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외전 2] 늦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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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외전 2] 늦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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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화. [외전 2] 늦어서 미안해요
2023.05.23.
중앙일간지 민국일보에 때아닌 희소식이 날아 들어온 것은 1월 말, 연초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고 난 후의 일이었다.
다름 아닌 케네디 회장 부부가 직접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해온 것이었다.
다 큰 아들이 있는데도 사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겨우 결혼한 부부다. 대체 무슨 사연인지, 거짓말 조금 보태 전 국민이 궁금해하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정작 결혼식 때도 직접 취재한 언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부이기도 했다. 하다못해 케네디 부인의 사진 한 장 나돈 적이 없었다.
그런 마당에 갑자기 부부가 함께 인터뷰를 하겠다고 먼저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민국일보 입장에서는 갑자기 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 조금 특이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저를 지명했단 말입니까?]
[그래. 딱 집어서 서현우 기자 보내달라고 했다니까?]
잔뜩 들떠서 대답한 부장이 금세 비장한 얼굴을 했다.
[서 기자,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야 해! 저번에 케네디 회장 결혼식 때 취재해 오겠다고 큰소리치고는 빈손으로 돌아온 거, 이번에 만회해야 한다고. 알았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현우는 그랜드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 있던 비서가 호텔 본관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자리한 독채 빌라로 안내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넓고 호화로운 프레지덴셜 빌라의 응접실에서, 현우는 케네디 부부와 마주 앉게 되었다.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보기는 했지만 직접 인사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우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국일보 서현우입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케네디 회장의 대답에 이어, 부인이 말했다.
“우리 처음 아닌 걸로 아는데. 결혼식 때도 왔었잖아요?”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는 부인인데, 말 속에는 가시가 들어 있어서 현우는 내심 놀랐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부디 순산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덕담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왠지 현우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결혼식 기사는 왜 안 냈죠? 분명히 실으라고 사진까지 보내준 걸로 아는데.”
케네디 회장의 질문에 현우는 무릎을 모으고 공손히 대답했다.
“정당한 방법으로 취재한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을 썼기에?”
부끄러웠지만 현우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결혼식을 취재하려고 우리 딸 친구한테 일부러 접근했다 이거예요?”
얘기를 들은 부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 뒤늦게 기자로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사는 쓰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두 분께도 깊이 사과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현우를, 케네디 부인은 흰자 가득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사과는 우리가 아니라 미주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현우는 우물쭈물 거리다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갔다가…… 두들겨 맞고 쫓겨났습니다.”
물론 맞은 것도 아프긴 했지만, 정작 아픈 것은 몸보다도 마음이었다.
[현우 씨!]
약속 시간에 아무리 늦어도 활짝 웃으며 반겨주던 여자가.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땐,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가 느껴져서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는 영영 만나주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라 정말로 다시는 안 볼 생각인 것 같았다.
“꼭 사과하고 싶은데, 미주 씨는 제 얼굴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돌려야 할지 앞이 막막합니다.”
인터뷰를 하러 와서는, 저도 모르게 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서현우 기자님은 우리 미주를 어떻게 생각하지요?”
케네디 회장이 물었다. 현우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기자 생활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미주 씨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밝고, 씩씩하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진심이고…….”
그 여자는 자신을 위해 결혼식 취재까지 성사시켜주었다.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저한테는 아까운 사람이란 거, 알고 있지만…….”
말하다 말고 갑자기 목이 콱 메는 바람에 현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 현우의 머리 위에, 케네디 부인의 냉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요. 인터뷰 기사인지, 미주인지.”
“예?”
“인터뷰 포기하면 미주하고 얘기하도록 자리 마련해줄게요. 인터뷰를 하고 싶으면, 미주는 못 만나는 거고.”
곁에서 케네디 회장이 당황한 듯이 제지하려 들었다.
“잠깐만요, 로즈. 여기까지 불러 놓고 무슨…….”
“끼어들지 말아줄래요?”
부인이 목소리를 약간 높이자마자 케네디 회장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원하는 걸 얻으려면 감수하는 것도 있어야죠. 그래, 어느 쪽을 고를 건가요?”
현우는 생각했다.
이미 케네디 회장 부부 인터뷰를 자신이 맡는다는 걸 온 회사가 다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결혼식 기사를 펑크 내는 바람에 윗선에까지 불려가서 크게 질책을 당했었는데,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만회할 기회였다.
‘뭐? 거기까지 갔다가 인터뷰를 못 따고 왔다고?’
펄펄 뛰는 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떠오르는 것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덕분에 기자님처럼 멋진 분하고 데이트도 해보고, 즐거웠는데요.]
마지막까지 활짝 웃던 미주의 표정이었다.
“미주 씨하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 얼굴을 떠올린 순간, 현우는 저도 모르게 매달리듯 바싹 다가앉았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케네디 부인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미주는 우리가 무척 아끼는 아이예요. 두 번 실수하지 말아요.”
*
주말 저녁. 그랜드호텔 프렌치레스토랑의 테이블에, 미주는 혼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워낙 로맨틱한 분위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보니 주위는 온통 커플, 커플, 커플들뿐이었다. 하다못해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건 오로지 미주 하나뿐.
나온 식사는 와인까지 페어링된 고급 코스였지만,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보니 음식 맛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휴대폰 들여다보며 밥 먹을 분위기도 아니라서 더더욱 어색했다.
‘괜히 공짜라고 덥석 물었나 보다.’
