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외전 10] 잃어버린 것
(180/181)
180화. [외전 10] 잃어버린 것
(180/181)
#180화. [외전 10] 잃어버린 것
2023.06.20.
“아이고, 무릎이야…….”
시장에 다녀온 정임은 앓는 소리를 하며 썰렁한 집 안에 들어섰다. 바로 내일이 설날인데도 집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며느리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남편과 아들들,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집안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뛰어놀던 손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머님, 와서 간 좀 봐 주세요.]
[엄마, 밥 언제 돼? 배고파 죽겠어!]
[할머니, 좀비 떼가 나타났어! 도망가야 돼!]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거짓말처럼 하나씩 사라져 버렸다.
본격적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막내아들인 우진이 한영그룹과 조한신문 사이의 혼사를 망쳐놓았을 때부터였다.
한영그룹에서 상가 주인에게 압력을 넣는 바람에 정임의 남편은 20년 넘게 해왔던 안경점을 닫고 말았다.
한영그룹 계열사인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일하던 둘째 아들도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그 때문에 홧김에 술독에 빠졌고, 그러다 아내와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둘째 며느리가 없어지고 나서부터는 집안 대소사를 큰며느리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사실 그때부터라도 정임이 눈치껏 굴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정임은 며느리들을 부려먹는 게 몸에 밴 사람이었다.
아직 식을 올리기도 전이었던 시현에게는 물론이고, 부잣집 외동딸인 아현에게까지 그랬으니 그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 없었다.
[대체 개털 된 집구석 시집살이를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해?]
결국은 고부갈등 끝에 큰아들 부부까지 이혼을 하고 말았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막내아들인 우진이 두 번에 걸친 파혼 끝에 사고를 쳐서 살인미수로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들어가고, 그 충격에 남편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누워 있다 1년도 못 가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자가로 살아온 이 집조차도, 우진의 변호사비와 남편의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진작 팔아버리고 지금은 월세로 계속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먼저 이혼한 둘째네 쌍둥이는 며느리가 데려가 버렸고, 뒤이어 이혼한 큰아들은 엄마 때문에 이혼당했다고 정임을 원망하며 집에는 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손자손녀 합쳐 넷이나 되는데 한 명도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째인지 몰랐다.
결국 남편도 자식도 손자도 다 잃어버린 꼴이었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엄마. 내 소주는? 사 왔어?”
방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온 우진이 퀭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원래 8년 형을 선고받았던 우진은 6년 만인 지난해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리고 벌써 1년 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 방에 틀어박혀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그런 막내아들을, 정임은 그래도 어떻게든 관대하게 감싸 안으려 애를 썼다.
‘저라고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되었겠어? 나가서 일을 구하고 싶어도 전과자라 쉽지 않겠지.’
얼마나 속이 상하면 저럴까. 그래서 작작 마시라고 타박은 할지언정 소주도 순순히 사다주고, 속 망칠까 안주도 꼬박꼬박 만들어 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한심한 놈아, 네가 지금 술타령이나 할 때야?”
정임은 여태 쌓여 왔던 울화통을 터뜨렸다.
“눈이 있으면 집안 꼬라지를 좀 봐! 네놈 때문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형들 줄줄이 이혼하고! 집까지 남한테 넘어갔는데!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열심히 살 생각은 못 하고 주야장천 술이나 처먹고 자빠졌고! 네가 사람이야? 응? 그래도 네가 사람이냐고, 이놈아!”
제 엄마가 고함을 바락바락 질러대는데도 우진은 그저 심드렁했다. 마치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이 정임이 장 봐온 바구니를 뒤적이다 투덜거렸다.
“에이 씨, 소주 없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술을 사러 나가는 우진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정임은 말 그대로 뒷골이 당겨서 소파에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을꼬. 너무 기가 막혀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데, 마침 집 전화기가 울렸다.
- 엄마, 나야.
둘째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래도 치를 떨며 아예 연락을 끊어버린 큰아들과는 달리, 둘째 아들은 가끔씩 연락은 하고 있었다.
“오, 그래 형진아. 내일 설인데 집에 오는 거지?”
반갑게 묻는 정임에게, 둘째 아들은 단호히 말했다.
- 안 가. 우진이 새끼 꼴 보기 싫어.
동생 때문에 직장도 잃고 이혼까지 한 셈이니 꼴 보기 싫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번 설에도 저 웬수바가지하고 단둘뿐이구나. 정임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래서, 내일 못 온다고 전화한 거야?”
- 그것도 그건데.
둘째아들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 있잖아, 엄마. 내가 어제 제수씨 될 뻔했던 여잘 본 것 같아.
그 말에 정임이 떠올린 것은 시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불행은 우진이 시현과 파혼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시현과 결혼만 했더라면 우진이 남의 결혼식에 훼방을 놓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두 아들이 차례로 이혼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진이 감옥살이를 할 일도 없었을 거고, 남편도 멀쩡히 살아있을 거 아닌가.
반대로 시현이 시집간 집안은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텔이랑 백화점 주가가 열 배가 올랐다나, 스무 배가 올랐다나? 사업도 잘되고 좋은 일도 많이 한다고, 기사가 하도 자주 나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뿐인가, 시어머니까지 늦둥이를 떡하니 낳았다지 않나.
시현이 그것이 복덩어리였구나. 이제야 정임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어떻든? 이젠 부잣집 사모님이 다 됐겠지?”
- 아니, 그 여자 말고. 그 뒤에 결혼할 뻔했던 여자 있잖아. 그 여자 사촌동생.
그제야 정임은 아들이 말하는 것이 아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견례 때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혼 준비 과정에서 작은아들은 잠깐 아현을 마주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 이사하는 집에 에어컨 이전설치 하러 갔는데 그 여자 집이지 뭐야. 그쪽은 날 못 알아보는 거 같던데.
