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외전 8] 아현과 시현 (1)
(178/181)
178. [외전 8] 아현과 시현 (1)
(178/181)
#178. [외전 8] 아현과 시현 (1)
2023.06.13.
친한 언니인 고 여사의 집에 놀러갔다가 가정부로 일하는 화란을 보게 된 희선은 좀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틀림없어.’
비록 옛날 일이긴 하지만 수년을 한집에 살았던 사람이다. 게다가 시현이 태하와 결혼하기 직전에도 몇 번이나 만났는데 몰라볼 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우리 은하 갖기 전이니까…….’
희선은 속으로 손을 꼽아 보았다. 은하가 이제 일곱 살이니까 대충 만으로 7년 정도 만에 보는 셈이었다.
처음에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화란이 무척이나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면, 지금은 원래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다.
게다가 집에서도 늘 머리를 곱게 손질하고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하고 있던 사모님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들에게 차를 따르고 있으니 대번에 알아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희선은 화란과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화란의 딸인 아현은 호텔 배전실 열쇠를 훔쳐 정전을 시키고, 태하의 객실에 숨어들었었다.
[희선 씨, 아니 사모님!]
그랜드호텔에서 아현을 고소했을 때, 화란은 희선을 찾아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에요. 내가 못나서, 자식한테 그렇게밖에 못 가르쳤어요.]
한때는 하녀처럼 부리던 자신을 향해 손까지 모아 싹싹 빌었다.
[희선 씨한테 했던 짓도 내가 다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아현이만 용서해 줘요.]
물론 희선은 아현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현은 소송 끝에 벌금형을 받았었다.
형사재판으로 전과가 생겼으면 됐다고 생각해서 따로 민사소송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돈을 받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던 데다, 당시에는 자식들의 결혼, 그리고 자신의 결혼이라는 겹경사를 앞두고 있어서 그 이상 송사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금이라고 해도 겨우 몇백만 원이었을 텐데.’
부잣집 사모님이 왜 십 년도 안 된 사이에 저렇게까지 몰락해 있는 걸까.
희선은 화란의 남편인 재호를 마지막으로 봤던 일도 떠올렸다. 그는 시현의 부모님 무덤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결국 제 핏줄이라곤 하늘 아래 시현이밖에 없는 거였는데……!]
그때 희선은 생각했었다. 혹시 아현이 재호의 친딸이 아닌 건가, 하고.
‘설마 했는데…… 진짜 그런 거였을까?’
희선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정 여사는 대학원 어쩌기로 했어?”
“남편은 자꾸 가라고 하는데…… 생각 중이에요.”
희선은 어느덧 대학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여튼 우리 회장님, 외조 한번 눈물겨우셔라.”
“그러게 말이야. 정 여사 공부시킨다고 그간 회장님이 애 보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어?”
“우리 정 여사는 전생에 뭘 구했는지 원.”
고양이 사모님들은 입을 모아 희선을 놀려댔다.
“그나저나 그 여잔 어떻게 됐지? 그 조한신문 첫째 딸 말이야.”
“결국 이혼 당했잖아. 조한신문도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헐값에 매각하는 바람에 친정도 개털이고…… 자매가 못돼먹게 굴다가 신세 망치고 집안까지 망했지 뭐.”
그러나 무슨 말을 해도 도저히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희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응접실을 나온 희선은 슬쩍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다른 가정부들은 자리를 비웠는지, 넓은 주방에는 화란 혼자뿐이었다.
나물을 다듬고 있는 화란을 가까이서 보니 희끗해진 머리가 눈에 띄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에 그만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희선에게, 화란이 담담하게 물었다.
“사모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화란에게 사모님이라 불린 희선은 말문이 막혔다. 상대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는데.
“…….”
어쩔 줄 몰라 하는 희선을 향해, 화란이 고개를 숙였다.
“저 이 일자리 절실해요. 부디 저희 사모님한텐 말씀 말아주세요.”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집으로 돌아온 희선은 고민 끝에 고 여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그래, 정 여사. 집에는 잘 들어갔어?
반갑게 전화를 받는 고 여사에게, 희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언니. 댁에서 일하시는 도우미 있잖아요.
- 누구?
“낮에 차 내오셨던 분 말이에요.”
- 아, 청송댁?
희선은 화란의 고향이 청송이었던 것을 떠올렸다.
- 청송댁이 왜? 정 여사한테 뭐 실수라도 했어?
“아녜요. 아무래도 예전에 알던 사람 같아서, 혹시 뭐 아시는 거 있나 해서요.”
