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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외전 7] 예뻐지고 싶어 (2) (177/181)


#177. [외전 7] 예뻐지고 싶어 (2)
2023.06.09.



 


“……!”

멍든 시현의 눈을 본 태하가 숨을 삼켰다.

충격에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던 태하가, 한참만에야 물었다.


“어쩌다가…… 어쩌다 이랬어?”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멍든 부위에 손끝을 대려다 멈칫하고는 결국 뺨만 쓰다듬고 말았다.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이 역력히 전해졌다.

태하가 그럴수록 시현은 더욱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었어. 더는 묻지 마.”

차마 사실대로 말하기가 창피해서 한 말인데, 태하는 잘못 해석한 모양이었다.


“설마 누구한테 맞은 거야?”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눈매가 한껏 날카로워졌다.


“말해. 누가 이랬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누구든 멱살을 잡을 것 같은 분위기에, 시현은 황급히 부정했다.


“아냐! 때리긴 누가 때려, 애들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뭐야!”

절대 그냥 넘어가주지 않을 기세였다. 하기야 시현이라도 태하가 어느 날 갑자기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왔다면 이유를 알아내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였다.


“그게…….”

결국 시현은 실토하고 말았다.


“눈 밑에 주사를 맞아서 그래. 살짝 멍이 들 수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주사? 무슨 주사?”

“저어, 눈 밑 꺼진 거 채워주는 주사.”

그렇게 말해도 태하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성형외과에서 맞는 거 있어.”

성형외과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알아들었는지, 태하의 눈이 커졌다.


“왜 갑자기 그런 걸 했어?”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나더러 젊은 남편이랑 살면서 너무 관리 안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그만…….”

말하는 도중에 시현은 깨달았다. 결국 남의 말 따위는 핑계에 불과하다는걸.


“……예뻐지고 싶었어.”

시현의 입에서 진심이 흘러나왔다.


“너는 아직 스물여덟 살밖에 안 됐는데, 나는 벌써 서른다섯이잖아. 태준이 낳고 나니까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출산 후 호박즙도 마시고 운동도 꾸준히 하면서 노력한 덕분에 몸무게는 얼마 안 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이를 낳기 전과 같은 몸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태준이는 아빠를 닮아서 워낙 큰 아기였다. 4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아기를 품었던 몸이 어떻게 예전과 같을까.

정작 태하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그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언젠가부터 시현은 태하 앞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그래서 밤에 단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도 꼭 불을 꺼달라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수줍음 탈 거야, 내 아기도 낳았는데.]

태하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지만, 사실은 수줍어서가 아니라 변한 몸을 보이기가 부끄러워서였다.

남편은 여전히 젊고 멋진데, 자신만 하루하루 변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사 맞았던 거야. 감쪽같이 어려 보인다고 해서.”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시울이 왈칵 뜨거워지는데, 돌아온 대답은 어디까지나 부드러웠다.


“그랬구나.”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다친 게 아니어서.”

“화 안 내?”

시현은 태하의 눈치를 보았다.


“저번에 나더러 절대 얼굴에 손대지 말라고 했었잖아. 내가 약속 어기고 몰래 시술받고 왔는데 화 안 나?”

태하가 손가락으로 시현의 볼을 콕 하고 찔렀다.


“내가 왜 화를 내, 이렇게 예쁜데.”

놀리는 것 같아서 시현은 울컥했다.


“예쁘긴 뭐가 예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는데.”

제 눈으로 봐도 한숨이 나오는 몰골이었다. 아무리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도 이걸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러나 태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왜 예쁘지 않겠어, 나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한 건데.”

태하는 두 손으로 시현의 뺨을 감싸고, 멍든 눈가를 엄지로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얼굴에다 주사 맞는 건데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겠어. 그런데도 나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꾹 참은 거 아냐.”

“…….”

“너무 예뻐. 기쁘고.”

사실 시현은 아까부터 창피한 나머지 울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눈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울기까지 하면 참으로 가관이겠다 싶어서.

그러나 이쯤 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시현은 태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

들썩이는 아내의 등을, 어린 남편은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래도 두 번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더 예뻐하고 사랑할 테니까.”

 

*

부모를 둘 가진 거나 마찬가지인 은하와 태준이는, 두 배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특히 육아를 맡은 레온의 역할이 컸다. 희선도 대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느라 거의 도와줄 수가 없었는데도, 그는 사람 하나 쓰지 않고 혼자서 두 아이를 돌보았다.

아들 부부가 사람을 좀 쓰지 그러시냐고 걱정하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태하를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한 게 내 평생 한이었단다. 이제 둘이나 키울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는데 왜 남의 손을 빌리겠니?]

아이들이 만으로 세 살이 되었을 때, 시현은 미래은행을 그만두고 태하의 회사인 유니온TA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하고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태하가 몇 년을 두고 끈질기게 조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태하의 회사는 미래은행에 비해 재택근무 제도가 잘되어 있다는 점이 컸다.

그때부터는 시현이 직접 태준이를 키우게 됐지만, 여전히 레온은 자주 낮 동안 태준이를 데려가서 돌보았다.

어차피 공부에 집중하는 희선 때문에 은하를 돌봐야 하기도 했고, 또 워낙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탓에 두 아이가 울고불고 서로를 찾기 때문이었다.

혈연관계로는 엄연히 고모와 조카였지만, 사실상 두 아이는 남매처럼 자랐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고 울다가도 금세 또 죽이 맞아서 같이 노는, 말하자면 쌍둥이 남매 같은 사이였다.

