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 케네디 부부의 복수 (2) (156/181)


#156. 케네디 부부의 복수 (2)
2023.03.28.



 
고풍스러운 한옥 대사관저의 응접실에 앉아 미국 대사 부인을 기다리는 동안, 사모님들은 회화 연습을 핑계 삼아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근데 혹시 여기 영어 못하는 사람은 없죠?]

[왜 없겠어요.]

[그러게요, 한 사람쯤은 있겠죠.]

은근히 자기 얘기를 하는데도 케네디 부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역시 못 알아듣는구나.’

사모님들은 마음 푹 놓고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근데 그거 아세요?]

개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사모님이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케네디 회장 결혼식에 그랜드호텔 룸메이드들이 단체로 참석했더라는 정보를 알려준 그 사모님이었다.


[‘그분’ 말이에요. 식당에서 일하기 전에는 남의 집 가정부로 일했다네요.]

사모님들은 호들갑스레 놀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식당 아줌마도 모자라서 가정부라니!


[아니 그게 사실이에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요?]

[제 친정이 조한신문이잖아요. 틀림없는 정보니까 믿으세요.]

말을 꺼낸 사모님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 사모님이 바로 조한신문 사주의 장녀이자, 이보라의 큰언니였다.


[세상에, 이걸 대사 부인께서 알면 뭐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알려드릴 수도 없고.]

케네디 부인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사모님들은 점점 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어쩐지 결혼식에 뜬금없이 웬 룸메이드들을 잔뜩 초대했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요.]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이라 친근했나 보네요.]

[그럼 수준 맞는 사람들하고나 놀지 여긴 왜 끼어들어서.]

[자존심도 없나 봐요. 저번에 그렇게 당했으면 알아서 나갈 것이지.]

그때,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여 끼어들었다.


[작작들 좀 해요!]

고양이 사모님들 중, 고씨 성의 사모님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양씨와 이씨 사모님들도 각각 화난 얼굴로 덧붙였다.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대체 뭐 하는 짓이에요?]

[대체 저분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예요?]

이 세 사람은 처음부터 희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희선이 쓰러졌던 날, 이들은 다른 사모님들이 불똥이 튈까 봐 잽싸게 도망간 사이에 셋이서 끝까지 복도에 남아 있다가 케네디 회장이 울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찾아 헤맸는지 알아요?]

[제발 당신이 살아 있기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정확한 사연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만 들어도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복도에서 몰래 눈물을 훔친 고양이 사모님들이었다.

원래부터 이들은 케네디 회장에게 팬심을 품고 있었다. 그분이 그토록 애절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분 남편이 무서워서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는 주제에,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고양이 사모님들이 먼저 날을 세우자 다른 사모님들도 지지 않았다.


[뭐예요, 지금 저쪽에 붙겠다는 거예요?]

[저쪽이고 이쪽이고가 어디 있어요? 저분은 자칫 아이를 잃을 뻔했는데, 그러고도 여태 정신을 못 차렸어요?]

[그게 왜 우리 때문이에요? 자기가 미련한 탓이지!]

자기 때문에 한바탕 싸움이 났는데도 정작 케네디 부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저 조용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런 케네디 부인을 보고 고양이 사모님들은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딱 봐도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 지금 무슨 말이 오가고 있는지 알게 되면 상처받을 것 같아서 차마 한국말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는 거였다.


[나중에 당신들이 한 짓이 저분 남편 귀에 들어갔다고 울고불고하지나 말아요.]

[어머, 걱정 놓으세요. 누가 비겁하게 일러바치지만 않으면 모를 테니까.]

[뭐라고요? 비겁?]

점점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마침 미국 대사 부인이 등장했다. 사모님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싸움을 멈추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사 부인을 맞이했다.


[어머나, 오셨어요?]

[오랜만이에요, 부인!]

[블라우스가 참 잘 어울리시네요.]

여기저기서 인사를 받은 대사 부인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케네디 부인은요? 오늘 참석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디 계시지요?]

대사 부인이 케네디 부인부터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케네디 회장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거물 경제인이고, 대통령과도 막역한 사이니까. 따지고 보면 오히려 대사 부인이 케네디 부인을 알아 모셔야 할 입장이었다.

문제는 케네디 부인은 남편에 비해서 한참 격이 떨어지는 여자라는 것이다. 영어로 인사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여자를 보고, 과연 대사 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음습한 기대에 찬 시선이 일제히 케네디 부인을 향했다.


“…….”

사모님들이 숨죽여 바라보는 가운데, 드디어 케네디 부인이 입을 열었다.


[정희선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부인.]

유창한 영어에 사모님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순간적으로 인사말만 달달 외워 온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케네디 부인! 만나서 반가워요. 얼마나 뵙고 싶었는지 몰라요.]

반갑게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대사 부인을 향해, 케네디 부인은 계속해서 거침없이 영어로 말했다.


[제 남편도 부인과 대사님께 인사 전해달라고 했답니다. 조만간 저희 호텔로 두 분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이에요.]

[어머나, 정말인가요?]

대사 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농담을 건넸다.


[사실은 두 분의 결혼식 초대장을 기다렸었는데, 이제야 초대해주시는군요.]

[죄송합니다, 부인. 사실은 제 아들의 결혼식과 같은 날이라 민망했거든요. 그래서 친한 친구 몇하고 저희 호텔 직원들만 초대했었답니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신부였을까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주위에 있던 사모님들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변했다.

