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남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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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남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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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남편이 돌아왔다
2023.04.25.
“이 애는 아버님 손자예요.”
유나가 레온을 향해 아버님 소리까지 하는 걸 보고 희선은 눈이 반쯤 뒤집혔다. 감히 우리 시현이 자리를 넘보다니!
희선은 그대로 레온을 세워둔 채 다짜고짜 유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파요, 어머님! 왜 이러세요?”
유나가 비명을 질러도 희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문을 쾅 닫은 후에야 다그치듯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원하는 게 뭐예요?
유나가 아무리 순진한 척, 마음 약한 척해도 희선의 눈에는 다 여우 짓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상대가 레온이 되니 더욱더 잘 보였다. 세상에, 다짜고짜 아버님, 아버님 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는 꼴이라니!
“유부남 아이를 굳이 낳으려고 들 때는 그쪽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녜요?”
“어머님, 저는…….”
“그놈의 어머님 소리 좀 집어치워요!”
희선이 목소리를 높이자 유나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애를 열을 낳아도 내 며느리 자리는 어림없으니 꿈도 꾸지 말아요.”
설령 진짜 태하의 아이라도 어쩔 수 없다. 악역은 내가 맡겠다고 희선은 마음먹었다.
“돈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말해요. 얼마면 되겠어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를 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느냔 말이에요!”
유나는 대번에 하얗게 질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너무하세요. 어머님도 아이 가진 몸이잖아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유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희선이 뒤를 쫓아나가자 언제 왔는지 시현이 응접실에서 레온과 뭔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채 말릴 틈도 없이 유나가 다다다 달려가서 레온과 시현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죠?”
레온이 놀란 듯이 물었다.
사냥꾼의 총을 피해 숨는 토끼처럼, 레온의 등 뒤에 숨은 유나가 애처롭게 흐느껴 울었다.
“아버님. 어머님이 저더러, 돈을 줄 테니까 아이를 지우라고……!”
잔뜩 부풀려서 일러바치는 꼴을 보고 희선은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 가진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 써요, 로즈.”
말투는 어디까지나 부드러웠지만, 희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여태 레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희선을 탓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희선을, 시현이 얼른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엄마? 들어가서 좀 누우셔야겠어요.”
시현이 희선을 부축해서 방에 들어가고 난 후, 여태 울먹이고 있는 유나를 향해 레온이 손짓을 했다.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하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순순히 소파에 앉으며 유나는 내심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가 저 정도면 도대체 아들은 어느 정도야?’
둘 다 언론을 통해서 이미 얼굴을 봤지만 실제로 보니 눈을 떼기 힘들 정도의 미남이었다.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랑 같이 살라고 해도 냉큼 오케이할 것 같다.
“얘기는 시현이한테 대강 들었어요.”
레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 그 아이가 정말 우리 아들의 아이란 말인가요?”
“네. 대표님께 물어보면 아실 거예요.”
물론 물어봐야 알 리가 없지. 당신 아들은 기억이 없으니까!
속으로 혀를 내밀며 유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 살고 있죠?”
“저어, 부모님한테 쫓겨나는 바람에…… 아는 언니 집에서 신세 지고 있어요.”
쫓겨난 것은 사실이었다. 단지 부모님 집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애 아빠인 유부남이 얻어줬던 방에서 쫓겨난 거지만.
잠시 생각한 끝에, 레온이 결단을 내리듯 말했다.
“일단 우리 호텔로 옮기도록 해요. 가까이 두는 게 내가 마음이 편하겠네요.”
*
그날부터 유나는 그랜드호텔에서 지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호화로운 스위트룸이었다.
그뿐인가. 케네디 회장은 두루 유나에게 신경을 써주었다. 아기를 가졌으니 잘 먹어야 한다면서 끼니마다 좋은 음식도 보내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백화점에 가서 뭐든 고르라고 비서를 통해서 전해주기까지 했다.
이쯤 되자 좋은 게 아니라 도리어 불안했다.
‘설마하니 정말 낳으라는 건가?’
