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잘못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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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잘못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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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잘못된 만남
2023.04.04.
“시현아.”
시현은 첫눈에 정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퉁퉁했는데, 그새 얼굴도 몸도 몰라보게 홀쭉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야 알아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세요? 저희 집은 또 어떻게 아셨고요?”
경계하듯 묻자 정임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내가 이렇게 빈다. 제발 우리 우진이 한 번만 용서해주렴, 응?”
그제야 시현은 정임이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우진이 낸 사고에 합의를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진이 일으킨 것은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동차를 흉기로 사용한 살인미수다. 역시나 검찰도 살인미수로 기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현은 정임에게 그 점을 일깨워주었다.
“단순 교통사고 아니고 살인미수예요. 무슨 용서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도, 합의를 받으면 형량이라도 줄여볼 수 있다잖니.”
정임은 어떻게든 시현을 설득하려 들었다.
“우진이가 너한테 해코지하려고 그랬던 게 아냐, 사과하러 갔던 거야.”
“사과요?”
“제가 다 잘못했다고, 지금이라도 너한테 빌어야겠다면서 나갔단 말이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아, 그래서 차로 밀어버렸나요? 미안해서?”
시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대번에 ‘이게 어디서’ 하면서 눈을 부라렸을 정임은, 한층 더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매달렸다.
“술도 먹었겠다, 사과를 하러 갔다가 네가 하필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눈이 확 돌아간 모양이지. 청첩장을 돌리고 파혼하는 게 벌써 두 번짼데, 우진이 놈인들 속이 속이었겠니?”
그동안 우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몰랐던 시현은 기가 막혔다.
‘그새 또 누구랑 결혼을 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물으려다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전 합의든 용서든 할 생각 없으니 돌아가세요.”
매몰차게 등을 돌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정임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너 그렇게 독한 애 아니잖니. 마음씨 하난 착했던 애가 왜 이렇게 변했어, 응?”
착한 아이. 그 말에 시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기는 소리가 났다. 시현은 몸을 돌려 정임을 바라보았다.
“네, 제가 그동안 정말 착하게 살았거든요. 어떤 때는 호구 소리 들으면서까지, 그냥 내가 좀 손해 보고, 져주고, 넘어가 주고, 그게 마음이 편했어요. 그런데.”
팔을 붙잡힌 채, 시현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한때는 그토록 무섭고 어려웠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그렇게 착하게 살았더니 돌아오는 게 겨우 아드님 같은 사람 만나는 거더라고요.”
“……!”
“그래서 저, 더 이상 착하게 안 살기로 했어요.”
시현은 힘주어 말했다.
“가서 전해주세요. 정말로 저한테 털끝이나마 미안한 생각이 있거든, 달게 죗값 받으라고요.”
말이 끝나자마자 시현은 정임의 팔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돌아섰다.
“아이고, 하느님.”
온몸에 힘이 빠진 정임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듯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변호사는 죄질이 나빠서 아무래도 실형은 피하기 힘들겠다고 했다. 그나마 피해자들과 합의하면 희망이 있다는 말에 무작정 찾아와서 매달려 본 것인데…….
귀한 막내아들이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하게 생겼다. 눈앞이 캄캄한 나머지 정임은 한참 동안 주저앉은 채 일어날 줄을 몰랐다.
“괜찮으십니까?”
잠시 후 지나가던 누군가가 묻더니 손을 뻗어 부축해 주었다. 얼굴을 쳐다봤다가 정임은 깜짝 놀랐다.
‘그놈이잖아?’
미래은행에 찾아갔을 때, 시현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던 그놈이었다.
[저 혼자 좋아한 겁니다.]
그때와 머리 색깔은 달라졌지만 틀림없다.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놈 때문에 내 아들이 감옥살이를 하게 생겼는데!
물론 태하는 사고를 당한 피해자일 뿐이었지만, 정임은 그것마저도 태하의 탓으로 돌렸다. 이놈이 아니었으면 우리 우진이가 화가 나서 차를 몰고 돌진할 일도 없었을 거 아닌가?
“…….”
정임의 눈빛에 독기가 어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하는 조심스럽게 정임을 부축해서 일으키고는 물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구급차 불러드릴까요?”