속으로 후회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가, 미주는 문득 숨을 삼켰다. 마침 레스토랑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바로 지난주에 이 호텔 카페에서 선을 봤던 남자였다.
“현수 씨?”
저도 모르게 놀라서 말하자마자 상대가 낭패한 표정을 했다.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미주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하기야 이런 레스토랑에 혼자서 올 리가 없는 건데.
“오빠 아는 사람이야?”
맞선남의 옆에 있던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저기, 거래처 사람.”
맞선남이 당황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걸 보고 미주는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뭐야, 여자친구 몰래 결혼정보회사 등록했던 거였어?’
어쨌든 눈치도 없이 알은체를 해버린 자신의 실수였다. 미주는 얼른 웃으며 말했다.
“김 과장님 데이트하러 오셨나 봐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 예. 미주 씨도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끝났나, 생각했는데 하필 맞선남 커플은 미주와 가까운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테이블 사이의 간격은 충분했지만, 자꾸만 여자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음식이 어디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 싶어서 미주는 전화를 받는 척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하필 여기서 마주칠 건 뭐람.’
한숨을 내쉬며 조금 이따가 들어가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까 그 여자가 안에서 나오는 바람에 미주는 흠칫 놀랐다.
“안녕하세요, 저 김현수 씨 여자친구예요.”
지금 나 따라 나온 거야?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미주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오빠가 거래처 분이라고 하던데 무슨 회사예요?”
미주는 말문이 막혔다. 잠깐, 저 남자가 과장이라고 했던 건 기억나는데, 직장이 어디라고 했더라……?
잠시 둘러댈 말을 찾고 있자 여자는 건수라도 잡은 듯이 다그쳤다.
“왜 대답을 못 하시는데요? 뭐 숨기는 거라도 있으세요?”
의심이 가득한 말투에 미주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왜 거짓말을 해주고 있지?’
저 남자에게 지킬 의리도 없지만, 이 여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맞아요, 저 거래처 사람 아니에요.”
“그럼 뭔데요?”
“가서 댁의 ‘오빠’한테 물어보세요. 어디서 만났는지.”
생긋 웃어 보이고 미주는 도로 레스토랑 안으로 향했다.
빨리 먹고 가자는 생각에 식사 속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냥, 어쩌다 알게 된 사람이라니까.”
“그러니까 어쩌다 알게 된 건지 얘기를 똑바로 하라고!”
맞선남이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니 여자친구가 기어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미주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러게 인생 떳떳하게 살 것이지.
둘이 지지고 볶든 말든 제 알 바는 아니다. 느긋하게 와인을 즐기고 있는데, 그예 불똥이 여기까지 튀었다.
“저기요. 잠깐 얘기 좀 하죠?”
여자친구가 화난 얼굴로 또다시 미주를 향해 다가왔다.
“무슨 얘기요?”
“오빠가 대답을 안 해서 그쪽한테라도 들어야겠는데요. 대체 둘이 무슨 사이예요?”
마치 불륜녀라도 추궁하는 것 같은 말투에 미주는 기가 찼다. 그냥 아까 제대로 얘기해줄걸, 내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왜 말을 못 해요? 뭐 찔리는 거 있어요?”
제지하러 온 웨이터를 뿌리치고, 여자는 대들다시피 물었다.
‘미주 씨!’
여자의 등 뒤에서, 맞선남이 필사적으로 눈짓을 했다. 제발 좀 살려 달라는 듯한 눈짓에 한층 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왜?
미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좋은 인연이라고,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났어요. 담당은 최** 매니저니까 회사에 전화해서 확인해 보시면 되겠어요.”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친김에 매니저의 명함까지 꺼내서 건네며, 미주는 픽 웃었다.
“너무 전전긍긍하지 마세요. 남자친구분, 뺏고 싶을 정도 아니니까.”
“뭐, 뭐라고요?”
“말 그대로예요. 그럼 오징어지킴이 활동 수고요.”
순간 주위에서 풋,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테이블들에서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굴이 시뻘게진 커플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좀 조용히 식사를 즐길 수 있으려나 했는데 오산이었다. 아까보다 더 싸우는 소리가 커졌다.
“무료로 가입시켜 준다기에 호기심으로 등록해본 거고, 저 여자랑은 그냥 차 한잔 마신 게 다야. 글쎄 애프터도 안 했다니까?”
“그걸 나더러 믿으란 말이야?”
“여자가 얼마나 인기가 없으면 돈 주고 선을 보겠어? 봐, 지금도 혼자 앉아서 밥 먹고 있잖아!”
미주는 목덜미부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저기서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가서 소리치고 화를 내야 하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야 하나?
그러나 다 생각뿐, 정작 할 수 있는 것은 우두커니 앉아서 기계적으로 포크를 입에 가져가는 것밖에 없었다.
이미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꽃다발이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현우 씨?”
슈트를 차려입은 현우를 보고, 미주는 제 눈을 의심했다.
원래도 잘생긴 남자가, 제대로 차려입으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자연히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쏟아지는 시선 가운데서 현우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지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아무리 친구가 부탁해도 그런 자리에 대신 나가주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미주는 깨달았다. 현우가 이 소동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조용히 귓가가 뜨거워졌다.
“이유야 어쨌든, 나 두고 또 다른 남자 만나면 화낼 거예요.”
옆 테이블의 맞선남을 슬쩍 쳐다보고, 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좀 괜찮은 사람을 만나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