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 베이비, 베이비 (152/181)


#152. 베이비, 베이비
2023.03.14.



 
태하는 평생에 걸쳐 어른스러웠다. 물론 스무 살이었던 당시에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스물여섯 살과는 확실히 달랐다.

스물여섯 살의 태하가 지그시 바라보는 편이라면, 스무 살의 태하는 몸으로 직접 표현하는 쪽이었다. 하루 종일 시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틈만 나면 껴안고 입을 맞췄다.

이해는 하겠다. 태하에게 있어서는 오랫동안의 짝사랑이 이루어진 상황일 테니까.


‘하지만 이건 좀 지나친 거 아냐?’

거짓말 안 보태고, 화장실 갈 때를 빼놓고는 둘 사이의 거리가 반경 1미터를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대체 이렇게 넓은 집은 왜 샀는지 모를 일이었다. 원룸으로도 차고 넘쳤을 텐데.


[나도 요리 배울게. 하다 보면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스물여섯의 자신이 요리에 능숙하다는 걸 알고, 태하는 제가 요리를 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의욕만 넘쳤지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불까지 낼 뻔하고, 결국 당분간 요리는 시현이 맡기로 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는 시현을, 태하가 등 뒤에서 살며시 껴안으며 속삭였다.


“누나.”

시현은 흠칫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뒤집개를 놓칠 뻔했다.


“제발 좀! 요리 중이잖아, 데면 어쩌려고 그래?”

목소리를 높이자 태하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물러났다.


“……미안.”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있는 남자를 보자 시현은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자기 딴에는 좋아서 저러는 걸 텐데, 내가 너무 심했나.

시현은 한숨을 쉬고 다가갔다.


“왜 그렇게 계속 졸졸 따라다니는 건데?”

누그러진 목소리에 태하는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너무 행복한데, 가끔씩은 불안해. 이게 다 꿈이 아닐까, 싶어.”

“…….”

“꼭 누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시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꼭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곁에 있다는 걸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전에도 태하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 사귈 무렵의 일이었다.


[이게 다 꿈일까 봐 무서워. 눈뜨면 다 없었던 일일까 봐.]

그때도 그랬는데, 갑자기 6년 후의 세상에 뚝 떨어진 셈인 지금은 얼마나 불안할까.

시현은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우리, 아기 가질래?”

태하가 흠칫 놀라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며.”

“아냐, 나도 빨리 갖고 싶어. 너 닮은 아기.”

자기를 닮은 아기를 안으면 태하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품에 안긴 아기의 무게를 느끼면,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한참 시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이윽고 숨을 들이쉬더니 시현을 번쩍 안아들었다.


“지금 만들어 줄게, 누나.”

거침없이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에, 시현은 눈물을 삼켰다.

아니, 그렇다고 지금 당장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

레온이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희선은 빌라에 혼자 남아 있었다.

독채인데다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호텔이라는 느낌은 안 들지만 엄연히 여기도 호텔 시설의 일부였다. 주방이 있기는 하지만 레온의 지시로 일체의 취사도구를 다 치워 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밥 정도는 내 손으로 해 먹어야죠.]

[여태 그만큼 음식을 했으면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이제 남이 해주는 밥을 먹을 때가 됐다는 게 레온의 주장이었다.

식사 때가 되면 호텔 식당에서 직접 배달이 온다. 그래서 삼시세끼를 다 룸서비스나 외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청소는 룸메이드가 하고, 세탁도 호텔 직원이 세탁물을 가지러 오고 배달까지 해 주니 희선은 정말로 할 일이라곤 없었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만든 주제에, 레온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희선을 안쓰러워했다.


[하루 종일 혼자 심심하죠? 내가 최대한 빨리 일 끝내고 올게요.]

그러나 레온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사실 빌라에 혼자 남은 희선이, 심심할 겨를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을.


“너무 어렵다…….”

한참 노트북과 씨름을 하던 희선이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했다.

희선은 생전 처음으로 PPT라는 걸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웬만한 학생이나 직장인들에게는 일도 아니겠지만, 희선에게는 PPT 제작은커녕 애초에 컴퓨터 다루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평생을 허드렛일이나 식당 일을 전전하며 살았는데 언제 컴퓨터를 만져 봤을까. 처음 하루 이틀은 마우스 포인터조차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언젠가 태하를 만나 이야기하겠다는 일념에 그동안 영어공부 하나는 열심히 했지만, 그것도 일하면서 외국 방송을 켜놓고 계속 듣고 따라서 중얼거리는 식이라 따로 공부를 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즉 희선에게 있어서는 수십 년 만에 처음 하는 공부인 셈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독학으로 공부해 가며 하자니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 시현이는 회사원이니까 이런 것도 잘 하겠지? 좀 도와달라고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 희선은 고개를 저었다. 한창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자식들을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일만은 스스로 해내고 싶었다.

잠시 노트북에서 떨어져 한숨 돌리던 희선은 문득 얼마 전에 꾼 꿈을 떠올렸다.

꿈은 보통 흑백이라는데, 색깔 하나하나가 얼마나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몰랐다. 아기 용이 품에 파고드는 감촉까지도 실제인 것처럼 생생했다.


‘혹시 태몽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태하를 가질 무렵에도 유난히 꿈이 생생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태몽이었다. 그때는 용이 아니라 사자였지만.

이 나이에 또다시 아이를 낳는다. 상상만 해도 겁이 덜컥 났지만, 기뻐하는 레온의 얼굴을 떠올리자 금세 용기가 났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당신이 아기를 가졌다고요?’

입만 열면 둘째 타령을 하던 남자가, 얼마나 기뻐 날뛸까.

