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 신년 파티 (1) (165/181)


#165. 신년 파티 (1)
2023.04.28.



 


“이 애는 아버님 손자예요.”

말이 끝나자마자 유나가 희선에게 손목을 붙잡혀 방으로 끌려들어가고, 혼자 남은 레온은 충격에 빠졌다.

이해는 가지 않고 가슴만 마구 벌렁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얼어붙은 것처럼 응접실에 멍하니 서 있는데 마침 시현이 현관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현아!”

레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니? 응? 대체 저 여자는…….”

레온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방금 유나와 희선이 들어간 방을 가리켰다.


“태하 아이를 가졌대요.”

시현은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태하도 알고 있다네요. 낳으라고 했대요, 자기 아이면 책임은 지겠다고요.”

“태하가?”

레온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애가 널 배신할 리 없다는 거 알잖니!”

한시라도 빨리 아내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도 고통스러운 치료를 버텨내고 있는 아들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배신이 아니라 저한테 차이고 괴로워서 술 마시다가 실수로 그랬대요.”

레온은 침착함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우선 시현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시현아. 사실은…….”

레온은 태하를 데리고 미국에 갔던 진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지금은 기억을 대부분 되찾은 상태란다. 그러니까 물어보면 사실을 알 수도 있을 거야.”

한동안 놀란 얼굴로 듣고 있던 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묻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치료 받고 있다면서요. 더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본인에게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니겠니?”

“확인해보나 마나예요. ……어차피 사기니까.”

이 와중에도 레온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시현이는 태하를 믿는구나. 그러면 마음고생은 덜하겠구나, 우리 딸.

시현이 레온을 새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빠, 저 부탁이 있어요.”

“뭐니?”

“저 여자한테 잘해주세요.”

레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기라는 걸 알면 당장 쫓아내고 고소해야지. 무슨 소리니?”

설령 저 여자가 진짜 태하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레온은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사기라면 굳이 왜 잘해줘야 할까.

그러나 시현은 전에 없이 고집을 부렸다.


“그냥 눈 딱 감고 잘해주세요. 무조건 감싸주시고, 편들어주시고, 신경 써주세요.”

레온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시현이 초조한 듯이 닫혀 있는 방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길게 말할 시간이 없어요. 차마 못 하시겠으면 저라고 생각하고 대해주세요.”

그제야 레온은 시현에게 뭔가 생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뭔지 몰랐지만 레온은 결심했다. 딸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까.


“그래. 한번 힘껏 노력해볼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새 하얗게 질린 유나가 눈물을 흩뿌리며 뛰쳐나왔다.


“아버님!”

시현은 본체만체하고, 달려온 유나가 레온의 등 뒤에 쏙 숨었다.


“어머님이 저더러, 돈을 줄 테니까 아이를 지우라고……!”

매달리듯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거 놓으라고 뿌리치고 싶은 것을 지독한 인내심으로 참아내고, 레온은 아내를 향해 보란 듯이 한숨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 가진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면 못 써요, 로즈.”

 

*



“네? 케네디 회장한테서 초대장이 왔다고요?”

보연은 제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그래. 뭐 이제라도 왔으니 다행이지.”

남편이 넥타이를 풀며 대꾸했다.


“이번에 파티에 가서 만나면 인사 잘 드려. 거 내조는 못할망정 훼방을 놔서 쓰겠어?”

보연은 생각에 잠겼다. 그 후에 백화점에서 한바탕 실랑이까지 했는데, 대체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초대했을까.

대답이 없자 남편이 목소리를 조금 높여 다그쳤다.


“두 번 다시 케네디 부인 눈 밖에 나지 마. 경고야, 당신.”

“…….”

“대답 안 해?”

보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남편이 이렇게 나오니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연은 생각을 바꿔먹었다.


‘차라리 잘됐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돼서.’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나타났으니 지금쯤 강시현은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기억을 잃고 반편이가 된 남편한테 확인할 수도 없으니 더욱더 속이 타겠지. 시아버지인 케네디 회장마저도 그 여자를 예뻐한다는데 심정이 오죽할까.

그렇다고 그 여자가 파티에 불참할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기 자리가 위협당하는 마당인데, 어떻게든 기를 쓰고 참석해서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겠지.

얼마나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주겠다.

보연은 그렇게 다짐했다.

*

짧은 겨울 해가 일찍 저물어갈 무렵, 그랜드호텔 앞에는 대형 세단들이 미끄러지듯 속속 도착했다. 그 안에서 슈트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내려 저마다 호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텔의 대연회장에는 낮처럼 휘황한 조명이 밝혀졌다. 실내장식은 물론 준비된 음식과 샴페인, 실내에 연주되는 음악까지도 하나하나 고급스러웠다.

참석자들 역시 웬만한 파티에는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케네디 회장이구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온 케네디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희선이라고 합니다.”

파티의 주최자인 케네디 회장 부부가 나란히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은 그 아들 부부였다.

과연 세컨드가 생겼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남편인 윤태하는 어디 갔는지, 아내인 강시현 혼자만 시부모의 곁에서 함께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남편은 어디 간 거야?’

모두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연회장에 등장했다.

