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그 여자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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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그 여자의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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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그 여자의 본색
2023.04.21.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더 실랑이할 수도 없었다. 결국 시현의 카드로 결제하고 난 후에야 매장을 나오게 되었다.
“같이 가요, 언니!”
양손에 커다란 쇼핑백을 든 유나가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들뜬 얼굴로 시현의 뒤를 졸졸 따랐다.
“고마워요, 언니. 아기가 입으면 너무 예쁠 것 같아요.”
하필 며칠 전에 시현과 희선이 들러서 쇼핑했던 매장이었다. 저 여자의 아기와 내 아기가 같은 옷을…… 북받치는 감정을 참느라 시현은 지그시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근데 아까 매장 언니가요, 언니도 며칠 전에 왔다 가셨다고 그러던데. 혹시 언니도 아기 가지셨어요?”
시현이 대꾸하지 않자 유나가 호들갑스레 손뼉을 쳤다.
“어머, 맞구나. 정말 잘됐어요, 축하드려요!”
“…….”
“제 아기는 아들이라고 했거든요. 예쁜 여동생이었음 좋겠어요.”
배 속의 아이까지 들먹이자 시현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말조심하세요. 제 아이가 왜 그 애 동생이라는 거죠?”
걸음을 멈추고 홱 돌아보며 쏘아붙이자 유나가 움찔했다.
“그리고 자꾸 언니, 언니 하는 거 불편하네요.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우리가 언니 동생 하고 지낼 사이는 아니잖아요?”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아기가 놀라요.”
유나의 까만 눈망울에 눈물이 또 글썽해졌다.
“윤 대표님은 저 같은 거 거들떠보지도 않으세요. 아무 관심도 없다고요. 언니만 사랑하고 언니만 아끼시는데 언닌 뭐가 그렇게 불안하세요?”
“불안하다니, 내가 왜……!”
“설마 저한테 뺏길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시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여태 살면서 이 정도의 분노는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다가서자 유나가 엄마야,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배를 껴안고 몸을 움츠렸다.
“잘못했어요!”
마치 시현이 배 속의 아기를 해치려고 들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이끌고 걸었다.
멀어지는 시현의 등 뒤에서 유나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
희선은 며칠째 머리를 싸매고 누워만 있었다.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최 비서가 뭐든 드셔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억지로라도 먹었겠지만, 이미 태하 때 입덧을 겪어 본 희선은 알고 있었다. 어미가 굶다시피 해도 아이는 멀쩡히 자란다는 걸.
- 당신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영문을 모르는 레온은 화상 통화에서 보이는 희선의 표정이 좋지 않으니 걱정을 했다.
[입덧이 시작됐나 봐요.]
그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당장 달려오겠지만, 이 일만은 천하의 케네디 회장이라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해결 방법이 없었다. 저렇게 배가 불러오는데 아이를 없애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고, 결국은 낳아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정말 우리 태하 아이라면 어쩌지.’
가슴은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자는 너무나 당당했다.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현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만 무너졌다. 지금쯤 그 애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똑똑, 하는 소리에 이어 방문이 열리고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또 최 비서가 식사를 재촉하러 왔구나, 하고 생각한 희선은 돌아누운 채로 힘없이 말했다.
“생각 없다니까요. 치워주세요.”
그러나 들려온 것은 최 비서가 아닌 유나의 목소리였다.
“어머님, 저예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벌떡 일어나 앉자 유나가 쟁반을 들고 들어와서는 냉큼 희선의 곁에 엉덩이를 붙였다.
쟁반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어머님도 홑몸이 아니시잖아요. 아이가 먹는 거니까 입맛이 없어도 드셔야 해요.”
가르치듯 하는 말에 희선은 기가 막혔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죠?”
“직원들이 사모님 아무것도 안 드신다고, 아이가 걱정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유나가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희선의 입가에 갖다 댔다.
“아, 해보세요. 어머님.”
숟가락을 탁 쳐내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대신에 희선은 몸을 뒤로 빼고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듣기 불편하네요.”
유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제 아이의 할머니이신걸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희선은 잠시 움찔했지만 금세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쨌든 우리 아들이 아이 아빠가 맞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잖아요.”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괴로워하는 시현을 생각하니 절로 말이 뾰족해졌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유나가 황급히 손으로 희선의 입을 가렸다.
“쉿, 어머님! 아기가 들어요.”
희선의 입을 가린 채로, 유나는 소곤거렸다.
“전 윤 대표님 말고 다른 남자 만난 적 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손자한테 미안할 일 만드시면 안 돼요, 어머님.”
*
심란하고 괴로운 와중에도 뭔가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마치 뭔가를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현은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감정의 실마리를 잡으려 노력했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시현은 겨우 그 이유를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사모님 오셨어요.]
시현을 맞이하던 매장 직원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왠지 눈가가 붉어져 있는 것도 같았다. 그때는 유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 이상 신경 쓰지 못했는데…….
확인해야겠다. 시현은 당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어제 있었던 직원이 오늘도 근무하고 있었다.
“사모님!”
시현을 본 직원은 왠지 긴장한 표정을 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어제 일에 대해서 뭐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먼저 인사를 건네고 나서 시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많이 놀라신 것 같던데,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어…….”
직원은 왠지 눈치를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있었구나. 시현은 확신했다.
