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당신의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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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당신의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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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당신의 아이니까
2023.05.09.
잠시 밖에 나갔던 희선이 돌아오자 마침 청소하던 룸메이드 두 명이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오셨어요.”
응접실에 아까까지도 없었던 거대한 선물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희선은 물었다.
“수고가 많으세요. 근데 저건 뭔가요?”
“약소하지만 저희 룸메이드들이 각자 준비한 거예요.”
희선은 상자의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어보았다. 사람이 들어가도 될 만한 커다란 상자 안에 갖은 아기용품이 꽉 차 있는 걸 보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세상에,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결혼식 때 축의금도 안 받으셨잖아요. 오히려 저희가 회장님께 금일봉까지 받고요.”
“사모님은 이보다 훨씬 좋은 거 쓰실 텐데, 너무 소소한 것들이라 죄송해요.”
“아녜요, 정말 예뻐요. 감사히 잘 쓸게요.”
아기 내복에 우주복, 모빌, 양말, 신발에 헝겊책, 딸랑이까지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직접 손바느질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속싸개와 겉싸개도 보였다. 비싸고 화려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품목이 겹치지 않게 정성 들여 준비한 티가 났다.
“사모님께서 결혼식에 초대해주셨던 게 저희한테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저희는 용역회사 소속 파견이잖아요. 일하면서도 늘 기를 못 펴고 지내다, 처음으로 그랜드호텔 가족으로 대접받은 기분이었어요.”
“회장님 결혼식에 참석했다니까 주위에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두 사람에게서 진심이 전해져 왔다.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조만간 호텔이 다른 용역회사와 계약하게 되면, 이 사람들도 더는 여기서 일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분들께도 잘 받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까지 근무하시는 거죠?”
룸메이드들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그들은 금세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아마 3월 정도가 될 것 같아요.”
“그동안 사모님께 너무 감사했어요. 일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희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임원 회의에 출석한 레온은 나오는 하품을 겨우 참고 있었다.
아, 지겨워.
요즘 그는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출근도 하지 않고 희선의 곁에만 꼭 붙어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희선을 돌봐주는 일이 가장 행복했다. 볼록하지도 않은 배를 마사지해주고, 아직은 날씬하기만 한 다리를 주물러주고, 영양제를 챙겨 먹이고, 산부인과에도 함께 다녔다.
하도 딱 달라붙어 있으니 오히려 희선이 넌더리를 낼 정도였다.
[유난 좀 그만 떨어요, 애 처음 낳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는 전혀 유난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태하 때 곁에서 보살펴주지 못한 한을 이제야 풀고 있는 중이었다.
지루한 회의가 겨우 끝나자마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끝났죠? 그럼 난 이만.”
당장 희선이 있는 빌라로 달려갈 셈이었는데, 장 비서가 앞을 가로막았다.
“회장님, 아직 보고가 한 건 남았습니다.”
“음? 또 뭐죠?”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다른 임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나자 장 비서도 나가 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넓은 회의실에 혼자 남은 레온은, 잠시 후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로즈?”
검정색 비즈니스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희선이 이쪽을 향해서 허리를 숙여 보였다.
“룸 어텐던트(*룸메이드)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제안입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가운데 화면에 발표 자료가 떠오르고, 희선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랜드호텔은 작년에 경영 주체가 바뀌면서부터 세계화, 고급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인건비 절감보다는 서비스 품질 향상에 초점을 두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객실 청소 업무를 담당하는 룸 어텐던트 전원이 용역회사 소속의 비정규직이며…….”
발표를 이어가는 희선을, 레온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바라보았다.
회사원이 아니다 보니 늘 보던 발표와는 어딘가 달랐다. 아무래도 서툰 점이 눈에 띄었지만,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태도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이제야 레온은 희선이 한동안 노트북 앞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조만간 그랜드호텔과 계약한 용역회사가 바뀐다는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전부터 룸메이드들에게 마음을 쓰던 여자니까,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겠지.
알 수 없는 것은 왜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선택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랜드호텔 룸메이드들, 직접고용으로 전환해줘요.’
그렇게 부탁, 아니 명령 한마디만 하면 그대로 따랐을 텐데.
듣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남편인 레온 하나뿐인데, 희선의 태도는 마치 생판 남의 앞에서 이야기하듯 진지했다.
“게다가 이번에 그랜드호텔과 계약한 용역회사가 바뀌면 인원도 모두 교체되는데, 그렇게 되면 일시적으로라도 서비스 품질 저하를 피하기 힘듭니다.”
긴장해서 약간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희선은 남편을 상대로 부탁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랜드호텔 회장을 상대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설령 거절당하더라도.
그렇다면 이쪽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그만해도 돼요. 당신 말대로 뭐든지 다 할게요.’
당장 꼭 껴안고 뺨을 부비며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레온은 애써 경영자의 얼굴을 했다.
“그랜드호텔은 상장회사예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사측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자칫 주주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이야기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희선은 자신 있게 말하며 다음 화면으로 넘겨 그래프를 설명했다.
