛰어 들어와서 문을 닫자마자 레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어차피 신혼여행은 못 갔겠네요.”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며 말을 걸었는데, 희선은 그새 창밖의 풍경에 푹 빠져 있었다.
“너무 예뻐요.”
눈 내리는 밤 풍경을 내다보느라 정신없는 희선을, 레온은 등 뒤에서 살며시 껴안았다.
“당신, 마음고생 많았죠?”
대답 대신에 희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 동안, 희선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레온은 곁에서 낱낱이 지켜보았다.
물론 태하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 귀한 자식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입장은 미묘하게 달랐다. 레온은 태하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지만, 희선은 낳자마자 빼앗긴 후 평생을 그리워하던 자식 아닌가.
즉 희선에게 있어서는 겨우 찾은 자식을 또 잃어버릴 뻔한 상황이었다. 제 가슴도 찢어졌지만, 어머니인 그녀가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보며 레온은 한층 더 미칠 것만 같았다.
어제 오전에 태하가 눈을 뜰 때까지, 희선은 꼬박 사흘 동안이나 잠도 못 자고 식사도 하지 못했다. 어젯밤마저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신부화장으로 예쁘게 가리고는 있지만,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밤은 푹 자요.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레온은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따 밤에 놀자는 둥 짓궂게 놀리긴 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물론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평소에도 늘 그런데, 오늘은 첫날밤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지금은 제 욕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다.
안도의 한숨을 쉴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요?”
“음?”
레온은 조금 당황해서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돌아선 희선이 그를 살며시 흘겨보았다.
“약속했잖아요? 첫날밤에 보여주기로.”
그제야 레온은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있잖아요. 당신 왜…… 늘 그렇게 옷을 다 입고 있는 거예요?]
[남자는 원래 다 보여주면 신비감이 없어지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첫날밤까지는 참아요.]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신 너무 피곤하잖아요. 오늘은 일단 푹 쉬고, 내일 밤에 보는 건 어때요? 아니면 아침에라도.”
그러나 희선은 강경했다.
“난 꼭 봐야겠어요.”
이제 보니 아주 오늘만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희선은 일견 조용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일단 고집을 세우면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여자였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레온은 일찌감치 백기를 들었다.
“보고 반해서 막 덮치려고 들면 큰일인데.”
그 와중에도 농담을 하며 드레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푸는 레온을, 희선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 실컷 봐요. 어차피 당신 거니까.”
잠시 후, 셔츠를 벗어던진 레온이 가슴을 활짝 폈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근육의 형태가 선명하게 잡혀 있는 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희선은 그의 몸에서 무언가를 찾느라 감탄할 겨를도 없었다.
사랑을 나눌 때조차 기어이 셔츠를 벗지 않는 그를 보면서, 그동안 얼마나 이런저런 상상을 다양하게 했는지 모른다.
혹시 나 모르게 어디 문신이라도 한 걸까. 저렇게까지 감추려고 드는 걸 보면, 혹시 보기 싫은 그림이나 문구 같은 게 새겨져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다른 여자 이름이라든가?
그러나 레온의 몸은 상상과는 달리 눈밭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가슴도, 어깨도, 혹시 몰라서 돌려세우자 넓은 등마저도 멀쩡했다.
그럼 대체 왜…… 당황한 눈으로 다시 찬찬히 살펴보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레온의 왼쪽 손목 위, 팔꿈치 안쪽에 가로로 그어진 금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뭐예요, 이거?”
남자다운 팔뚝에 남은 선명한 흉터는, 분명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없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랬어요?”
“옛날에 사고가 좀 있었어요. 별 거 아니에요.”
“거짓말 말아요!”
희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평생 느껴본 적 없을 정도의 분노에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당장 말해요. 누가 이랬어요? 왜 이랬어요?”
레온은 곤란한 얼굴만 할 뿐 좀처럼 대답이 없었다. 희선은 협박을 동원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난 지금 당장 나가 버릴 거예요.”
결국 남자는 굴복했다. 마지못해 연 입에서 한숨과 함께 실토가 흘러나왔다.
“젊을 때 일이에요. 부모님한테 반항 좀 하느라 그랬죠.”
그럼 자기 손으로 한 짓이라는 거 아닌가. 아까보다 더 몸이 떨렸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생각하다 희선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옛날에 말이에요. 아빠가 엄마한테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미국 가신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혹시 아세요?]
웨딩드레스를 고르던 날, 시현이 해준 이야기였다.
[부모님이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라고 강요하시는 걸 거역하느라 몇 달 동안 책 한 권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지내셨대요.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게 하고…….]
그렇다면…….
“설마 나 때문……이에요?”
희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답해요. 나 때문에 이랬냐고 묻잖아요.”
레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대로 영영 당신을 만나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희선은 끔찍한 후회에 휩싸였다.
그는 약속을 어겼던 게 아니다. 목숨까지 걸고 내게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수도 없이 당신을 원망했다. 부모님에게 져서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조차 헤아리지 못했다.
아무리 잔인한 사람들이어도 그에게는 부모니까, 그렇게까지 모질게 굴지 않았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바보같이!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나는 늦게라도 대학에 갔을 거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을 만나서 아이 낳고 내 손으로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난 내 아이가 걸음마 하는 것조차도 보지 못했어. 당신 때문에!]
미움과 원망에 차서 그를 욕하고 밀어냈던 것을 떠올리자 미칠 것만 같았다.
“왜 입 다물고 있었어요?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날 데리러 오지 않은 게 아니라고, 오지 못했던 거라고 사실대로 말했어야죠!”
이런 상처를 여태 숨기면서까지 이 남자는 모든 것을 다 자기 잘못으로 돌렸다. 얼마든지 욕하고 소리치고 원망하라면서, 그녀가 아무리 무시하고 구박해도 묵묵히 견뎌냈다.
“당신이 속상해하는 게 싫었어요.”
레온이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어쨌든 당신을 지켜주지 못한 건 나니까, 내 잘못이니까…….”
“많이 아팠죠?”
희선이 그의 팔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리자 레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울지 말아요, 응? 난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이잖아요.”
레온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던 희선이, 한참만에야 얼굴을 들었다.
울어서 토끼 눈처럼 빨개진 눈으로, 그녀는 레온의 팔을 가만히 잡아끌었다.
“들어가요.”
“응?”
“들어가자고요. 우리…… 첫날밤이잖아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레온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난 정말로 곱게 재워주려고 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선을 와락 껴안은 남자가, 다음 순간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그럼,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내 무덤을 내가 팠나 보다. 아찔한 현기증에 희선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