자못 걱정스러운 듯한 태도에 정임은 당황스러웠다.
‘뭐야? 날 못 알아보는 거야?’
하기야 아까 시현도 처음에는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러니 딱 한 번 본 게 전부인 사람이야 몰라볼 수도 있는 거였다.
멱살을 붙잡고 내 아들 인생 돌려내라고 외치려다, 정임은 생각을 바꿔먹었다.
‘이렇게 된 거, 이쪽에 매달려봐?’
정임은 머뭇거리며 자신을 밝혔다.
“저어기, 이제 몸은 좀 괜찮아요? 나 김우진 엄마예요.”
김우진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대번에 표정이 싹 변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태하는 그러시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당황한 정임은 다가서며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글쎄 나 김우진이 엄마라니까?”
그러자 태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정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열 개쯤 늘어났다. 어머님?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님이라고 부르며 인사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아직도 날 못 알아보나 싶어서 정임은 다시 한번 말했다.
“왜 내가 미래은행 갔을 때 만났었잖아. 기억 안 나요?”
“아…… 물론 기억합니다.”
태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늘 김우진 씨한테 신세를 지고 있는걸요.”
정임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이상한 것을 느끼고, 정임은 슬쩍 태하를 떠보았다.
“그렇죠, 그 녀석이 일 하나는 아주 열심히 하죠?”
“예. 저희 회사에서도 아드님이 제일 유능합니다.”
역시나. 정임은 확신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우진이 잘 부탁해요. 난 바빠서 이만, 호호.”
인사를 건네고 황망히 돌아서며, 정임은 입속으로 뇌까렸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야, 응?”
틀림없다. 저 녀석은 우리 우진이가 누군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기가 우진이 차에 치인 줄도 모르고 있다!
정임의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
조한신문 사주 이석환 회장의 큰딸, 이보연은 전화를 받고 친정으로 불려왔다.
“저번엔 보라가 속을 썩이더니, 이번에는 또 너냐?”
왔다고 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아버지 이 회장이 고함을 쳤다.
“대체 왜 돌아가면서 케네디 회장을 건드리지 못해 난리인 게야!”
보연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여자가 기어이!
[전에 제 남편이 친정아버님께 한번 전화를 드렸었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미국 대사관에서 모였을 때, 케네디 부인은 그렇게 말했었다.
[남편이 조만간 또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네요.]
그 말대로 된 것이었다.
“우리 광고의 30퍼센트가 잘려나갔어.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응?”
이 회장은 펄펄 뛰었다.
“진정하세요, 아빠. 제가 그이한테 잘 얘기해볼게요. 그이가 아버님께 계열사 광고 부탁드리면 어떻게든 해주실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자신은 없었다. 부탁은커녕 남편과는 며칠째 냉전 상태였다.
이것도 케네디 부인 때문이었다.
[당신 미쳤어? 어디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케네디 부인을 건드려!]
결혼생활을 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남편이 그토록 펄펄 뛰는 것은 처음 보았다.
“곧 소식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겨우 친정아버지를 달래서 진정시켜놓고 나서, 보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라는요? 방에 있어요?”
지친 기색의 어머니가 대꾸했다.
“그럼 어디 있겠니? 집 밖으론 한 발짝도 안 나가는 애가.”
보연은 2층에 있는 여동생, 보라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고 가만히 문을 열자 하얀 잠옷 차림의 여자가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웅크린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동생, 보라였다.
“보라야, 언니 왔어.”
보라가 고개를 들어 보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 만에야 텅 빈 눈동자에 반짝, 하고 전구가 켜지듯 빛이 돌아왔다.
“언니!”
보라가 달려와서 보연에게 와락 안겼다.
“잘 있었어? 밥은 잘 먹었고?”
대답 대신에 보라는 정신없이 빠르게 말했다.
“언니 알지? 강시현 그년이 먼저 내 걸 뺏은 거야. 언니는 알잖아, 그치?”
보연은 눈을 감아버렸다. 동생은 아직도 그날 그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이 되어도, 모레가 되어도 여전히 결혼식 날에 갇혀 있는 것이다.
보라는 늦둥이 막내로, 큰딸인 보연과는 띠동갑이었다. 말이 동생이지 반쯤은 딸 같은 아이였다.