계획은 저쪽에서 아이를 지워달라고 사정사정하면 큰돈을 받고 못 이기는 척 들어주는 거였지, 진짜로 낳는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 불안감에 시달리던 유나는, 참다못해 이 일을 사주했던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자가 책망하듯 말했지만 유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요? 이러다가 진짜 낳으라고 할 것 같단 말이에요!”
이 아이를 낳았다가는 거짓말이 바로 들킨다. 사기죄로 감옥에 가겠지.
- 블러핑하는 거예요. 자칫하면 그 큰 재산을 혼외자한테 반이나 뺏길 텐데 퍽이나.
그러나 여자는 자신 있게 말했다.
- 재벌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나 알아요? 절대 화근을 남겨둘 리가 없어요. 곧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들 테니 조금만 기다려봐요.
그러나 당사자인 유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칫 시간 끌다가 아이가 더 크면 나도 위험하다고요!
-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방법이 있죠. 실수로 유산을 한 걸로 처리하면 되잖아요? 돈이야 입막음용으로 챙겨줄 테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 누군가와 실랑이하다 그만 아이를 잃는 거죠. 예를 들면 강시현이라든가.
“아……!”
그제야 알아들은 유나의 눈이 커졌다.
- 오히려 그 편이 낫겠네요. 아이를 잃으면 남편도 이렇게 독한 여자였나, 하고 아내에게 정이 떨어지지 않겠어요?
이쯤 되자 유나도 궁금해졌다. 자신은 돈 때문이라지만,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사실 여태 유나는 상대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젠 저도 좀 알아야겠네요.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돈 때문은 아니라면서요.”
그러나 여자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목적이 뭔지는 알아야 저도 믿고 움직일 거 아녜요. 한배를 탄 사람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믿어요?”
- …….
한참만에야 여자는 입을 열었다.
- 강시현, 그 여자가 내 동생의 인생을 망쳤어요.
한 자, 한 자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였다.
- 그러니까 그 여자도 그만큼 괴로워봐야죠. 아니, 그 몇 배로 괴로워야지.
목소리에서 뼈에 사무치는 증오가 전해져 왔다. 유나조차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
일단 마음을 놓은 유나는 본격적으로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방에 머물면서 식사든 세탁이든 심부름이든, 그저 부르기만 하면 직원이 달려와서 대신해주는 편안한 생활. 태어나서 처음 누려 보는 호사였다.
직원들도 누구에게 귀띔을 받았는지 극히 공손하게 유나를 대했다.
[사모님, 방 정리해드릴까요?]
[사모님, 식사 왔습니다.]
사모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온몸이 다 짜릿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부남의 아이를 갖고, 그에게 버림받자 앞날이 막막해서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모님이라니.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연극이 오래갈 수 없다는 거였다. 진짜로 이 아이가 그 남자의 아이라면, 어떻게든 낳아서 내가 이 집안 며느리 자리를 꿰차볼 텐데!
아쉬워하다 유나는 문득 어떤 점에 생각이 미쳤다.
‘잠깐. 아이는 유산된 걸로 하고, 본격적으로 꼬셔봐?’
그깟 돈 몇 푼 받고 떨어지는 것보다야 진짜 며느리가 되는 게 훨씬 이익 아닌가.
그 부인은 몰라도, 케네디 회장은 확실히 물러터진 위인이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기야 케네디 회장도 남자 아닌가. 저처럼 예쁘고 젊은 여자가 아양을 떠는데 싫을 리 없는 게 당연했다. 그것도 떡하니 아들의 아이까지 가졌다는데.
아버지를 보니 아들에 대해서도 대강 짐작이 갔다. 얼굴도 못 본 남자를 빼앗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마구 솟아올랐다.
보아하니 부인이란 여자는 나이만 많지 별것도 없던데, 일단 자신에게 홀딱 빠지게 해놓으면 혹시 나중에 기억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을 것 아닌가?
어쨌든 아들은 돌아온 후의 일이고, 일단은 그 아버지부터 단단히 구워삶아놔야겠다.
