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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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너, 누구야?
2023.03.07.
신혼여행 대신에 호텔에서 사흘 동안 지내고 나서, 태하와 시현은 드디어 신혼집에 입주했다.
신혼집에서 며칠 남은 휴가를 마저 보내자 도합 일주일간의 신혼여행 휴가가 끝났다.
태하는 당분간 일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다. 결국은 한 달 동안 병가를 내고 집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다행히 원앱도 무사히 론칭했고, 현재는 별 이슈 없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태하가 자리를 비워도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태하는 원앱을 만들기 위해 왔던 사람이고, 어차피 몇 달 후면 그만둘 예정이었으니까.
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시현을, 태하가 현관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잘 다녀와.”
“응. 이따 저녁때 맛있는 거 해줘!”
왠지 움찔하는 태하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시현은 발걸음도 가볍게 집에서 나왔다.
“강 과장님, 신혼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결혼식 날 너무 예쁘셨어요!”
회사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한바탕 인사를 나누고 나서, 시현은 미주의 팔을 붙잡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미주 씨, 남친 왜 기사 안 쓴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미주가 놀란 듯이 되묻는 바람에 시현이 더 당황했다.
“민국일보랬잖아. 우리 결혼식 기사, 결국 안 나왔어. 몰랐단 말이야?”
미주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몰랐어, 안 찾아봤거든.”
남자친구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조차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시현은 미주를 다그쳤다.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이제 좀 말해주면 안 돼?”
망설인 끝에 미주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 내가 좋아서 만난 게 아니더라.”
“뭐? 아니 그럼 왜?”
“기자잖아. 알고 보니까 시현 씨 결혼식 취재하고 싶어서 신분 숨기고 일부러 접근한 거였더라고.”
시현은 깜짝 놀랐다. 직장 동료들에게 기자들이 연락해댔다는 얘기야 진작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인간이 있었다니.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뻔히 알면서 취재하게 해줬단 말이야?”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질책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레온이 뭐든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을 때, 미주는 남자친구가 기자라면서 결혼식을 취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레온은 한번 말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미주가 무슨 부탁을 했더라도 두말없이 들어줬을 텐데, 그까짓 남자 때문에 허무하게 날려버린 기회가 아깝기 그지없었다.
“바보야, 누구 좋으라고 그런 소원을 말했어? 하다못해 차라도 한 대 뽑아달라고 했어야지!”
“그냥, 해주고 싶었어.”
미주는 빙그레 웃었다.
“그 사람은 아니라도, 나는 정말 좋아했거든.”
미주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시현은 더 타박하는 대신에 팔을 벌려 미주를 꼭 껴안았다.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미주 씨, 이렇게 예쁜 사람이니까.”
누구에게나 진심인, 마음씨 고운 내 친구. 언젠가 부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길. 시현은 마음을 다해 빌었다.
“……응.”
잠시 후, 미주가 포옹을 풀고 물었다.
“그나저나 본부장님은 왜 같이 출근 안 하신 거야?”
“병가 냈어, 한 달 동안.”
미주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한 달씩이나? 왜? 어디 아프셔?”
“사실은 결혼식 며칠 전에 교통사고가 있었거든. 미주 씨 놀러 왔던 다음 날.”
시현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번에는 미주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놈, 이건 교통사고가 아니라 살인미수잖아?”
흥분한 미주가 우진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 자식은? 잡혀갔어?”
“지금 구치소에 있어. 반드시 제대로 죗값 받게 할 거야.”
우진을 떠올린 시현의 눈매가 잠시 날카로워졌다.
“갑자기 신혼여행은 왜 취소했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비행기 타는 것까진 무리일 것 같아서. 괜히 걱정하게 만들기 싫어서 하객들한텐 안 알렸지.”
“정말 까맣게 몰랐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셨거든.”
“응. 멀쩡해 보여도 혹시 후유증이 있을지 모르니까, 당분간 집에서 요양하려고 병가 낸 거야.”
설명하고 나서, 시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근데 이렇게 크게 다치고 나면 사람이 갑자기 변하기도 할까?”
“왜?”
“뭐랄까…… 태하가 예전이랑 좀 다른 것 같아서.”
“어떻게?”
잘 설명할 수가 없어서 시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뒤를 졸졸 따라다녀. 나랑 눈만 마주쳐도 얼굴이 빨개지고, 틈만 나면 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멍하니 쳐다보고 있고…….”
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본부장님 원래 그러셨잖아? 툭하면 별일도 없이 우리 사무실 와서 시현 씨 주변 맴돌고, 괜히 말 한마디라도 더 시키고 싶어서 안달하고.”
부럽다는 듯 살짝 흘겨보고, 미주는 말했다.
“좋아서 그러시는 거지 뭐. 신혼인데 오죽하겠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다르다고 말하기가 애매해서, 시현은 결국 설명을 포기해버렸다.
*
일주일간의 허니문을 보낸 후 첫 출근.
집무실로 향하는 레온의 걸음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마치 꿈만 같았다. 레온의 팔에 있는 흉터를 보고 희선은 단단히 결심한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저어, 태하는 여동생이 좋다고 했다면서요. 당신은 어때요?]
[나야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생기기만 하면 좋죠. 하지만 당신은 창피해서 싫다면서요?]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희선은 중얼거렸다.
