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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외전 6] 예뻐지고 싶어 (1) (176/181)


#176. [외전 6] 예뻐지고 싶어 (1)
2023.06.06.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자 여태 차마 못 하고 있던 말이 흘러나왔다.


“제니퍼, 많이 좋아했어요?”

아직도 잠이 덜 깬 레온이 졸린 눈을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응? 누구요?”

“제니퍼 말이에요. 당신 대학 시절에 만났던 여자친구.”

그제야 잠이 확 달아났는지, 레온이 눈을 번쩍 떴다.


“아, 제니퍼!”

튕기듯 몸을 일으켜 앉은 레온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당신이 제니퍼를 어떻게 알았죠?”

“매리언 선생님이 말해줬어요. 당신하고 웨스트 엘리자베스 대학 동문이었는데, 예쁜 여자친구가 있는 걸로 아주 유명했다고…….”

“이런.”

레온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세상이 좁다더니, 그 얘기가 당신 귀까지……!”

당혹스러운 목소리였다. 마치 숨기고 있던 과거를 들켜버린 사람처럼.


“다 지난 일이니까 더 캐묻지 않을게요.”

역시나 사실이었구나. 희선은 울고 싶어지는 것을 꾹 참고 물었다.


“그래도 그거 하나만 말해줘요. 나만큼 좋아했던 건 아니죠?”

어쨌든 지금 그의 아내는 나고, 남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그냥 ‘옛날에 잠깐 데이트했던 거예요. 물론 당신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딱 그렇게만 말해주면 묻어두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왠지 레온은 그 쉬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게…… 저어…….”

그런 레온을 보고 희선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나보다 더 좋아했어요?”

결국 레온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예요.”

“네?”

희선은 눈을 깜빡거렸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레온이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화장하고 여자 옷 입은 모습이 제니퍼예요.”

“……!”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철렁했다. 희선이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빼자 레온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취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는 침대에 앉은 채 희선의 두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대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어요. 난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바람에 미술 전공은 못 했지만, 그래도 그림은 계속 그렸으니까.”

“그래서요?”

“그중 한 친구가 나한테 작품의 모델이 돼달라기에 별생각 없이 오케이 했는데, 알고 보니 여장을 해달라지 뭐예요. 테마가 중성적인 아름다움이라나.”

꽤나 분했던 모양이다. 벌써 이십 년도 넘은 얘기를 하는 레온의 얼굴에 새삼 분개가 어렸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와 있는데 도망갈 수도 없고…… 어쩌겠어요. 결국은 화장하고 드레스까지 입었죠.”

희선은 당시의 레온을 떠올렸다. 그 예쁜 얼굴에 화장이라니, 대충 결과물도 상상이 갔다.


“웬만한 여자보다 더 예뻤겠네요.”

“친구 녀석이 낄낄거리면서 그러더군요. 술집 같은 데서 만났으면 분명히 데이트 신청했을 거라고.”

레온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한 대 때려주고 나니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혹시 이거면 귀찮게 구는 여자들도 좀 정리가 되지 않을까?”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희선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아……!”

“사진을 찍어다가 떡하니 기숙사 침대 머리맡에도 갖다 놓고, 지갑에도 갖고 다니면서 보는 사람한테마다 자랑했어요. 내 여자친구, 제니퍼라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희선은 허탈함에 빠졌다.


“그러니까, 만났던 여자가 없단 말이에요……?”

레온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꾸했다.


“당연하지. 내가 당신을 두고 대체 누구를 만났겠어요?”

희선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여자를 가지고 며칠 동안이나 혼자 속앓이를 하고, 원망하고, 울고……!

이쪽은 창피해 죽을 지경인데 정작 레온은 기쁜 얼굴을 했다.


“당신, 그래서 요 며칠 나한테 화나 있었던 거예요?”

“……몰라요.”

도망가려는 희선을 꼭 껴안고 레온이 뺨을 비비며 속삭였다.


“기뻐요. 당신이 나한테 질투해줘서.”

“…….”