원대한 계획을 가슴에 품고 유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객실을 나왔다. 손에는 김밥이 든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일부러 아침에 택시를 타고 나가서 사 온 것이었다.
“회장님 어디 계시죠?”
유나는 직원에게 물어서 호텔 사무동에 있는 레온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아버님!”
비서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일하고 있던 레온이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죠? 몸도 무거운 사람이.”
“헤헤. 비서님이 아버님 김밥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한번 만들어봤어요.”
도시락 뚜껑을 열자 삐뚤빼뚤하게 높낮이가 다른 김밥이 나타났다. 그야 통으로 사서 직접 썰었으니까.
“열심히 만들었는데 제가 솜씨가 별로라……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옆구리까지 몇 개 터진 김밥을 보고 레온은 진심으로 감동한 듯했다.
“이런. 정말 나 먹으라고 일부러 만든 건가요?”
그럼요, 하고 대답하고 유나는 얼른 나무젓가락을 쪼개 김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버님, 아, 해보세요.”
진저리를 치면서 피했던 희선과는 달리, 레온은 냉큼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음, 정말 맛있네요.”
감탄하던 레온이, 문득 유나의 낡은 임부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옷이 그게 뭔가요? 분명히 필요한 건 뭐든 백화점에서 가져가라고 전달하라고 했는데.”
물론 전달받았다. 당장이라도 가서 마음껏 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더욱더 큰 목표를 위해 꾹 참고 있는 중일 뿐이었다.
“전 이거면 충분해요. 어차피 밖에 나갈 일도 없는걸요.”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자 레온이 한숨을 지었다.
“쇼퍼 붙여줄 테니까 같이 쇼핑 좀 해요. 임부복하고…… 아, 파티에 입을 만한 옷도.”
순간 유나는 귀가 번쩍 띄었다. 조만간 그랜드호텔에서 무슨 커다란 파티를 한다는 얘기는, 직원을 통해서 이미 들은 바였다.
‘설마 내가 그 파티에?’
흥분을 애써 감추고 유나는 의아한 척 물었다.
“파티라니요?”
“우리 호텔에서 신년 파티를 열게 돼서. 유나 씨도 참석하면 어떨까 해서요.”
유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두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가겠어요! 그리고…… 언니가 싫어하실 거예요.”
레온은 조금 씁쓸한 얼굴을 했다.
“시현이도 슬슬 받아들여야지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유나는 얼른 입속으로 제 혀를 깨물었다.
그랜드호텔 며느리 자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좋은 소문보다도 스캔들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빠른 법이다. 그것도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 유명한 사람들이라면.
알 만한 집안들 사이에서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케네디 회장 아들에게 혼외자가 생겼다!
“세컨드가 와이프한테 언니, 언니 하더래.”
“벌써 배가 눈에 띄게 불렀다던데?”
“제발 아이는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통곡을 하더라잖아.”
그렇게 온 나라가 떠들썩하도록 시끄럽게 결혼을 하더니, 결국은 그렇게 됐구나. 속으로 고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케네디 회장 말이야. 그렇게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네 뭐네 떠들어놓고, 그 여자도 엄청 예뻐한다는데?”
“아유, 말해 뭐해. 옛말에 며느리 시앗은 열도 귀엽다잖아.”
모두의 관심이 케네디 회장 가족에게 쏠린 가운데, 신년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손꼽아 파티 날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부부 동반 파티이니 케네디 회장 부부와 그 아들 부부도 참석할 것 아닌가. 정말 소문이 진짜인지, 직접 당사자들 사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파티 당일.
그랜드호텔의 대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시현이 혼자서 참석한 것을 확인했다.
“윤 대표님은요? 왜 안 보이시죠?”
이브닝드레스 차림의 시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국에 출장을 갔거든요.”
“어머, 그러시구나.”
사람들은 속으로 확신했다. 역시나 소문이 맞았구나!
그러나 다음 순간, 시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 마침 저기 왔네요.”
놀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 입구에서 검은 양복에 보타이를 맨 남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
바로 스캔들의 당사자, 윤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