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아기 용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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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아기 용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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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아기 용 두 마리
2023.03.03.
케네디 회장의 결혼식이 끝나고, 미주와 함께 밖으로 나오는 현우의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두 건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 중에 기자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랜드호텔 측에서 초대장 확인을 철저히 한 덕분이었다. 얼마나 통제를 잘했는지, 웨딩홀은커녕 호텔 앞에도 카메라 한 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독 특종이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데스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쉬운 대로 결혼식 사진은 일러스트로 대체한다 해도 기사 내용만으로 화제성은 충분할 터였다. 그야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려 있는 결혼식이니까.
“호텔 커피숍에서 커피 한잔하고 갈까요?”
현우의 제안에, 언제나 그렇듯 미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강시현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했을 뿐, 미주라는 여자에게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워낙 미남으로 유명한 현우에게는 다가오는 여자들도 많았고, 대부분이 뛰어난 미인이었다. 그런 현우의 관심을 끌기에 미주는 너무 평범했다. 활기찬 성격이라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았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서른세 살이나 먹고도 사람을 의심할 줄도, 밀당할 줄도 모르는 여자였다. 언제든 현우가 연락하면 군말 없이 나와 주었고, 그가 약속에 늦어도 싫은 소리 한 번을 한 적이 없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녜요, 저도 차가 막혀서 방금 도착했어요.]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 놓고, 늘 미주는 활짝 웃으며 뻔한 거짓말을 했다.
어쨌든 두 결혼식에 다 참석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여자와는 정리해야 하는데…….
정작 그 말을 꺼내려고 커피숍에 마주 앉아서도 왠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우는 맞은편에 앉은 미주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들러리 드레스를 입고 전문가에게 메이크업을 받은 여자는 오늘따라 몰라보게 예뻤다.
모처럼 저렇게 꾸며 놓고 망가지기 쉽지 않았을 텐데, 미주는 친구의 결혼식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제 몸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푸하하하!]
[저 여자 대박 골 때린다, 진짜.]
미주의 열창을 듣고 주위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있었지만, 왠지 현우는 그런 미주가 이상하게 예뻐 보였다.
아까 케네디 회장 결혼식에서 하도 많이 우는 바람에 모처럼 했던 메이크업도 거의 다 지워져 버렸지만, 그래도 미주는 여전히 예쁘게 보였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현우의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주는 쉬지 않고 계속 종알거렸다.
“신혼여행은 원래 두 커플이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미루기로 했다네요. 대신에 오늘은 그랜드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에서 자기로 했대요. 하룻밤 숙박비가 2천만 원인가 하는 방이래요. 회장님이랑 사모님은 호텔 본관 뒤쪽에 있는 빌라로 가시고요.”
“아, 그래요?”
한마디 한마디가 다 기삿거리였다. 주의 깊게 들으며 현우는 중간 중간 질문을 던졌다.
“케네디 부인 축사는 무슨 뜻이죠? 강시현 씨더러 마음으로 낳은 딸이라고 하던데.”
“시현 씨 어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대요. 사모님이 워낙 딸처럼 예뻐하셨고, 시현 씨도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이모라고 부르면서 엄마처럼 따랐고요.”
대답하던 미주가 문득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 왔다. 잠깐만요.”
잠시 후, 이번에는 현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 본 현우의 눈이 커졌다. 도착한 것은 방금 끝난 결혼식 사진이었다.
“몇 장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기사에 실으시라고요.”
“……!”
흠칫 놀라서 자세를 고쳐 앉는 현우를 향해, 미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허락받은 거예요. 그랜드호텔에서 항의할 일 없을 테니 걱정 말고 기사 예쁘게 잘 써 주세요. 사진도 신랑 말고 신부들 잘 나온 걸로 내보내시고요.”
현우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대체 내가 기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언제부터……?
눈을 크게 뜬 채로 한참 쳐다보고 있자 미주가 픽 웃었다.
“저희 사무실 동료들한테도 기자들이 그렇게 귀찮게 굴었다더라고요. 혹시나 싶어서 현우 씨 명함에 쓰인 사무실에 전화해봤더니 아예 없는 전화번호던데요.”
“…….”
“명함까지 가짜로 만들어 놓고 정작 이름은 거짓말 안 하셨더라고요. 검색해보니까 얼굴까지 딱 나오던데요? ……민국일보 서현우 기자님.”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던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씁쓸한 빛이 어렸다.
“그냥 결혼식 취재가 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어도 아마 도와드렸을 텐데. 제가 워낙 얼굴에 약하거든요.”
“미안해요, 미주 씨. 나는…….”
현우는 어쩔 줄을 모르며 변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화려한 기자의 언변으로도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 사실이고,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고 마주 앉아 있는 이 상황에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
결국 현우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덕분에 기자님처럼 멋진 분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즐거웠는데요.”
도리어 미주는 활짝 웃어 보였다.
한 점 미련도 없어 보이는 웃음에 현우는 조급해졌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될 것 같은데, 뭐라고 말해야 할 것만 같은데.
그러나 정작 할 말을 찾지 못해 허둥거리는 사이에, 흘깃 바깥을 내다본 미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이 점점 많이 오네. ……더 쌓이기 전에 먼저 일어날게요.”
테이블 위의 부케에 잠시 미주의 시선이 머물렀다. 아까 케네디 회장 부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부케를 집어 들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기사 잘 부탁드려요, 기자님.”
멀어지는 미주의 뒷모습에서, 현우는 끝내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밤새 함박눈이 퍼붓고 눈보라까지 휘몰아치더니,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창밖에는 새파란 하늘이 보이고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먼저 눈을 뜬 시현은 아직 잠들어 있는 태하를 남겨두고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왔다.