고 여사가 대답했다.
- 딸이랑 손자랑 셋이 산다고 하더라고.
희선은 놀라서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손자요?”
- 응. 딸은 미혼모인지 이혼녀인지 뭔지 모르겠고, 청송댁 남편은 일찍 사별했다고 그랬고. 하여튼 셋이 살고 있대.
아현이 싱글맘이 되었다니. 놀란 희선에게, 고 여사가 이어서 말했다.
- 근데 아이가 좀 아픈가 봐.
“네? 어디가요?”
- 정확히는 모르겠고, 딸은 아이 치료 다니느라 제대로 일을 못 해서 청송댁이 벌어 먹이는 모양이야. 딸은 저녁에 엄마한테 애 맡기고 잠깐씩 알바 해서 보태는 정도고. 청송댁도 젊을 땐 잘 살았다던데…… 처지가 안됐어서 가끔 우리 손자들 옷도 물려주고 그러고 있어.
한참 말을 잃고 있는 희선에게, 고 여사가 물었다.
- 그나저나 정 여사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희선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냥 예전에 좀 알던 사람이에요. 그분한텐 제가 물어봤단 말씀 말아 주세요, 언니.”
*
어느 날 시현은 작은아버지에게서 연락을 받고 회사 근처에서 만났다. 결혼식 때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약 7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레온을 통해서 가끔 소식은 듣고 있었다. 원래 대기업 제품의 하청 생산을 하던 공장에 불과했던 아성식품은, 지금은 자체 상품 위주로 생산하며 옛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성장해 있었다.
레온의 도움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한 것이 성공한 덕분이었다. 특히 만두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했다.
[시현아. 내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로 너한테……!]
비록 성장 과정에서는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마지막에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나서는 오랜 미움도 털어버릴 수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서 안부를 묻는 시현의 목소리는 비교적 가벼웠다.
“그래, 너도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구나.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인사를 나눈 후, 작은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목적을 밝혔다.
“사실은 너를 내 상속자로 지정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단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시현은 당황했다.
“내 핏줄이라고는 하늘 아래 너 하나뿐이야. 네 작은어머니와는 진작 이혼했고, 그 애하고는 소송을 통해서 호적 정리도 다 됐으니까, 법적으로도 내 상속자는 너뿐 아니겠니.”
작은아버지는 아현의 이름조차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아현이가 친딸이 아니었구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돈 필요하지 않아요. 이제 작은아버지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좀 편히 쉬시면서 실컷 쓰세요. 사회에 환원하시는 것도 좋고요.”
작은아버지는 벌써 칠순이 훌쩍 넘어 있었다. 원래부터 작은어머니인 화란과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날 정도로 나이가 많았으니까.
“그러지 말고 받아 주렴. 그렇지 않으면 내가 평생 고생한 보람이라곤 없지 않니.”
작은아버지는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비록 다정한 남편도, 자상한 아버지도 아니었지만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다.
그런 사람이 처도 자식도 잃었으니, 조카인 자신에게라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갈 듯도 했다.
“네가 받아 줘야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을 것 같구나.”
재산을 주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사정을 하는 판국이었다.
아내에게 배신당해서 수십 년을 속아 살았던 작은아버지를, 시현은 인간적으로 불쌍히 여겼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생각 끝에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일단 받아서 작은아버지 사후에 어디다 기부를 하든지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현은 문득 이 재산의 원래 주인이었을 사촌동생을 떠올렸다.
아현이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물론 그걸 작은아버지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
주말 저녁, 레온과 희선의 집에 가족이 모두 모여서 식사를 했다. 두 아이를 챙겨 먹이랴, 일주일간 쌓였던 이야기를 하랴, 늘 그렇듯 정신없이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엄마, 엄마, 은하가 자꾸 내 감자 먹어요!”
“태준이, 집에서는 고모라고 하기로 했지?”
시끌벅적한 가운데 유독 희선만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내내 말이 없었다.
역시나 식사가 끝난 후 희선이 슬쩍 시현을 향해 눈짓을 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선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무슨 일 있으세요?”
“놀라지 마. 사실은…….”
희선은 고 여사의 집에서 화란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정말요? 진짜로 작은어머니가 남의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듣고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시현은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착잡한 표정을 하는 희선에게, 시현은 며칠 전 작은아버지를 만났던 일을 털어놓았다.