원피스처럼 단순한 디자인의 하얀 드레스에, 작은 생화로 장식해서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머리가 그지없이 청초해 보이는 여자였다. 마치 천사나 요정처럼도 보였다. 볼록하게 부른 배만 뺀다면.


“언니!”

시현을 향해 반갑게 외치며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붙잡고 달려오는 여자를 보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구나.’

여자의 미모에 감탄하는 사람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하고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들 본처인 시현이 밀린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정확히 유나가 노린 대로였다.

오늘의 파티를 위해 유나는 그야말로 백화점을 이 잡듯이 뒤졌다. 입어본 옷, 착용해본 액세서리만 수십 개였다. 그래 놓고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결국은 유명 디자이너에게 직접 의뢰해서 맞춘 드레스였다.

그뿐인가. 몸이 무겁다는 핑계로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호텔에 출장까지 시켰다.

즉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 꾸밈새였다. 물론 그 비용은 모두 케네디 회장이 결제했다.

멀리서부터 강아지처럼 달려온 유나가 눈을 반짝이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언니. 어쩜 그렇게 드레스가 잘 어울리세요? 저는 배가 나오는 바람에 뭘 입어도 도저히 태가 안 나서 대충 입었는데요.”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받고도 시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으로 바라볼 뿐.

공교롭게도 시현이 입은 이브닝드레스는 온통 검정색이었다. 옷마저도 완전히 대비되는 두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쏟아졌다.

물론 아무도 입 밖에 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묻기 전에는.


“어머나, 동생이신가 봐요?”

바로 보연이었다.

파티에 오기 전에 남편은 미리 경고했다. 두 번 다시 케네디 부인 눈 밖에 나지 말라고. 즉 시현에게 시비를 걸면 안 되는 입장이었지만, 보연은 지금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유는 시현의 목걸이에 있었다.


[그건 모조품이에요. 진짜는 제 금고 안에 있거든요.]

시현은 그때 보연에게 망신을 안겨준 바로 그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목걸이가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날 때마다 그날의 치욕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싸움을 걸었다, 이거지?’

저쪽이 먼저 도발해 오는데 자존심 강한 보연이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보연의 질문에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싹 조용해졌다. 보연은 눈치 없는 척, 악의 없는 척하며 한층 더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설마 사실은 아니죠, 그렇죠? 진짜 동생분이신 거죠?”

남편이 곁에 있었더라면 말렸겠지만, 마침 보연의 남편은 저만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참석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보다 못해 나선 것은 희선과 친하게 지내는 백합회의 고양이 사모님들이었다.


“어머나, 이 여사! 오랜만이에요.”

“우리 저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할까요?”

고양이 사모님들이 양쪽 팔을 붙들고 강제로 데려가려 했지만, 보연은 힘주어 뿌리치고 끈질기게 물었다.


“윤 대표님은요? 왜 안 보이시죠?”

시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국에 출장을 갔거든요.”

“어머, 그러시구나!”

보연은 호들갑스레 손뼉을 쳤다.


“난 또 괜히 오해할 뻔했네요. 그냥 출장 가신 건데.”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확신했다. 역시나 소문이 맞았구나!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시현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 마침 저기 왔네요.”

놀란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저만치 입구에서 검은 양복에 보타이를 맨 남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

바로 스캔들의 당사자, 윤태하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조명이라도 비추고 있는 것처럼, 연회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그를 주목했다. 스캔들 때문이라기보다, 워낙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는 존재감이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걸음을 멈춘 윤태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디어 아내를 발견한 순간.

너무 완벽해서 오만하게까지 보였던 남자의 눈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여태 침착하고 담담하기만 했던 여자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기쁨이 어렸다.

남편과 아내는 거리를 두고 선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시선에, 보고 있던 사람들조차도 마치 이 넓은 연회장에 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누구도 감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놀랍게도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있었다.


“대표님!”

바로 유나였다.

태하의 앞을 가로막은 유나가 하얀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저 와 있다고 얘기는 들으셨죠? 엄청 기다렸는데…….”

그러나 태하는 마치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사람처럼 유나를 그대로 지나쳐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아내에게로 향했다.

시현의 손을 꼭 잡는 태하를 보고, 그의 등 뒤에 남겨진 유나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왜…… 그러세요? 설마 이제 와서 저 모른 척하시는 거예요?”

물론 계획된 연기였다.

윤태하가 자신을 알 리 없다. 그에 비해 이쪽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시나리오를 다 짜두었다.

하다못해 처음 만났던 바가 어디인지, 무슨 술을 마셨는지, 그날 밤 어디에 묵었는지까지 다 완벽하게 짜여 있었다. CCTV쯤이야 처리한 지 오래였다.

기억이 없는 남자가 이 완벽한 시나리오에 반박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금세 궁지에 몰리게 되어 있었다.

즉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아이 아버지가 윤태하라는 것을 확실히 못 박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쪽으로 돌아선 태하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아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당신을.”

완벽한 입술에서 유나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

멍해진 유나를 향해, 태하는 쉬지도 않고 줄줄이 말했다.


“결혼 전에 술에 취한 나와 하룻밤을 함께했고, 그래서 아이가 생겼고. 나한테 말했더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낳으라고 했지요.”

한쪽 팔로 아내의 어깨를 단단히 껴안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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