아기를 갖고 싶은 것은 꼭 레온 혼자 뿐만은 아니었다.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희선 역시 은근히 가슴이 설렜다.

아들과 재회해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지금도 희선은 간혹 악몽에 시달렸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꿈이었다.


‘다시 아기를 낳으면, 그런 꿈도 안 꾸게 되지 않을까?’

잠시 들떴던 희선의 기분은, 며칠 전 인터넷으로 찾아본 자료의 내용을 떠올리자마자 확 가라앉았다.

자료에 의하면 엄마의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자연임신에 성공할 확률이 10프로대로 떨어지고, 46세에는 거의 0프로에 수렴한다고 했다.

곧 해가 바뀌면 희선은 딱 46세.


‘역시 태몽이 아니었나…….’

금세 시무룩해진 희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한숨 돌리고 나서 다시 마우스를 붙잡고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하는데, 얼마 안 가서 바깥에서 레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즈, 나 왔어요!”

희선이 재빨리 노트북을 닫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방문이 확 열리고, 레온이 커다란 강아지처럼 뛰어 들어왔다. 그는 희선을 품에 꼭 껴안고 나서야 이제야 숨이 트인다는 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희선은 웃음을 참았다.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매일 퇴근할 때마다 이산가족 상봉하듯 하는 걸까.

심지어 오늘은 아침에 헤어지고 나서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출근한 지 두 시간쯤 됐을 무렵인가, 갑자기 달려와서는 한바탕 키스를 퍼붓고 갔으니까.


[왜 온 거예요? 뭐 잊고 갔어요?]

[회의가 너무 짜증나서 도망 왔어요!]

그래 놓고 몇 시간 안 돼서 퇴근해서는 또 이 모양이다.

한참만에야 희선을 품에서 놓아준 레온이, 뒤늦게 그녀의 어깨 너머로 노트북을 힐끗 보며 물었다.


“근데 당신 뭐 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도 볼 건 다 봤나 보다. 희선은 시치미를 딱 뗐다.


“심심해서 영화 보고 있었어요.”

“아닌데, 노트북으로 뭐 하고 있는 거 같던데요?”

하여튼 쓸데없이 눈치는 빨라서!


“아니라니까요.”

딱 잘라 말하고, 희선은 조심스럽게 레온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자연임신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니 정 아이를 원한다면 시술을 해보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참. 좋은 소식이 있어요.”

그러나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온이 말했다.


“장 비서님 부인이 아기를 가졌다더라고요.”

“어머나, 축하할 일이네요!”

희선은 손뼉을 쳤다. 미국에서부터 오랫동안 레온을 모셨던 장 비서는 희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첫 아이죠? 장 비서님이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아주 좋아서 싱글벙글하더군요. 한편으론 걱정도 되는 모양이고.”

“뭐가요?”

“부부가 다 나이가 있잖아요. 마흔이 넘어서 육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게 말하고, 레온은 힐끗 희선의 눈치를 보았다.


“나도 다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둘째는 무리인 것 같아요.”

희선은 놀랐다.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그래도, 정작 낳으면 예뻐서 힘든 것도 모르지 않을까요?”

레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젊었을 때야 그랬겠죠. 그런데 이젠 나도 슬슬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서. 이 나이에 아이 키우는 상상을 했더니 눈앞이 캄캄하지 뭐예요.”

희선은 어쩔 줄을 몰랐다. 레온이 하도 원해서 힘들게 결심한 건데, 정작 그는 이제 마음을 접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게다가 우린 신혼인데, 아이가 생기면 단둘이 로맨틱한 시간을 갖기도 쉽지 않을 거고.”

희선의 허리를 껴안고, 레온이 속삭였다.


“우리한테는 이미 아들도 있고, 이젠 딸도 생겼잖아요. 그러니까 더 욕심 내지 말고 우리 둘이 사이좋게 살아요.”

이미 결심한 듯한 말투에 희선은 마음이 복잡했다. 난임 치료가 그렇게 힘들다던데 안 하게 되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역시 서운하기도 했다.

생각이야 살면서 언제든 또 바뀔 수 있는 거지만, 변덕을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나중에 또 마음이 바뀌어서 둘째 타령을 한다 해도 그때는 정말 늦게 된다.

희선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레온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이는 필요 없어요.”

 

*



[더 욕심 내지 말고 우리 둘이 사이좋게 살아요.]

레온의 태도는 확고했지만, 그래도 희선은 결혼식 날 밤에 꾸었던 꿈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몽 같은데, 자연임신이 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하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희선은 레온이 출근한 틈을 타서 몰래 약국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수십 년 만에 사 보는 임신테스터였다. 그동안 기술이 많이 발전했는지, 2주일만 지나도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약사의 설명이었다.

즉 그 꿈을 꿨던 날 밤에 정말 아기가 생겼다면, 지금쯤은 나타날 거라는 뜻이었다.

누가 볼까봐 꽁꽁 숨겨 가지고 빌라로 돌아온 희선은 한참 망설인 끝에야 겨우 테스트를 실시해 보았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하고 나서 들여다본 결과는 여지없이 한 줄.


‘그래. 그럴 리가 없지.’

한숨을 쉬며 테스터를 휴지통에 던져 버리려다, 희선은 갑자기 숨을 멈췄다.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줄 옆에, 아주 희미하게 한 줄이 더 생겨 있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봐도 틀림없는 두 줄.


“…….”

희선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한참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충격이 좀 가시고 나자, 이번에는 기쁨이 밀려왔다.

다시 한번 엄마가 될 수 있다.

이번에는 내 아이를 내 손으로 키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레온을 떠올린 순간, 희선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아이는 필요 없어요.]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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