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가르쳐 줘,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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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가르쳐 줘, 누나.
2023.03.10.
시현이 출근한 동안, 태하는 낮에 혼자서 병원에 갔었다.
[언제 어떻게 기억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확 돌아올 수도, 생활하다 보면 조금씩 생각날 수도, 혹은 아예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집에 돌아온 태하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분명 제 몸은 슬림하고 늘씬했었는데, 지금은 건장한 근육질의 몸이 되어 있다.
시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키운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근육질의 아이돌이 나오는 영상에 넋을 놓고 있는 시현을 봤을 때, 태하는 늘씬하기만 한 제 몸이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어른이 되면 꼭 몸부터 만들어야지, 하고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변한 것은 몸뿐이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찾아 본 바에 의하면 자신은 잘나가는 회사 대표에다 수천억의 가치에 달하는 주식을 보유한 부자라고 했다. 게다가 임시직이지만 지금은 미래은행 본부장으로 있다고도.
겨우 스물여섯 살에 많이도 이뤘구나, 싶었다. 아마 이것도 시현에게 남자로 보이고 싶어서 죽도록 노력한 결과겠지.
시현은 스무 살의 태하를 손톱만치도 남자로 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체 어쩌다 그녀가 저와 결혼까지 하게 된 건지 믿기지 않았는데, 기억이 없는 동안에 이뤄놓은 것들을 보니 이해가 갔다.
제가 봐도 멋진 놈이었다. ……스물여섯 살의 윤태하는.
문제는, 지금의 자신은 그 윤태하가 아니라는 거였다.
시현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무 살 애송이. 그게 자신이었다.
‘만약에 내가 스무 살이라는 걸 알게 되면…….’
확신할 수 있었다. 시현은 절대 자신을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거울 속의 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태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아이라도 생기면 모를까, 그 전에는 죽어도 들키지 말아야겠다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태하는 주방으로 향했다.
[이따 저녁때 맛있는 거 해줘!]
아침에 시현이 그렇게 말하고 출근했으니까, 저녁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물론 태하는 요리와 전혀 친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시현이 밥을 해 주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찾은 후부터는 가정부가 그의 식사를 돌봤기 때문에 배울 겨를이 없었다.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라면이나 볶음밥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시현이 맛있는 거 해달라고 했으니까 노력은 해 보아야 했다.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찾아서 흉내 내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까짓 요리쯤이야, 하고 생각하는 태하였다.
*
시현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너…… 누구야?”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태하는 굳어진 얼굴에 어떻게든 미소를 띠려 애썼다.
“……누구냐니. 윤태하잖아, 당신 남편.”
“그래, 윤태하지. 그런데 내가 아는 윤태하는 아니잖아.”
시현은 엉망이 된 주방을 새삼 둘러보았다.
“내가 아는 윤태하는 양식에 한식 조리사 자격증까지 있거든.”
태하는 혀를 깨물었다. 그런 줄은 미처 몰랐다. 진작 알았더라면 몰래 전문가를 불러서라도 제대로 준비할 걸,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솔직히 말해 봐.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태하는 시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확신에 가득 찬 눈빛을 본 순간, 더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태하는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입대하던 날,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다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태하야, 하고 부르는 시현의 목소리에 눈을 떠 보자 병원이었고, 바로 다음날이 결혼식이었다고.
“……그렇게 된 거야.”
설명이 끝나자, 시현은 태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 같은 장난 두 번은 재미없어.”
“두 번이라니?”
“전에도 나 몰라보는 척 했잖아!”
그러나 태하가 그게 무슨 소린지 알 리 없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몰라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시현이 미치겠다는 듯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는 다시 정리하듯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네가 스무 살이다, 이거야?”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입대하기 직전에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데? 너한테는 며칠 전 일이니까 기억날 거 아냐.”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했던 말인데 기억이 안 날 리가. 태하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내가 빨리 제대하고 달려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그제야 시현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진짜구나, 너.”
한참 말을 잃고 있던 시현이, 다음 순간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너 그럼 나 때문에 미래은행 왔던 것도 기억 안 나? 우리 첫 키스 했던 것도? 나한테 이 집 사주면서 프러포즈 했던 것도?”
“전혀.”
태하는 고개를 젓고 고쳐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이랑 헤어져서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이 마지막이야. 그게 나한텐 겨우 며칠 전이고.”
잠시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야 시현은 겨우 현실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예쁜 얼굴이 충격에 물드는 것이 태하의 눈에도 보였다.
“어쩐지, 갑자기 첫날밤 미루자고 하더니…….”
말하다 말고 시현이 갑자기 털썩 주저앉더니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 살아, 내가 스무 살짜리랑……!”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였다. 자책하는 시현이 안타까워서, 태하는 덩달아 무릎을 굽혀 위로하듯 조심스레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신은 몰랐잖아. 그리고 몸은 스물여섯이니까 괜찮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시현이 새빨개진 얼굴을 들어 흘겨보았다.
“왜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 안 했어?”
“내가 스무 살인 걸 알면 당신이 결혼 안 해줄 것 같아서.”