“이것은 뉴 오스틴에 있는 해외 호텔의 사례입니다. 서양에는 팁 문화가 정착돼 있어서 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 회사는 파격적으로 룸 어텐던트 포함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했고, 당해 연도에는 순손실을 기록했지만 다음 해부터는 흑자로 전환해서 지금까지 쭉 유지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시설의 개선이 없었으므로, 서비스 품질 향상에 힘입은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 화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가두행진을 하고 있는 사진이 나타났다.
“20**년에 뉴 오스틴에 있는 주요 호텔 20여 개의 직원들이 단체로 파업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비정규직의 건강보험을 보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뉴 오스틴 지역에 대형 국제 박람회가 열리는 바람에 많은 호텔들이 손님을 받지 못하거나 서비스 품질 저하로 큰 손해를 보았는데, 해당 호텔만은 직원들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덕분에 정상적으로 영업할 수 있어서 반사이익을 본 사례가 있습니다. 모두 정규직이니 건강보험 이슈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레온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호텔을 운영하다 보면 여러 가지 긴축을 요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는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게 큰 리스크가 될 텐데, 어떻게 생각하죠?”
희선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는 직원들에게도 고통 분담을 호소해야겠죠. 사측이 진심으로 직원들을 대한다면, 직원들도 동참해줄 겁니다.”
진지하게 듣고 있는 레온을 향해, 희선은 호소하듯 말했다.
“꼭 하루아침에 내몰릴 룸메이드들이 안됐으니까 직접 고용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랜드호텔의 이익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중간에서 용역회사가 15퍼센트나 가져갑니다. 그 몫을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언제 잘릴까 불안하지 않게 해주면 그만큼 더 열심히, 진심을 다해 일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회사에 무슨 애정을 갖고 일할 수 있을까요?”
발표가 끝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어요.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라 생각해요. 내가 임원회의 소집해서 제안해볼게요.”
희선의 얼굴이 밝아졌다. 레온은 제안해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호텔의 지배구조상 임원회의든 주주총회든 그저 형식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가 결정하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레온이 이리 와요, 하고 손짓했다. 다가가자 레온이 그녀를 번쩍 안아서 무릎에 앉혔다.
“이 자리엔 나보다도 당신이 앉아야겠네요.”
경영자가 아닌 남편의 목소리에, 희선은 긴장을 풀고 웃었다.
“회장님 말고 룸메이드라면 할 수 있는데요.”
“농담 아닌데. 당신은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선은 조금 놀라서 레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편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생각 있거든 진짜로 경영에 참여해봐요. 내가 도와줄게요.”
“네? 내가 뭘 안다고…….”
“배우면 되죠. 대학교 가서 경영학 공부하면서, 실무는 호텔에서 해봐요.”
사실 이 발표를 준비하는 동안 희선은 무척 즐거웠다. 물론 어렵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막연히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이도 있는 데다 아기까지 가졌으니 그 이상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레온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구체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무렵만 해도 희선은 일해서 대학 등록금을 모으고 있었다. 현실에 부딪쳐 접어야만 했던 꿈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백합회 사모님들과 처음 인사할 때, 명함이 없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그때의 민망함이 여태 생생했다.
공부하고 싶다. 내 일이 갖고 싶다. 희선의 마음에 새로운 욕망이 생겨났다.
“하지만…… 아기는 어쩌고요?”
레온은 잘라 말했다.
“낳아만 주면 키우는 건 내가 할게요.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해요.”
가슴이 뛰었다. 희선은 확인하듯 물었다.
“나 정말 공부해도 되는 거예요? 대학 가도 돼요?”
“뭐든지 해요.”
레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일단 아기부터 낳고, 건강해지고 나면.”
*
“아들인지 딸인지는 언제쯤 알 수 있을까?”
아직은 티도 안 나는 시현의 배를 살짝 어루만져 보며 태하가 궁금해했다.
“아직 멀었어. 최소한 12주는 되어야 한대. 정확히는 16주 넘어야 하고.”
말이 나온 김에 시현은 물었다.
“있잖아, 넌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태하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어느 쪽이든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
“아니 왜? 이왕이면 너 닮아야 좋지.”
시현은 자신의 외모에 별로 불만이 없었다. 남편도 늘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하고 말해주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미모가 뛰어난 건 단연 태하 쪽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기는 태하를 닮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나 닮으면, 혹시 나처럼 힘들어질까 봐.”
그제야 태하의 말뜻을 알아듣고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태하는 혼혈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던 그 순간에도 태하는 혼혈이라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야, 외국인! 너네 나라에 가서 살아!]
크면서 점점 익숙해지긴 했지만, 어릴 때는 어딜 가나 쏟아지는 시선 때문에 태하가 힘들어했던 것을 누구보다 시현이 잘 알고 있었다.
[우리 태하가 예쁘고 잘생겨서 그래.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달래준 적이 수도 없었다.
그러니 태하가 자식이 같은 일을 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정작 시현은 레온과 태하를 늘 보다 보니 다른 외모에 너무 익숙해져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굴 닮았든, 속은 아빠처럼 강한 아이일 거야.”
시현은 힘주어 남편의 손을 잡았다.
“결국 넌 다 이겨냈잖아. 우리가 곁에서 사랑해주면, 우리 아기도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럴까?”
“그럼. 윤태하 아이인걸.”
태하의 눈동자에서 불안함이 서서히 걷혔다.
“…….”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두 사람은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빨리 아기를 만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