“괜찮으니까 말씀해보세요. 절대 피해 가는 일 없게 할게요.”
한참을 달랜 끝에야 직원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와서 이것저것 고르시고는 무조건 사모님께서 결제하실 거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막 내드릴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곤란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물건이나 파는 주제에 건방진 년이라면서…… 몇 년이나 일했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봤어요.”
다시 생각해도 새삼 상처가 되는지, 판매 직원은 눈물을 글썽였다.
시현은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 유나는 절로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연약하고 가련한 이미지였다. 실제로 무슨 말만 하면 겁을 먹고 울먹이지 않던가.
그런 여자가 막말을 했다고?
그러나 직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모님 오시기 직전에 무릎까지 꿇으라고 하셨어요. 매장 CCTV 보시면 아실 거예요.”
울먹이는 직원을 일단 달래 놓고, 시현은 매장을 나왔다. 그 길로 희선을 모시는 최 비서를 불러서 CCTV 영상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달받은 영상에는 똑똑히 찍혀 있었다. 삿대질을 하는 유나와, 무릎을 꿇는 직원의 모습이. 마치 고함소리까지도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자신이 나타나자마자 유나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얌전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시현은 영상을 껐다.
“고맙습니다, 최 비서님. 제가 이거 봤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고요.”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서서히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태 시현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태하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태하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어서도 실수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방금 영상을 보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과연 저런 여자를 태하가 나와 착각했을까?’
아니다. 태하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지금 저 여자는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최소한 저 가련하고 마음 약한 척하는 건 연기다.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짓 모두가 연기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끝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우진이 신혼집에서 바람을 피우다 걸렸다는 건, 자신을 포함한 당사자들과 가장 가까운 몇몇 사람들 외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게 다 사기라면, 저 여자는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레온이나 희선, 혹은 미주가 그런 말을 남에게 했을 리는 만무한데…….
고민하던 시현이 갑자기 숨을 삼켰다.
‘잠깐만, 당사자라면?’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시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레온이 미국에 태하를 데려온 것은 처음부터 치료가 목적이었다. 아들의 인생이 걸릴 정도로 큰일이 아니었으면 임신한 희선을 두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아들은 백지상태에서 어떻게든 현재의 세상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음을 떼어 보려고 몸부림치는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찾아낸 방법이 이것이었다.
태하가 받은 것은 뇌에 직접 전기자극을 주어서 기억을 되살리는 치료였다.
임상시험의 성공사례가 있긴 했지만 아직은 상용화까지 가지 못하고 연구 단계에 있는 요법이다. 그래서 태하가 받은 것도 공식적으로는 치료가 아니라 임상시험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위험부담이었다. 자칫하면 오히려 단기 기억력을 손상시킬 수도 있고, 환자의 고통 역시 크다고 했다. 그래서 레온 역시 미국까지 데려와 놓고도 끝까지 망설였던 것이다.
희선과 시현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사업상 출장이라 둘러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머니하고 시현 씨가 알면,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펄쩍 뛸 겁니다.]
레온 역시 아버지로서는 역시 그만두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같은 남자로서는 태하를 이해했다. 이제 가정도 이루었으니, 어서 기억을 찾아서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기대하게 해놓고 실망시키기 싫습니다. 그러니 치료에 성공하면, 돌아가서 사실대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치료에 태하는 다행히도 잘 견뎌주었다. 시현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안 후로는 더욱더 노력했다.
밤새 두통에 시달리며 토하고 나서도 묵묵히 그다음 날 치료를 강행했다. 하루 쉬자고 권해도 듣지 않았다.
[빨리 끝내고 가서 곁에 있어 줘야죠.]
아이를 가진 아내에게 한시바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왜 모를까. 이해하면서도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레온 역시 가슴이 아팠다.
노력한 보람에 힘입어 치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억의 대부분을 찾는 데 성공하고, 치료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것까지 보고 나서 레온은 혼자 비행기에 올랐다.
[먼저 돌아가게 돼서 미안하구나.]
그가 주최하는 신년 파티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경제인들을 다 초대해놓고 하루아침에 날짜를 바꿀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파티에 호스트가 빠질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은 태하를 남겨두고 레온만 먼저 준비를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못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를, 아들은 도리어 위로하듯 꼭 끌어안았다.
[저도 금방 마치고 갈 테니 걱정 마시고 시현 씨 잘 부탁합니다, 아버지.]
한국으로 돌아온 레온은 곧바로 희선이 기다리는 빌라로 달려갔다.
“로즈!”
그는 희선을 보자마자 꼭 껴안고 정신없이 등을 어루만졌다.
“오래 곁을 비워서 미안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러나 희선은 그가 돌아왔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수심에 찬 표정에 레온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시현이는? 어디 갔어요?”
레온은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희선과 함께 맞이할 줄 알았는데 시현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때, 희선의 등 뒤에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어물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희선에게 온 신경이 다 쏠려 있어서 그저 호텔 직원이려니, 하고만 생각했는데 똑바로 보니 유니폼도 입지 않은 것이, 직원은 아니었다.
“이 아가씨는 누구죠?”
“그게…….”
희선이 차마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뵙고 싶었어요, 아버님.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멋지세요.”
“아버님?”
레온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저어, 이 애는…….”
여자가 얼굴을 붉힌 채로 부른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버님 손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