그렇게 레온은 손수 아이들 식단을 챙기고 한글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치면서 두 아이를 키워냈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아이들 양육 때문에 레온의 공백이 생긴 만큼 희선이 회사 경영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어느 해에 있었던 그랜드호텔 노조의 파업 때문이었다. 당시 마침 서울에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기 직전이었는데, 노조가 총파업을 예고하며 호텔 경영에 큰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그때 노조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룸메이드들의 요구로 희선이 회사 측을 대표하여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노조원들의 희선에 대한 믿음에 힘입어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고, 그랜드호텔은 무사히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러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에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은하는 겉으로는 희선을 꼭 닮았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대담하고 화통했고, 태준이는 엄마를 닮아 밝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빠를 닮아 섬세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나 닮아서, 혹시 나처럼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태준이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태하는 그렇게 걱정했었다. 그러나 정작 낳고 보니 태준이는 혼혈이라기보다도 그냥 순수하게 외국인 같은 외모였다. 4분의 1 혼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태하가 어릴 때에 비해서는 세상이 많이 변해서 놀림을 당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태준이도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꾸만 사람들이 영어로 말을 거는 거였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그랬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자기 아이를 부추기는 엄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서 영어로 말 걸어봐.]

영어유치원에서 배운 영어를 원어민(?) 아이 상대로 시험해보고 싶은 거였다.


[엄마, 난 한국 사람인데 왜 자꾸 영어로 말 걸어?]

처음에는 그렇게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태준이도, 하도 그런 일을 당하니 어느덧 익숙해져서 이제는 태연하게 대꾸하기에 이르렀다.


[나 영어 모르니까 한국말로 말해줄래?]

사실 레온이 아기 때부터 꾸준히 가르친 덕분에 자연스럽게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데도, 시치미를 뚝 떼는 아들을 보고 태하와 시현은 웃음을 꾹 참았다.

육아의 재미에 푹 빠진 레온 때문에 두 아이는 무려 여섯 살 때까지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야 처음으로 기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1년 정도는 아이들끼리의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간 레온은 꾸준한 기부 활동으로 더욱더 유명해져 있었다. 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케네디 부자를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두 부모는 상의 끝에 어느 집안 아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평범한 아이들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다행히 시현과 희선은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등하원시키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두 아이가 흔치 않은 관계라 자칫하면 들킬 위험이 있었다. 동갑내기 두 아이가 고모와 조카 사이인 경우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시현과 태하는 유치원에 가기 전에 태준이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태준아, 유치원에서는 고모한테 그냥 은하라고 불러야 해.]

[왜?]

[시크릿 미션 같은 거야. 은하가 태준이 고모라는 걸 들키지 않는 게 목적이지.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도 아기 때부터 왜 은하는 은하가 아니고 고모냐고 꾸준히 의문을 제기해왔던 태준이다. 드디어 고모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된 태준이는 신이 났다.


[응, 나 할 수 있어!]

다행히 두 아이들은 금세 유치원 생활에 적응했다. 한동안은 아침에 눈 뜨면 유치원 가방부터 찾을 정도로 신이 나서 다니더니, 어느 날부터 태준이가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엄마, 지아가 갑자기 나한테 막 화내.”

유치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자아이가 하루아침에 쌀쌀맞아졌다는 거였다.


“왜? 둘이 싸웠어?”

“몰라, 그냥 내가 싫은가 봐. 나는 지아 좋은데.”

며칠을 두고 보아도 나아지지 않아서, 안 되겠다고 생각한 시현은 어느 날 하원 시간에 지아 엄마의 허락을 얻어 지아와 직접 얘기를 나누었다.


“지아야. 요즘 태준이하고 왜 사이가 안 좋아?”

눈높이를 맞추고 묻자 지아가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태준이 싫어요.”

“왜? 태준이가 지아한테 뭐 잘못했어?

“아니요.”

“그럼 왜?”

지아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결국 지아 엄마까지 옆에서 한참 달래고 부추긴 끝에야 겨우 지아는 입을 열었다.


“태준이는 은하랑 결혼할 거잖아!”

응?

두 엄마가 멍해진 가운데, 지아가 울음을 터뜨렸다.


“공주님 옷 입고 와도 태준이는 은하랑만 놀고……! 나도 태준이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그런 거였구나. 어긋난 사랑의 작대기에, 시현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걱정 마, 지아야. 은하는 절대, 절대 절대로 태준이하고 결혼 안 해. 아줌마가 약속할게.”

“왜요?”

지아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시현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런 게 있어.”

 

*

그날 저녁, 퇴근해서 돌아온 태하를 붙잡고 시현은 배꼽을 잡았다.


“요즘 애들 진짜 빠르지 않아? 이제 겨우 일곱 살인데!”

그런 시현을 등 뒤에서 껴안고, 태하가 귓가에 속삭였다.


“일곱 살이 어때서. 나도 아홉 살 때 당신에게 반했는걸.”

“뭐야, 징그럽게.”

눈을 흘기자 태하가 시현을 껴안은 채로 마구 간지럽혔다.


“이래도? 이래도 징그러워?”

“아하하하! 그만! 주름 생긴단 말이야!”

여전히 사이좋은 두 사람이었다.


 

*

어느 따뜻한 주말 오후, 희선은 모처럼 친하게 지내는 고양이 사모님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장소는 가장 연장자인 고 여사의 집. 재벌가답게 화려하고 넓은 저택이었다.


“고맙습니다.”

찻잔에 차를 채워주는 가정부를 향해 인사를 건네다 희선은 문득 흠칫했다.

상대의 얼굴이 무척 낯이 익었던 것이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날 듯, 날 듯 나지 않았다.

잠시 후 가정부가 주방으로 물러가고 난 후에야 희선은 뒤늦게 소스라쳤다.


“아!”

……바로 화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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