객실 문 앞에 트레이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각종 신문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에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미리 부탁해둔 덕분이었다.
‘가만있자, 미주 씨 남친이 민국일보 기자랬지?’
시현은 민국일보부터 골라서 냉큼 펼쳐 보았다. 결혼식 기사가 어떻게 나왔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왜 없지?”
단독 특종인 셈이니까 당연히 오늘자로 당장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으로 민국일보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기사에 실으라고 결혼식 사진까지 미주를 통해 보내줬는데 어째서일까.
‘정작 보고 나니 쓸 거리가 없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실로 돌아오자 태하는 아직도 깊이 잠들어 있는 채였다.
어젯밤, 새신랑은 더없이 열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순수했다.
마치 처음 보고 처음 만지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이루는 하나하나에 진심으로 경탄하고 감동했다.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싶을 정도였다.
[예뻐. 정말 너무 예뻐.]
벌써 수도 없이 닿았던 시현의 몸 구석구석에, 그는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입 맞추며 어루만졌다.
그가 느끼는 감동이 시현에게라고 전해지지 않을 리 없었다.
덩달아 몸이 달아오르는 바람에 결국은 기나긴 겨울밤을 새하얗게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지쳐서 기절하듯 안겨 잠이 들 무렵에는, 이미 창밖이 부옇게 밝아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벌써 시간은 점심때가 훌쩍 가까워져 있었다. 슬슬 깨울까, 생각하다 시현은 마음을 바꿔 좀 더 자게 놔두기로 했다.
“…….”
시현은 잠든 태하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늘 보던 얼굴인데, 이 남자가 내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가슴이 벅차올랐다.
분명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제 떴던 해가 오늘도 똑같이 떴을 뿐인데.
눈뜨는 순간부터 어제 아침과는 기분이 전혀 달랐다. 마치 가슴속 깊은 곳부터 꽉 찬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아니다.
‘내 남편.’
시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살짝 태하의 뺨에 입을 맞췄다. 깨우지 않게 나름 조심한 거였는데, 입술이 닿자마자 태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눈을 반짝 떴다.
“미안, 깨우려던 건 아닌데. 잘 잤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태하는 뺨을 붉히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응.”
흐트러진 가운 앞섶을 여미는 손길이 분주했다. 마치 첫날밤을 치른 새 신부처럼 수줍음을 타는 태하를 보고 시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 놓고, 오늘은 왜 또 저렇게 부끄러워해?
“너 혹시 작심 십 분이라고 알아?”
“응?”
“첫날밤은 좀 미루자, 손잡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하더니, 말한 지 십 분도 안 돼서 다짜고짜 욕실까지 쳐들어와서는……!”
살짝 흘겨보자 태하가 야단맞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미안. 너무 예뻐서 그만…… 참을 수가 없었어.”
말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시현은 웃어버렸다. 내가 예뻐서 그랬다는데 뭐 어쩌겠어.
넓은 품에 뛰어들자 태하가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 왔다. 등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에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몸을 맡기고 있다가, 시현은 툭 하고 중얼거렸다.
“있잖아, 나 혹시 임신했으면 어떡하지?”
어젯밤에는 피임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고, 그 순간에는 너무 열중한 나머지 진심으로 이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 부부니까 아무 문제 없기도 하고.
그런데 막상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살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갓 결혼했으니까, 당분간은 단둘이서 신혼을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난 좋은데.”
진지하게 대답한 태하가 시현의 표정을 살폈다.
“당신은? 빨리 우리 아이 갖고 싶지 않아?”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 당연히 갖고 싶지만…….
“아직은 좀 이르지 않을까?”
단순히 신혼을 좀 즐기다 갖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한 말인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태하는 금세 초조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난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 거야. 정말 잘할 수 있어. 아버지도 나하고 같은 나이에 나를 가졌잖아?”
설득하듯 하는 말에 명백한 오류가 있었다.
“너 가졌을 때 너희 아버지는 스무 살이셨는데?”
그 부분을 지적하자 태하는 왠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시현의 어깨를 눌러 침대에 눕히고 입술을 포갰다.
“잠깐, 밥은 좀 먹고……!”
놀라서 말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달아오른 입술을 느끼고, 시현은 못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뭐, 설마 하루아침에 생기기야 하겠어?
*
온통 눈으로 뒤덮여 새하얀 벌판 한가운데,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이름 모를 주먹만 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열매가 너무 탐스럽고 예뻐서 정신없이 바라보다, 희선은 손을 내밀어 하나를 땄다. 따고 보니 뒤늦게 딸이 생각나서 하나를 더 땄다.
‘이건 우리 시현이 줘야지.’
커다란 열매를 가슴에 안고 돌아서는데 뭔가가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났다.
내려다보자 열매 껍질에 금이 가더니, 안에서 작은 아기 용 두 마리가 나왔다. 하나는 눈처럼 새하얀 백룡, 하나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황룡이었다.
강아지만큼 작은 아기 용들은 저희들끼리 꼬리를 얽고 머리를 비비며 사이좋게 놀기 시작했다. 하는 양이 귀여워서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중 한 마리가 희선의 품에 폭 안기듯 뛰어들었다.
“앗!”
품을 파고드는 생생한 감촉에 깜짝 놀란 희선이 짧게 비명을 지르는 순간.
“로즈?”
어디선가 들려온 레온의 목소리에 희선은 눈을 떴다. 아름드리나무도, 아기 용들도 온데간데없고, 대신에 레온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꿈이었구나.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