“역시 아현이가 작은아버지 친딸이 아니었나 봐요. 소송을 통해서 호적 정리까지 다 끝내신 모양이에요. 물론 작은어머니랑은 이혼하셨고요.”
“왜 안 그렇겠니. 그분 입장에선 평생을 속아 산 셈인데.”
한숨을 짓고, 희선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아현이가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야.”
시현이 아현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태하가 쓰는 호텔 객실에서 아현이 우진과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한 날 아침이었다.
그 후 아현이 어떻게 되었는지 시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는 거라곤 며칠 전에 작은아버지에게 들었던 사실뿐이었다. 소송을 통해서 작은아버지의 친자가 아니게 됐다는 것.
“결혼은 언제 했대요? 남편은요? 이혼한 거래요?”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듣지 못해서 모르겠고.”
희선이 대답했다.
“아이가 어디가 안 좋은가 봐. 그래서 치료비 대느라 생활이 무척 어려운 모양이야. 모녀가 밤낮으로 번갈아 일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나 보더라.”
시현의 기억 속 아현은 늘 도도하고 건방지고 화려한 부잣집 아가씨였다. 어려서 함께 자랄 때부터, 나이를 먹어서까지도 늘 그랬다.
아이 엄마가 된 아현. 하루하루 어렵게 사는 아현.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시현은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아줌마!”
전단지 뭉치가 담긴 카트를 끌고 아파트에서 나오던 아현은 그만 경비에게 덜미를 붙들렸다.
“거 남의 아파트에 자꾸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면 어떡해요? 주민들한테 계속 항의 들어온다고 내가 도대체 몇 번을 말을 해요? 진짜로 경찰을 불러야 되겠어요?”
경찰이라는 말에 간이 콩알만 해졌다. 지난번에 걸렸을 때도 주거침입죄 운운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신고하는 시늉까지 하기에 팔을 붙잡고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정말, 진짜로 다시는 안 올게요.”
“저번에도, 그 전에도 똑같이 말했잖아요. 거 젊은 아줌마가 이렇게 말이 안 통해서야 원!”
평소 입주민들에게 갑질을 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경비는 아현을 향해 삿대질까지 해댔다.
다행히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경비는 아현을 놓아 주었다.
“다음번에 또 오면 그땐 진짜 경찰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아현은 서둘러 아파트를 나왔다.
전단지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집 근처 식당에서 두 시간씩 설거지를 한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잠깐씩만 일할 수 있는 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지각을 했다가는 자칫 잘릴 위험이 있었다.
아현의 아들인 은호는 올해 일곱 살로, 언어발달지연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운동능력도 또래보다 현저히 떨어져서 감각통합치료도 함께 받고 있다.
다행히 자폐나 지적능력 저하 등을 동반하지 않은 단순 언어지연이라 치료만 제대로 받으면 좋아질 수 있었지만, 문제는 비싼 치료비였다.
여기저기 아이를 데리고 치료를 다니느라 아현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화란이 벌어오는 돈만으로는 치료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은 이렇게 저녁마다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뛰어야 했지만, 점점 나아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없던 힘도 절로 솟아났다.
‘어떻게든 우리 은호 멀쩡하게 키워낼 거야.’
그것만이 아현의 삶의 목표이자 살아가는 보람이었다.
힘을 내서 카트를 끌고 뛰다시피 아파트를 나오던 아현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만 아파트 앞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에 카트를 부딪치고 말았다.
“……!”
검정색 차 옆쪽에 하얗게 금이 생긴 것을 보고 아현은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원래는 누구 부럽지 않은 부잣집 아가씨였던 아현이다. 요즘 길에서 질리도록 보이는 흔한 종류의 외제차와는 다른, 진짜 고급 차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대체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까. 우리 은호 치료 몇 번, 아니 몇십 번은 더 받게 할 수 있는 금액일 텐데……!
막막한 심정에 눈물이 나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염치없지만 제발 한번만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차마 상대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하고, 아현은 허리를 숙여 사정했다.
신고 있는 구두를 보니 젊은 여자 같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줄도 몰랐다. 여기저기 고개 조아리며 사는 게 하루 이틀인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아현은 뭐든 할 수 있었다.
한참만에야 상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가세요.”
그야말로 지옥에서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어렵게 살게 된 후로 아현이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잘 사는 사람이라고 다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 팍팍하게 구는 사람도 많다는 것.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선뜻 용서를 해 주다니……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나서, 그 자리를 벗어난 후에야 아현은 뒤늦게 생각했다.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은데…….’
그러나 돌아보자 이미 자동차는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