[당신이 갖고 싶다면…… 참을래요.]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그만 그 자리에서 덮쳐버리고 말았다.
[이리 와요, 지금 당장 만들어줄 테니까.]
당분간은 허니문을 보낸 빌라에서 신혼을 즐기기로 했다. 핑계는 적당한 집을 구할 때까지, 라는 거였지만 사실 레온의 속내는 희선을 가까이에 두고 싶은 거였다.
빌라에 있으면 창밖으로 내다보아도 바로 눈에 들어올 정도니까. 정 보고 싶어 못 견디겠으면 언제든 달려가서 뽀뽀하고 돌아와도 되는 거리 아닌가.
이따 퇴근하고 또 곧바로 희선에게 달려갈 생각에 싱글벙글하며 집무실에 들어서는 레온에게, 장 비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장 비서야말로 왠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장 비서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죠? 나 없는 동안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장 비서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사실은 제 아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레온은 귀가 번쩍 띄었다. 장 비서 부부가 난임 치료 끝에 시험관 시술을 시도하고 있다는 얘기는 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이런, 나보다도 장 비서님이 더 축하받아야겠는데요?”
덩달아 기뻐하며 레온은 장 비서의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정말 축하해요. 이따가 댁으로 꽃을 보내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회장님.”
그러다 레온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참, 장 비서님이 부인과 동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장 비서는 올해 43세였다.
“예. 나이가 있어서 임신이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시험관 시술이라는 게 여자가 무척이나 고생을 하는 거지 뭡니까.”
문득 장 비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기쁘긴 한데 앞으로가 걱정이긴 합니다. 육아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낳는 것부터가 꽤나 위험한 일이라고 해서요.”
“위험하답니까? 의사가?”
“예. 초산 기준으로 만 40세 정도의 산모는 초고위험군에 속하고, 40세가 넘으면 그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희선의 나이를 떠올리고 레온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
자신을 닮은 아들은 이미 있으니까, 이번에는 희선을 닮은 딸을 갖고 싶었다.
아니, 누구를 닮아도 좋고 딸이라도 아들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저 그녀가 낳은 아이를 아기인 채로 안아보고 싶었다. 다 크고 나서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평생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면 희선으로 하여금 혼자 외롭게 아이를 낳게 만든 것이었다.
그때 그녀의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눈 감는 순간까지도 가슴에 사무칠 것 같았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혼자 아이를 낳고 고생했을 희선이 너무 가엾고 미안해서, 다시 한번 기회를 갖고 싶었다. 곁에서 돌봐줄 수 있는 기회를.
그러면서도 정작 희선의 몸에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마 제 눈에는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예쁘게만 보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겉으로 젊어 보인다 해도 그녀는 엄연히 사십 대 중반이었다.
비록 초산은 아니라 해도 첫 출산을 한 지 너무 오래된 데다 이미 중년에 들어섰다. 그런 그녀에게 임신과 출산이 몸에 얼마나 무리가 될지, 육아가 얼마나 버거울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게다가 태하를 낳기 전의 희선은 꿈 많은 아가씨였다. 이제는 가게도 접었고, 더는 생계 걱정도 없으니까 자기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건데…….
이것저것 생각해 본 후 레온은 이기적인 자신을 크게 반성했다. 아, 내 욕심이었구나.
그토록 간절했던 둘째에 대한 열망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레온에게 있어 희선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
[당신이 갖고 싶다면…… 참을래요.]
문제는 본인이 벌써 결심한 모양인데.
레온은 희선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당신 몸이 걱정되니까 낳지 말자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자기는 하나도 안 힘드니까 걱정 말라고 고집을 부릴 여자다.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둘째는 포기해야겠다고, 레온은 결심했다.
“참, 그리고 김우진 씨 말입니다만. 본인은 어디까지나 실수에 의한 단순 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답니다.”
“뭐라고요?”
레온의 얼굴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강시현 씨에게 사과를 하려고 찾아왔던 거고,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운전 실수를 했던 것뿐이지 절대 일부러 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만취 상태로 차를 몰고 와서 그대로 들이받은 주제에 뭐, 일부러가 아니라고?
“조사는 좀 해봤나요?”
“예. 알아봤더니 강아현 씨와 결혼하려다 그만 깨지는 바람에 단단히 곤란해진 모양입니다. 소송도 여러 건 걸려 있고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상태입니다.”
“그게 동기였군요.”
레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당부했다.
“반드시 살인미수로 처벌받게 해야 합니다. 고의적인 범행이라는 증거를 더 찾아서 검찰에 제출하도록 하죠.”
*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시현은 귀가를 서둘렀다.
양식,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다 갖추고 있을 정도로 음식을 잘하는 남자다. 저녁때 맛있는 거 해달라고까지 말했으니까, 지금쯤 얼마나 진수성찬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감에 가슴이 설렜다.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뭔가가 타는 냄새였다.
“태하야?”
시현은 가슴이 철렁해서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그야말로 초토화 상태였다. 깨진 접시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양념통.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반죽이 들어 있는 보울과 아직도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냄비.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서 있던 태하가, 울상을 하고 돌아보았다.
“……왔어?”
예전의 태하에게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에, 시현은 확신을 얻었다.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되었다.
“너…… 누구야?”
순간, 태하의 얼굴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