작은아들은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서 지금은 에어컨 기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살고 있데?”
- 단칸방에서 엄마랑 살다가 방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 가더라고. 그래 봐야 똑같이 반지하지만.
“세상에, 반지하? 단칸방?”
정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백화점에서 몇 시간 만에 1억도 아무렇지 않게 탕진하던 모녀가 어쩌다 그 꼴이 됐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말해보라고! 진짜 엄마가 바람피워서 나 낳았냐고!]
[아, 아현아…….]
[뻐꾸기 새끼 들여서 30년 가까이 키워 준 것도 치가 떨려. 내일 아침에 내가 돌아왔을 때까지 그대로 있으면 강제로 끌려나갈 줄 알아.]
그때 정임은 그 난리를 직접 목격했었으니까.
“모녀가 맨몸으로 쫓겨났나 보네. 암, 그래도 싸지.”
간만에 웃음이 나왔다. 망할 여편네, 돈 좀 있다고 그렇게 잘난 척 사람을 부려먹어 대더니! 아주 동치미 한 사발 들이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근데 그 집에 애가 있더라고.
“응? 무슨 애?”
- 남자아인데, 그 여자 아들이래. 일곱 살이고.
“뭐?”
정임은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
파혼하던 당시, 아현은 우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임은 아현이 그 아이를 낳았을 거라고는 여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차피 둘이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지 않아도 아현의 엄마인 화란이 어떻게든 애 지우고 결혼을 엎게 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파혼까지 했으니 당연히 지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 똑바로 말해. 배 속에 있는 그 애, 내 자식 맞아? 너도 다른 놈 자식을 나한테 덤터기 씌우려고 한 거 아니냐고!]
앞길 창창한 젊은 여자가, 그런 말까지 듣고 왜 그 남자의 아이를 낳았겠는가.
그 후 워낙 어마어마한 일이 많이 터지는 바람에 어느덧 아현의 일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일곱 살짜리 아이가 있다니.
나이로 봤을 때 그때 그 아이가 틀림없었다. 즉 화란과 아현이 그 아이를 둘이서 키우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였다. 며칠을 잠을 설치고 고민하던 정임은, 결국 아들이 가르쳐 준 주소로 찾아가 보았다.
놀이터 하나 찾아보기 힘든 동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낡은 다가구 주택이 죽 늘어선 좁은 골목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새끼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놀고 있었다.
알고 봐서 그런지 정임의 눈에는 영락없이 우진을 쏙 빼닮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고, 내 새끼가 맞네, 내 새끼가 맞아!”
전봇대 뒤에 숨어 아이를 지켜보던 정임은 발을 동동 굴렀다.
손자손녀가 넷이나 됐지만 못 보게 된 지가 벌써 몇 년째였다. 그런 와중에 어린 손자를 보니 그야말로 복권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웬수바가지니 뭐니 해도 우진이 아픈 손가락임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우진의 자식이라 생각하니 애틋함이 한층 더했다. 그토록 마음에 안 들었던 아현마저 신통하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어쩜 그 깍쟁이 같은 것이 저렇게 잘생긴 아들을 쑥 낳아서 키워놨을까, 응?”
가슴이 마구 뛰었다.
저한테 아들이 있다는 걸 알면 그놈도 정신을 차리고 사람 노릇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가 있으니 아현과도 결국은 이어지지 않을까. 누가 뭐래도 애한테는 아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암, 엄연히 우리 집안 핏줄인데.
도망간 두 며느리와 손자들 대신에 바야흐로 새 손자와 새 며느리가 생길 판이었다. 김칫국을 사발 째 들이마시던 정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우리 이쁜 도련님, 이름이 뭐야?”
아이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정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강은호.”
정임은 친절하게 고쳐 말해주었다.
“아유, 이름도 참 이뻐라. 근데 강은호 아냐, 김은호야.”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아이에게, 정임은 다정스럽게 말했다.
“우리 은호 뭐 좋아해? 할머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응?”
“낯선 사람, 안 돼요.”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 된다고 단단히 교육을 받은 듯, 아이는 경계하듯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말이야, 낯선 사람이 아니고 우리 은호 할머니야.”
정임이 그렇게 말했을 때, 갑자기 옆에 있는 집의 대문이 열리고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은호야, 이제 들어와서 밥 먹어야지.”
화란이었다.
“……!”
정임을 본 화란의 얼굴이 귀신을 본 사람처럼 굳어졌다. 놀라기는 정임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그 곱던 사모님이 저렇게 늙었을 줄이야!
“사부인. 접니다.”
정임이 다가서며 말하자 화란이 소스라치며 은호의 팔을 끌어다 얼른 자기 등 뒤로 숨겼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애써 태연한 척 대꾸했지만, 화란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그간 저희 손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세상에 어쩜 이날 이때껏 연락 한 번을 안 주시고…… 여태 까맣게 몰랐지 뭡니까?”
“누가 누구 손자라는 겁니까? 잘못 보셨어요.”
정임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화란은 아이 손을 붙잡고 후다닥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임이 얼른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이미 문은 굳게 잠긴 후였다.
“사부인, 우리 얘기 좀 하십시다, 예?”
정임은 철로 된 낡은 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들기며 소리쳤다.
“모른 척 시치미 떼신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이런다고 핏줄이 끊어지는 게 아니지 않아요? 애를 위해서라도 천륜을 끊어 놓으면 안 되는……!”
말하다 말고 정임은 그만 얼어붙었다. 갑자기 대문이 확 열리더니 머리 꼭대기부터 물벼락이 쏟아진 것이었다.
“…….”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정임을 향해, 빈 양동이를 든 화란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여기 댁의 손자 없으니까 썩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