“그럼, 알지. 우리 보라는 아무 잘못 없지.”
보연은 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말라빠진 등에, 새삼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 예뻤던 아이가……!’
어릴 적부터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자란 동생이다. 하필이면 제 결혼식에서 그 망신을 겪고 파혼까지 당했으니, 정신적으로 무너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연이 생각했을 때 동생은 저지른 일에 비해 너무 가혹한 벌을 받고 있었다.
잘한 것도 없지만 딱히 잘못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다. 유부남 건드린 것도 아닌데 그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렇게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로 망신을 당해야 했을까.
사실 정작 동영상 폭로는 동생의 결혼에 앙심을 품은 상대 남자가 했는데, 보라가 두고두고 원망하는 것은 그 여자였다.
“강시현이 내 남자를 빼앗았단 말이야. 혼내줘, 언니. 응?”
보라는 언니의 품에 파고들며 어린애처럼 졸랐다.
동생이 수백 번, 수천 번 호소하는 바에 의하면 그랬다. 이게 다 강시현 때문이라는 것이다. 듣다 보니 보연도 어느덧 그 남자가 아니라 시현의 탓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언니가 혼내 줄게.”
늘 하던 말이었지만, 전에는 그저 동생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
강시현이라면 케네디 부인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즉 고부에게 자매가 나란히 당한 꼴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보연은 더욱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그 두 사람에게 앙갚음을 해주고 싶어서 손끝까지 벌벌 떨렸다.
문제는 이미 케네디 부인을 건드렸다가 단단히 혼이 나고 있는 중이라는 거였다. 그 며느리까지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게다가 강시현이 어디 그냥 며느리던가.
[제 아들의 예비신부는 며느리가 아니라 제 딸입니다.]
케네디 회장은 일찍이 기자회견에서 공언한 바 있었다. 자기 아들의 생모, 즉 케네디 부인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대체 그런 여자를 무슨 수로 혼내주지?’
언니, 언니, 하면서 매달리는 보라를 겨우 달래서 떼어 놓고 보연은 친정집에서 나왔다. 집에 가서 또 남편의 냉랭한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한층 더 우울했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정원을 지나고 있는데, 저만치 대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큰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소금이 든 양재기를 들고 돌아오던 가정부가 보연을 보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유, 아가씨가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그제야 가정부는 실토했다.
“저어, 막내 아가씨한테 고소당한 그 남자 엄마예요. 선처해달라고 저렇게 자꾸 찾아오네요.”
보연은 금세 알아들었다. 동생의 결혼식을 망친 그 남자를, 부모가 동생 이름으로 고소했었다.
대문을 나서자 낡은 점퍼를 걸친 60대 여자가 문가에 혼이 달아난 듯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힐끗 쳐다보고 지나쳐 가려다, 보연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그 남자의 어머니라면, 강시현의 시어머니 될 뻔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혹시 강시현에 대해서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연이 다가가서 앞에 서자 정임이 지친 눈을 들어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 집 큰딸이에요. 이보라 언니요.”
간단히 자신을 밝히자 정임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선처해달라고 오셨다면서요?”
“예. 제 아들이 지금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아무쪼록 고소 취하만 해 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고…….”
금방이라도 치맛자락에 매달릴 기세인 정임의 말을, 보연은 중간에 잘라버렸다.
“강시현에 대해서 뭐 아시는 거 있으면 말해보세요. 약점이나, 아니면 뒤 구린 데 같은 거요.”
정임이 놀란 눈으로 보연을 올려다보았다.
“며느리로 들일 사람이었으니까 잘 알 거 아녜요. 뭐 생각나는 거 없어요?”
그러나 정임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없으면 말고요. 그럼.”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다. 보연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저만치 대기하고 있는 차 쪽으로 가려 했다.
“잠깐만요!”
정임이 허둥지둥 보연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뭐죠?”
보연이 싸늘하게 묻자 정임이 물었다.
“저어…… 시현이 말고, 혹시 걔 남편 일이라도 괜찮을까요?”
“말해보세요.”
“걔 남편이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저어기, 운전자가 실수를 해가지고 말예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나서, 정임은 목소리를 낮췄다.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