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외전 11] 우리 가족
(181/181)
181화. [외전 11] 우리 가족
(181/181)
#181화. [외전 11] 우리 가족
2023.06.23.
시현의 도움으로 은호가 본격적으로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1년 가까이가 지났다.
돈 문제 때문에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씩밖에 못 받던 치료를 매일같이 다니게 되자 은호는 하루하루 몰라보게 좋아져 갔다. 그전에는 겨우 단어로만 말하던 것을, 이제는 제법 문장으로도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우리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착해요.]
처음 은호가 이렇게 긴 문장으로 말했을 때, 두 사람은 아이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그렇게 은호는 점점 좋아져서, 원래 생각하던 특수학교가 아니라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치료비가 나가지 않게 되니 집안 사정도 훨씬 나아졌다. 열심히 일하면 일한 대로 돈이 착착 모였다. 덕분에 아현과 화란은 단칸방에서 방이 두 개 있는 집으로 이사까지 갈 수 있었다.
모두가 시현의 덕분이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저한테 어떻게 굴었는데……. 그 애가 보살이지.]
화란도 두고두고 시현에게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날을 후회했다.
시현은 아현에게 일할 수 있게 되면 연락하라고, 일자리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이제 곧 은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상태도 더 좋아지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파트타임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은호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희망에 차서 살아가고 있는 아현에게,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뭐? 누가 왔었다고?”
아현은 이불을 박차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쉿, 은호 깰라!”
은호를 재워놓고서야 말을 꺼낸 화란이 얼른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쨌든 내가 물벼락을 뒤집어씌워서 쫓아냈으니까 두 번 다시 못 찾아올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화란은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은호는 아현에게뿐만 아니라 화란에게도 살아가는 이유이자 희망이었다. 평생 남편을 기만하고, 돈 쓰는 거나 낙으로 삼고 살았던 화란을 다 늙어서야 겨우 사람답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은호였다.
그런 은호를 자칫 빼앗길까 봐 화란은 겁이 났다. 정임이 핏줄이니 천륜이니 운운해서 더 그랬다.
“걱정 마, 엄마. 아무도 은호 못 빼앗아 가.”
엄마의 마음을 짐작한 아현이 오히려 화란을 위로했다.
“아현아, 우리 다시 이사 갈까? 응? 아무도 모르는 데로 말이야.”
“벌써 은호 초등학교 배정까지 받았는데 가긴 어딜 가.”
“그래도. 저쪽에서 이제 와서 친권이니 양육권이니 주장하고 나오면 어떡하니, 응?”
불안해하는 화란에게, 아현은 잘라 말했다.
“도망가서 해결될 일 아니야.”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
[아주 애비를 쏙 뺐더라. 딱 어릴 적 너야.]
정임에게 은호 이야기를 듣고, 우진도 희망에 부풀었다.
출소 후 1년 넘게 집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고 있었던 것은, 달리 길이라곤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나이는 마흔이 훌쩍 넘었고, 전과 때문에 일자리는 구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기업에서 과장까지 하던 사람이 차마 막일은 못 하겠고.
무엇보다 삶에 희망이라는 걸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 일은 하고 돈은 벌어서 다 뭘 한단 말인가. 그저 하루하루 엄마한테 소줏값이나 뜯어내면 그만이지.
그런데 내게 자식이 있었다니!
드디어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얼굴도 못 봤지만 벌써부터 우진은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임이 화란에게 물벼락을 맞고 쫓겨났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아현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옛날부터 쓰던 집 전화번호가 지금도 그대로인 덕분이었다.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해요.]
우진은 옛날에 회사 다닐 때 입던 양복을 꺼내 입었다. 오랜만에 말끔하게 면도도 하고 이발소도 다녀왔다.
혹시 냄새가 날까 봐 이틀 전부터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 봐야 하도 술을 퍼마셔서 퀭해진 낯빛까지 감출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최선은 다했다.
햇살이 유난히 따뜻한 어느 겨울날 오후, 우진은 아현의 집 근처 카페에서 아현과 마주 앉았다.
[너 똑바로 말해. 배 속에 있는 그 애, 내 자식 맞아?]
모진 말을 내뱉고 헤어진 지 어언 7년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우진을 향해, 아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우진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현이 너무 달라져 있어서였다. 예쁘기로 말하자면 당연히 더 젊고 화려하게 꾸몄던 옛날이 예뻤지만, 지금은 훨씬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며 모진 고생을 다했을 텐데, 커피 잔을 들어 올리는 거칠어진 손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얼굴만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우진은 아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염치없지만 지금이라도 아이한테 아빠 노릇 하고 싶어요.”
더할 수 없이 진심이었다.
“비록 죄인에다 못난 아빠지만, 은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막노동이든 배달 일이든 뭐든……!”
한참 후에야 아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호가 언어발달지연이 있어요.”
전혀 다른 화제가 나오는 바람에 우진은 조금 당황했다.
“집안 사정은 안 좋은데 치료비는 비싸고…… 한 1년쯤 전까지는 많이 힘들었는데, 시현 언니가 사정을 알고 도와준 덕분에 치료를 잘 받아서 많이 좋아졌어요. 해 바뀌면 초등학교도 갈 수 있게 됐고요.”
“시현이가요?”
우진은 놀랐다. 은호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자식인데. 게다가 시현은 아현과도 절대 좋은 사이가 아닌데도 치료비를 도와줬다니.
“언니한테 정말 죽도록 미안하고 부끄러워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어요. 내가 언니한테 했던 짓들, 다 없었던 걸로 할 수 있다면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텐데.”