“나 혼자만 좋아하고, 나 혼자만 질투하는 게 아니어서.”

그 말에 희선은 아무 죄도 없이 해고 통보를 당한 영어 선생을 떠올렸다.


“있잖아요. 매리언 선생님, 정말 자를 거 아니죠?”

다행히 레온도 욱해서 한 소리지 진심은 아니었나 보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줘요. 당신을 로즈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서 나뿐이라고.”

“좋아요.”

손가락을 걸고 약속하고 나서 희선은 물었다.


“그럼 나도, 나만 부를 수 있는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도 돼요?”

“물론. 뭐라고 불러줄 건가요?”

기대에 차서 묻는 레온의 귓가에, 희선이 속삭였다.


“……제니퍼.”

“제발, 로즈!”

금세 울상이 되는 남편을 바라보며, 희선은 며칠 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어느 날 미래은행 개발팀에 경사스러운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미주가 남자친구인 현우와 1년 반 정도 열애 끝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이었다.

결혼식장은 다름 아닌 그랜드호텔. 레온이 미주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었다.


“거기 꽃장식 최소한으로 해도 수천만 원은 한댔는데.”

미주의 말에 시현은 흥, 하고 코끝으로 웃었다.


“아빠가 꽤나 최소한으로 하시겠다. 미주 씨 결혼식이니까 작정하고 꾸며주실걸?”

“그러니까 말이야!”

미주가 새삼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거 진짜 덥석 받아도 되나 몰라. 너무 염치없잖아.”

“부담 갖지 마. 다 해줄 만해서 해주시는 거니까.”

점쟁이의 말이 미주와 공모한 사기라는 게 들키고 난 후에도 레온은 여태 아침저녁으로 희선에게 키스를 받고 있었다.

한번은 그 직후에 방에서 나오는 레온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시현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행복한 얼굴을 할 수도 있구나!

그러니까 레온이 미주를 예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결혼 준비는 잘돼가?”

“응, 대충 정리되고 이제 다음 달에 웨딩촬영 정도만 남았어.”

그렇게 대답한 미주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나 오늘 반차 냈어. 오후에 병원 가야 해.”

“왜, 어디 안 좋아?”

“그게 아니고, 웨딩 촬영 전에 필러 맞으려고.”

살짝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린 미주가 제 뺨을 만지며 말했다.


“다이어트를 너무 빡세게 하는 바람에 볼살까지 쪽 빠져서 큰일이지 뭐야. 우리 나이에 볼살 없으면 얼마나 나이 들어 보이는데. 주사로 양 볼에 살짝만 넣으면 감쪽같이 어려 보인대.”

“그래?”

어려 보인다는 말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귀가 번쩍 띄었다. 연하남과 사는 여자의 숙명이랄까.


“왜, 시현 씨도 관심 있어? 같이 가 볼래?”

“아, 아냐. 태하가 그런 거 싫어해.”

딱히 저 생긴 것에 불만은 없었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보니 가끔 그런 생각은 들었다. 왜 나는 이렇게 밋밋하게 생겼지? 같이 사는 남자가 워낙 입체적으로 생겨먹어서 더 그랬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지나가는 말로 ‘코나 높여 볼까?’ 한 적이 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태하는 보기 드물게 정색을 했다.


[예쁜 얼굴에 왜 손을 대?]

절대 안 하겠다고 기어이 시현에게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겨우 표정을 푼 적이 있었다.


“에이, 칼 대는 것도 아니고 살짝 주사 맞는 건데 어때.”

혼자 가기 싫었는지, 미주는 살살 꼬드겼다.


“남자들 워낙 둔하잖아. 시술은 티가 안 나서 봐도 절대 몰라. 그냥 오늘따라 예쁘네, 하고 말지.”

귀가 솔깃했지만 시현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됐어, 태하 속이기 싫어. 미주 씨나 가서 예쁘게 하고 와.”

그쯤에서 대화를 접었는데, 문제는 오후에 터졌다.

점심식사를 하러 사무실을 나왔는데, 휴게실 앞을 지나다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들려왔다.


