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157/181)
157.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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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2023.03.31.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시현이 미주에게 말했다.
“미주 씨. 오늘 부모님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거든. 혹시 약속 없으면 같이 갈래?”
레온과 희선은 싹싹하고 활기찬 미주를 무척 예뻐했다. 데려가면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하고 물었는데, 미주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됐어.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가족끼리 보내야지, 눈치 없이 내가 거기 왜 끼어? 걱정 말고 부모님이랑 재밌게 보내. 아버님이랑 어머님한테 안부 전해드리고.”
“어차피 집에 가 봐야 혼자 할 일도 없잖아.”
“내가 왜 혼자야? 같이 지낼 남자가 줄을 섰는데.”
시현은 귀가 번쩍해서 물었다.
“누구? 그새 또 누가 생겼어?”
“둘이야. 하나는 영국 남자고 하나는 미국 남자. 둘 다 연하고.”
“세상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시현을 향해, 미주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있어, 해리랑 케빈이라고!”
난 또 뭐라고. 시현은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잠시 후, 미주와 나란히 사무실을 나온 시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 미주 씨. ……혹시 그 남자, 연락 없어?”
그 남자와는 끝났다고 미주는 말했지만, 시현은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단독 특종인데. 이쪽에서 기사 내라고 허락해주고, 결혼식 사진까지 실으라고 보내줬는데 정작 끝까지 기사는 안 나왔지 않은가. 늦게라도 미주의 마음을 갖고 논 걸 후회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주는 더 물을 여지조차 주지 않고 딱 잘라버렸다.
“없어. 글쎄 끝났다니까.”
회사 밖으로 나오니 이미 짧은 겨울 해는 다 지고,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새하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이미 화이트크리스마스라고 떠들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의 함박눈일 줄은 몰랐다.
“아, 너무 예쁘다!”
미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 속에 한편으로 쓸쓸함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고 시현은 가슴이 찌르르했다.
도저히 이런 날 미주를 혼자 남겨두고 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주 씨,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다시 한번 권하려는데, 미주가 선수를 쳤다.
“그럼 조심해서 가, 시현 씨!”
말하자마자 거리로 뛰쳐나간 미주는,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해서 멈춰 섰다.
검은 코트에 목도리를 한 장신의 남자가, 미주의 앞을 가로막듯 우뚝 서 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미주의 머리 위에 우산을 받쳐 주며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메리크리스마스, 미주 씨.”
시현은 비명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입을 허둥지둥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세상에, 그 남자잖아?’
미주가 끝까지 인사를 안 시켜주는 바람에 결혼식 날은 얼굴도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대단한 미남이었다.
함박눈이 휘날리는 어두운 거리.
우산 속에 만들어진 작은 세상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히 맞닿았다.
“…….”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왠지 보고 있는 사람이 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
미주는 손을 뻗어 말없이 우산을 받아들더니 그대로 접어버렸다.
“……?”
왜 저러나, 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미주가 갑자기 장우산으로 남자의 머리를 가격했다.
퍽!
깜짝 놀란 남자가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머리, 허리, 손목. 소싯적에 검도라도 배웠는지, 미주는 방어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며 때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몇 대를 두들겨 맞은 남자의 무릎이 푹 꺾였다.
“윽……!”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우산을 던져 버린 미주가 차갑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땐,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
시현이 집에 돌아온 줄도 모르고, 태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태하야, 나 왔어.”
놀랄까 봐 가만히 말을 걸자 태하가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시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이 켜지듯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잘 다녀왔어?”
태하는 얼른 일어나서 시현을 꼭 껴안았다. 시현은 고개를 살짝 빼서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또 공부하고 있었어?”
“응. 봐도 잘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스무 살의 태하는 스물여섯 살 태하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미래은행이야 어차피 1년 계약직인 데다 맡은 바 임무는 이미 해낸 거나 마찬가지니 별문제 없다 쳐도, 원래 자기 회사인 유니온TA 쪽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미래은행에 오기 전에 본인이 없어도 일이 굴러가도록 세팅해 놓았지만, 그래도 대표가 언제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최종 의사결정은 대표가 할 일 아닌가.
그래서 태하는 틈만 나면 회사 자료를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수학책을 본다고 얼마나 알아볼 수 있을까. 머리를 싸매고 있는 태하를 볼 때마다 시현은 마음이 아팠다.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기억이 돌아오면 다 해결될 텐데.”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안 돌아오면 어때,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농담처럼 한 말에, 태하는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나는 집에서 놀고먹는 남편이 좋아?”
겨우 스무 살짜리가 이런 걱정을 한다. 귀엽고도 한편으로는 애틋해서 태하를 한번 힘주어 꽉 끌어안아 주고 난 후, 시현은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엄마 아빠 기다리셔,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와서 레온과 희선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는 호텔 빌라로 향했다.
“어서 오렴.”
빌라에 도착하자 레온이 혼자 나와서 맞이했다.
“엄마는요? 어디 가셨어요?”