하루 이틀 공부한 실력이 아니었다. 단순히 유창한 정도가 아니라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웠다. 발음은 역시 네이티브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비리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뒤늦게 혼란스러워하는 사모님도 여럿이었다.

대사 부인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케네디 부인께서는 영어를 무척 잘하시는군요?]

케네디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십 년 넘게 공부했답니다. 제 남편이 쓰는 말인걸요.]

당연히 대사 부인의 옆자리는 케네디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티타임 내내 대사 부인은 거의 케네디 부인과만 이야기했다. 나머지 사모님들은 꿔다 논 보릿자루 신세가 돼버렸지만, 서운해할 겨를도 없었다.


‘그럼 우리가 했던 말을 다 알아들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 찻잔을 든 사모님들의 손이 눈에 띄게 벌벌 떨렸다. 순진하고 어수룩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혹시 한국 네티즌들이 남편 되시는 분을 김레온이라고 부르는 것 아시나요?]

[네, 들어본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케네디 회장님의 한국 사랑이 워낙 지극해서 네티즌들이 명예 한국인 자격을 준 거랍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 부인을 만나 뵈니 한국 사랑의 이유를 알겠네요.]

[과찬의 말씀이세요, 부인.]

사모님들이 속으로 떨고 있는 가운데, 대사 부인과 케네디 부인 사이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두 분의 열렬한 사랑이 미국에서도 화제랍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케네디 회장님과 함께 양국의 친선에 기여해주시길 부탁드려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티타임을 가진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대사 부인은 친히 대사관저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조만간 꼭 다시 뵈어요, 케네디 부인. 초대 기다리고 있겠어요.]

[환대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저희끼리 잠시 인사 나누고 나서 돌아가겠습니다.]

케네디 부인이 말했다. 대사 부인에게 하는 작별인사 같지만, 실상 다른 사모님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남으라는 뜻이었다.

대사 부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사모님들 그 누구도 감히 먼저 차에 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

이윽고 케네디 부인의 시선이 그중 한 사모님에게 꽂혔다.


“친정이 조한신문이라고 하시던데. 여동생 되시는 분은 잘 지내시나요?”

질문을 받은 사모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사모님들도 가슴이 철렁했다.

조한신문 막내딸, 이보라의 결혼식에서 벌어졌던 아수라장은 한동안 대단한 화제였다. 그래서 그녀의 언니 앞에서는 아무도 동생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없었는데.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서 요양 중이에요.”

한참 만에야 돌아온 대답에, 희선이 안됐다는 듯이 말했다.


“안타깝네요. 제 며느리가 동생분에게 신세를 많이 졌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했어요.”

“…….”

“그건 그렇고, 전에 제 남편이 친정 아버님께 한번 전화를 드렸었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모를 리 없었다. 당시 동생인 보라가 일으킨 말썽 때문에, 격노한 케네디 회장이 광고를 끊겠다고 압박을 넣었던 일이었다. 하마터면 신문사가 망할 뻔한 위기였다고 들었다.


“남편이 조만간 또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네요.”

“……!”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떠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케네디 부인은 나머지 사모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덕분에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화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조용하기만 한 목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저는 남의 집 청소나 하느라 바빠서, 여태 사람을 면전에 놓고 험담을 하는 법도 몰랐거든요.”

사모님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말씀대로 서로 수준이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모임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수준 떨어져서 더는 못 어울리겠다. 아까 들었던 말을 우아하게 돌려주고, 케네디 부인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이만.”

이만, 하고 말해놓고도 정작 당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즉 나는 여기 있겠으니 너희들이 가라는 뜻이었다.

아까까지 가정부니 뭐니 하며 멸시하던 여자의 말 없는 명령을, 감히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다. 사모님들이 도망치듯 하나둘씩 떠나는 가운데, 조용한 목소리가 고양이 사모님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세 사모님들은 바짝 긴장했다. 아까 자기들도 영어로 지껄이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그거야 케네디 부인이 상처받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거지만,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어, 정 여사. 아까는…….”

어떻게든 설명하려 입을 뗀 순간, 희선이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의 조용하고 차가운 미소가 아닌, 그저 수줍은 듯한 미소였다.


“혹시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사모님들은 각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여자들끼리 좀 싸운 거 가지고 뭐 어쩌기야 하겠어?’

애써 그렇게들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케네디 회장 명의로 발송된 초대장이 재계를 한바탕 휩쓸었다.

그랜드호텔에서 경제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새해맞이 파티를 연다는 것이었다.

케네디 회장에 대한 한국 재계의 입장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미 눈치를 보고 있는 사람과, 언젠가 보게 될 사람. 혹은 이미 관계가 있는 사람과, 앞으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

즉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을 사람은 대한민국 재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웬만한 기업가들은 다 초대받은 와중에, 연락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몇몇 존재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케네디 회장 측에 누락이 아니냐며 문의를 넣었다. 온 재계가 다 주목하는 모임에 자기만 빠지게 되면 체면 문제니까.

그리고 케네디 회장 비서실을 통해 돌아온 대답은 딱 한 문장이었다.


- 부인께 여쭤보십시오.

여기저기서 남편들의 노한 목소리가 집안을 뒤흔들었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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