“근데 강시현 과장님 말이야. 관리 너무 안 하더라.”

“무슨 관리 타령이야. 일하랴, 어린애 키우랴, 애 엄마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 애 낳고도 여전히 날씬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아니, 그래도 남편이 일곱 살이나 어린데 노력은 좀 해야지. 그렇게 안 꾸미고 다니다가 자칫 바람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걱정을 할 걸 해. 본부장님 우리 회사 계실 때 얼마나 목숨 걸고 강시현 과장님 쫓아다녔는지 벌써 잊어버렸어?”

“어머, 남자 마음 모르는 거야. 맘 변하는 거 한순간이라고!”

시현은 돌아서며 한숨을 지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쯤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듣고 나니 기분이 처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물론 태하가 딴마음을 먹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노력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내가 너무 신경을 안 썼나?’

시현은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 보여서 가슴이 철렁했다.


‘태하는 이런 거 없는데.’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태준이가 돌을 앞둔 지금도 그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이고, 자신은 삼십 대 중반이었으니까.

시현은 결심하고, 마침 복도를 지나는 미주를 붙잡았다.


“미주 씨, 나도 같이 가자.”

 

*

얼떨결에 미주를 따라 성형외과에 간 시현은 상담 끝에 난생 처음 눈 밑과 콧대에 필러 시술이라는 것을 받았다.

끝나고 나서 두근거리며 거울을 봤지만 솔직히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조차 잘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지나면 자리 잡아서 예뻐질 거예요.]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티도 안 나는 거 괜히 했나, 싶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티가 안 나면 태하도 모를 테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주사만 맞고 회사로 돌아왔는데, 오후 늦게 팀 막내가 시현을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 왜?”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요.”

무슨 소린가, 하고 거울을 봤다가 시현은 기겁을 했다. 어느새 눈 밑이 다크 서클이 드리운 것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지 않은가.

남들 눈에는 아직 다크 서클처럼 보이지만 틀림없이 멍이 드는 거였다. 더 심해지기 전에 시현은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일찍 퇴근했다.

돌아오는 동안에도 상태는 시시각각 안 좋아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양쪽 눈이 판다처럼 변해 있었다.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얼굴에 손대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어?’

잔뜩 굳어진 태하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쪽은 그나마 멍이 연하게 들었다는 거였다. 생각 끝에 시현은 한쪽 눈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고, 나머지 한쪽은 안대로 가렸다.


‘안 하던 짓은 왜 해 가지고.’

멍든 눈을 화장으로 가리고 있자니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 태하는 부모님 댁에 맡겨 놓았던 태준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뭐야?”

시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태하가 놀라 물었다.


“응, 한쪽 눈에 다래끼가 나서.”

“아프지는 않고?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갔다 왔어, 걱정 마.”

걱정하는 태하를 안심시키고, 시현은 태준이를 받아 안았다.


“엄마, 엄마!”

시현의 얼굴을 보고 태준이는 오히려 좋아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후크 선장 같아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프겠다. 얼른 저녁 먹고 푹 쉬어.”

저녁 내내 태하는 시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그때마다 시현은 조마조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저녁 식사를 넘기고, 태준이도 일찌감치 푹 잠이 들었다. 태준이를 아기방에 재워놓고 나서 부부도 침실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잘 자.”

시현은 냉큼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제발 빨리 잠들어라, 하고 속으로 비는데 태하는 그녀를 꼭 안고 안타까운 듯이 속삭였다.


“당신 요즘 많이 피곤했나 봐. 회사 다니랴, 태준이 보랴.”

“…….”

“어디 좀 봐. 많이 심한가.”

태하가 안대에 손을 뻗는 바람에 시현은 기겁을 해서 얼른 피했다.


“하지 마, 괜히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다래끼는 옮는 거 아니야. 옮아도 상관없고.”

“보기 흉하단 말이야.”

“그래도 보고 싶어.”

결국 실랑이 끝에 시현은 안대를 빼앗기고 말았다.


“……!”

멍든 시현의 눈을 본 태하가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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