시현이 두리번거리자 레온이 웃음을 참으며 방을 가리켰다.
“너희 얼굴을 차마 못 보겠다면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단다.”
“네? 왜요?”
“너희 동생이 생겼거든.”
잠시 멍해졌던 시현의 입에서 다음 순간 꺄아,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정말 축하드려요!”
시현은 레온을 껴안고 한참 동안이나 팔짝팔짝 뛰었다.
“미리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그러면 꽃이라도 사 왔을 텐데요!”
전부터 장난처럼 동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설마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다니!
두 분, 특히 희선은 늘 놓쳐버린 태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픔을 떨치지 못했다. 그것도 이제는 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뻐서 눈물까지 났다.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레온이 시현의 등을 토닥였다.
“자, 시현이는 어서 엄마한테 가 보렴. 아빠는 태하랑 잠시 할 얘기가 있단다.”
시현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자 레온이 눈짓을 했다.
“태하, 잠깐 이리 와보렴.”
레온은 서재로 쓰는 방으로 태하를 데려가서, 서랍에서 빛바랜 봉투를 꺼내어 내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서툰 영어로 쓰인 짧은 편지였다.
- 우리 아들이 태어났어요. 생일은 X월 X일이에요.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어요. 괜찮다면 당신이 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는 제가 잘 키울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동봉된 갓난아기 사진을 들여다보는 태하의 입에서 뒤늦게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너를 낳고 얼마 안 돼서, 네 어머니가 내게 보낸 편지란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편지를 보게 된 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였어. 네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게 바로 이 편지 때문이었지.”
“…….”
“네 엄마는 아이를 책임지라고도, 빨리 돌아오라고도 하지 않았어. 그저 잘 키울 테니 아이 이름만 지어달라고…… 그녀가 바란 건 겨우 그것뿐이었는데, 결국 들어주지 못했던 게 여태 마음에 가시처럼 남아 있단다.”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키듯, 레온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래서, 늦게나마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데. 어떠니?”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석연치 않았다. 자신은 이미 성인이고, 여태 윤태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아쉬움은 알겠지만 이제 와서 굳이…….
레온이 손을 뻗어 자신만큼이나 키가 큰 아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을 동생에게 줄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구나.”
아들과 같은 빛깔의 눈동자에 애틋함이 가득했다. 이제는 다 커서 결혼까지 한 아들인데도, 마치 어린 자식을 보는 것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너는 언제까지나 내 소중한 첫 아이이고, 내 가장 아픈 손가락이란다.”
그제야 태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동생이 생겨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미안한 것이다.
[내가 네 아버지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태하는 자신과 몇 살 차이도 안 나 보이는 이 남자가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것이 너무나 어색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물여섯의 윤태하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잃어 스무 살이 된 지금의 그는 여전히 레온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순간 처음으로, 이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이 마음 깊이 느껴졌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진짜 내 아버지.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서 태하는 애써 말을 돌렸다.
“그래서, 제 이름은 뭔가요?”
레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온 프랜시스 케네디 주니어…… 라고 지어 보았는데. 괜찮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 이름을 준 것인지.
“예, 아버지.”
한 걸음 다가선 태하가, 머뭇거리며 아버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아들에게 안긴 아버지의 얼굴에 기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그렇고, 태하야.”
잠시 후, 레온이 포옹을 풀고 물었다.
“아버지 따라서 잠깐 미국에 좀 다녀오지 않겠니?”
*
태하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레온 외의 모두에게 숨겼던 것은, 원래 시현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는 시현이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희선은 가족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시현의 설명을 들은 희선은,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아들을 껴안고 토닥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리 아들. 얼마나 무서웠니?”
잠시 후 다이닝룸에 크리스마스 만찬이 준비되었다. 빨간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앉았다. 원래도 희선을 잘 챙기는 레온이었지만, 아이를 가지고 나니 유난이 더했다.
“당신, 입덧 심했다고 했었잖아요. 입덧 오기 전에 많이 먹어야 해요.”
레온이 어떻게든 먹이려 애를 쓰는 동안, 정작 희선은 내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있잖니, 왜 하필 그때였을까?”
“네?”
“왜 하필이면 군대 가던 그날, 그 순간으로 돌아갔는지 말이야.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시현은 식사를 하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그 생각을 못 해봤다.
레온이 대답했다.
“혹시 뭔가를 되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그 시점에 후회되는 게 있다든가 말이에요.”
그러나 태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에 태하가 나중에 그 순간을 돌아보고 뭔가를 후회했다 해도, 그걸 스무 살의 태하가 알 리 없으니까.
시현도 어느덧 생각에 잠겼다.
왜 그때였을까……?
*
희선의 임신 소식으로 인해 한층 더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그다음 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현을, 주차장에서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시현아.”
돌아보자 저만치에 어디서 본 것 같은 초로의 여인이 서 있었다.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현은,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제야 알아보고 숨을 멈췄다.
몰라보게 홀쭉해진 얼굴의 주인공은, 바로 우진의 어머니 정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