시현이 부정하지 않아서, 태하는 제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씁쓸해졌다. 역시나 스무 살의 윤태하를 남편으로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구나. 이제부터는 날 또 어린 동생 취급하겠구나.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태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현은 계속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리자 미치겠는 모양이었다.
“아는 누나랑 갑자기 결혼해서 다짜고짜 자, 자는 셈인데 넌 아무렇지도 않았어?”
“난 계속 좋아했으니까.”
무너지는 마음을 감추고, 태하는 어떻게든 담담해 보이려 애를 썼다.
“아는 누나였던 적 없어. 나한테는 늘 사랑하는 여자였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태하는 코끝이 찡해 오는 것을 꾹 참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이, 나한텐 꿈만 같았어.”
작별인사를 건네듯 말하고, 태하는 몸을 일으켰다.
“피곤할 텐데 쉬어. 오늘부턴 내가 다른 방에서 지낼 테니까 걱정 말고.”
자칫 울어버릴 것 같아서, 태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방으로 향했다.
“어딜 가?”
그러나 시현이 당장 쫓아와서 앞을 가로막고 그를 흘겨보았다.
“나랑 같은 침대 쓰는 거, 싫을 거 아냐. 그러니까…….”
“결혼한 지 겨우 일주일 됐는데 각방 쓰잔 말이야, 지금?”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에 태하는 놀라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윤태하는 내가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윤태하는 그냥 윤태하지, 너 말고 다른 윤태하가 또 있어?”
다그치듯 말하던 시현이, 이윽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냥 잠시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니잖아. 기억이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거고. 드라마 보니까 야구공 같은 거 얻어맞으면 바로 뿅 하고 돌아오던데?”
태하는 힘들게 말했다.
“의사가…… 어쩌면 영영 안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어.”
“안 돌아오면 마는 거지 뭐.”
시현의 목소리는 밝았다.
“까짓것 일곱 살 연하랑도 만났는데 열세 살 연하…… 어휴 강시현, 복 터졌네.”
소리 내어 웃고 나서, 시현은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 마. 네가 잊어버린 것들, 내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 줄 테니까.”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눈물이 기어이 울컥 새어나왔다.
“정말 나라도 괜찮아? 계속 같이 살아도 돼?”
“어휴, 누가 스무 살 아니랄까봐 아주 아기네, 아기.”
시현이 손을 뻗어 태하의 눈물을 훔쳐 주며 놀렸다. 그래도 자꾸만 흘러넘치자 결국은 팔을 벌려 힘껏 안아주었다.
“스무 살이든, 스물여섯 살이든, 너는 너야.”
들썩이는 넓은 등을 토닥여 주며, 그녀는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남편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목 깊은 곳에서 격렬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 그녀의 손을 잡고 웨딩 로드를 걷던 그 순간보다도 더 행복했다.
그때도 물론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들키면 어쩌나,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시현은 사실을 알고도 그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몇 살이라도 너는 너라고 말해 주었다.
너무 행복해도 눈물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
제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우는 커다란 남편의 등을, 훨씬 작은 아내는 언제까지나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실컷 울고 나서야 태하는 울먹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정말 잘할게. 당신이 날 받아들여준 걸 후회하지 않……!”
갑자기 이마에 아픔이 느껴지는 바람에 태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건 그거고.”
손가락으로 태하의 이마에 딱밤을 먹인 시현이 괘씸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젠 내가 열세 살이나 많은데 당신이 뭐야, 당신이?”
“……?”
“누나라고 불러.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태하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시현이 자신을 동생으로만 보는 게 싫어서, 태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뭐, 당신? 이게 건방지게!]
수도 없이 꿀밤을 얻어맞고 혼이 나면서도 꿋꿋이 당신이라고 부른 끝에 시현도 결국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누나라고 부르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뭔가 이득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이참에 누나 소리 좀 들어 보자.”
“하지만…….”
좀처럼 누나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망설이자, 시현이 으름장을 놓았다.
“각방 쓸래?”
“아니!”
태하는 곧바로 굴복했다.
“……누나.”
그제야 시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듣기 좋은데?”
*
제 발등을 찍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좋아, 누나?”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온몸에 전율이 일면서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엄마야!”
기겁을 해서 도망가려 했지만 그래 봐야 품 안이었다. 금세 허리를 붙잡혀 단단히 끌어안겼다.
“어디 가, 누나. 이제 시작인데.”
“으아아!”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던 건 순전히 장난기에서였다. 옛날에 누나, 누나, 하고 부르며 따르던 때가 생각나서.
그러나 앳된 목소리로 들었던 ‘누나’와 성숙한 어른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 ‘누나’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누나라는 말이 이렇게 야하게 들릴 줄이야.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누나라고 불릴 때마다, 마치 하면 안 되는 불장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랑 사랑을 나누는데 이게 웬 난데없는 배덕감인지!
시현은 반쯤 울먹이며 애원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냥 원래대로 불러!”
“싫은데.”
그러나 한 마디로 거절당했다.
“내가 잊어버린 거, 하나하나 가르쳐 주겠다며. 그러니까 어떻게 해 줘야 좋은지…….”
어린 남편은, 악마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속삭였다.
“……가르쳐 줘,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