“…….”
“수없이 생각했어요. 지금이라도 어떻게 안 될까, 진심으로 사과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세상엔 되돌릴 수 없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제야 우진은 알아들었다. 아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김우진 씨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늦었어요.”
조용한 아현의 말이, 우진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은호한테 아빠 노릇 하고 싶다고 하셨죠.”
“…….”
“아빠 없이도 은호 많이 사랑받고 자라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은호를 정말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은호 앞에 나타나지 말아주세요. 그게 김우진 씨가 은호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아빠 노릇이에요.”
“하지만……!”
허둥지둥 매달리려는 우진에게, 아현이 잘라 말했다.
“여태 잘못 살아오셨죠.”
“…….”
“딱 한 번이라도, 자식에게만은 사람이 돼보세요.”
그 말이 천둥소리처럼 귓가에 울리는 순간 우진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아빠 노릇을 하려 드는 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일 뿐이라는 걸.
아현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엄마로서, 자식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 자식 내가 보겠다는데 무슨 권리로 막아!’
고함을 치고 억지를 부리고 싶은 마음을, 우진은 꾹 참았다. 여태까지는 그렇게 제 성질대로 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아현의 말대로 평생에 딱 한 번, 자식에게만은…… 사람답고 싶었다.
우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카페를 나오는 길에, 아현은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우진은 돌아서서 가는 대신에 멀찍이서 몰래 아현의 뒤를 따랐다. 비록 아빠 노릇은 못 하게 됐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아현은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화란이 밀어주는 그네를 타고 있던 아이가, 엄마를 보자마자 얼른 뛰어내려 총알처럼 튀어와서 품에 안겼다.
“엄마아아아!”
말로만 듣던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자신을 꼭 닮은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진은 충격에 휩싸였다.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동시에 여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여태 우진은 수없이 과거를 후회했다.
감옥살이를 할 때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시현의 소식을 언론으로 접할 때도, 아까 카페에서 아현에게 아빠 노릇 할 생각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후회했다. 아니, 후회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진짜 후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진은 이제야 깨달았다.
진짜 후회란 이런 것이었다. 한없이 부끄럽고 너무나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 싶은.
나는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았을까. 내 자식 앞에 아빠라고 나서지도 못할 정도로…….
“우리 은호, 저녁 뭐 먹고 싶어?”
“토마토 스파게티!”
“좋았어!”
엄마와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신이 나서 우쭐대며 가는 아이의 뒤로 노을이 졌다.
가질 수 없는 것.
되돌릴 수 없는 잘못.
“큭……!”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리석은 남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너무 늦은 울음을 터뜨렸다.
*
해가 바뀌고, 태준이와 은하는 드디어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두 아이의 입학을 앞두고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러나 하필 정작 당일에 시현이 몸져눕는 바람에 그만 취소가 되고 말았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데, 응?”
하루 종일 입을 꾹 다문 채 누워만 있는 시현을 보고, 태하는 걱정이 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병원에 가자고 말해도 들은 체도 안 하고,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이상하게 눈만 자꾸 흘기고 대답은 안 해주는 것이다.
태준이도 궁금해했다.
“아빠. 엄마가 왜 저래요?”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뭐가 속상하신 것 같아.”
“아, 알겠어요! 엄마가 오늘 가족사진을 못 찍게 돼서 속상한가 봐요!”
제 방으로 달려갔던 태준이가, 한참 후에 스케치북을 들고 돌아왔다.
레온과 희선, 태하와 시현, 그리고 은하와 자기까지 가족 모두를 그려 넣은 그림이었다. 화가인 레온을 닮은 건지,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아이치고는 제법이었다. 최소한 태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 엄마가 좋아하시겠다.”
태하는 태준이와 함께 그림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여보, 이거 보고 기운 내, 응? 태준이가 가족사진 대신 그려 왔어.”
몸을 일으켜 그림을 본 시현의 입가에 그제야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뭔가 생각하던 시현이 불쑥 말했다.
“태준아, 엄마 색연필 좀 줄래?”
태준이에게 색연필을 건네받은 시현이, 자기가 그려진 부분에다 뭔가를 살짝 그려 넣었다. 그것을 본 태하의 눈이 커졌다.
“당신……!”
그제야 시현이 울상을 하고 얼굴을 감쌌다.
“난 몰라, 진짜. 이 나이에……!”
원래 두 사람은 태준이를 낳고 몇 년 동안은 둘째를 가지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그 사이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시현도 더 이상 출산과 육아가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결국은 태준이 하나만 잘 키우자고 합의를 보고, 혹시 몰라서 피임도 꼬박꼬박 잘해왔는데.
얼마 전에 태하가 열흘가량 외국에 출장을 다녀왔다가 돌아와서 오랜만에 밤을 불태우게 되었다. 문제는 중간에 피임 도구가 똑 떨어졌던 것인데…….
“그래서 내가 그만하자고 했잖아, 바보야!”
투정을 부리며 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는 아내를, 태하는 정신없이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머리칼에 수없이 입을 맞추며 기쁨에 차서 속삭였다.
“그랬구나, 나 때문이었구나. 응? 진짜로 나 때문이었어.”
“몰라, 나 진짜 창피해서 어떡해?”
“괜찮아, 하나도 안 창피해. 어머니는 당신보다 훨씬 많은 나이에 은하를 낳았는걸.”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빠와 얼굴이 빨개져서 투정을 부리는 엄마를, 태준이는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왜 그래요?”
그제야 태하는 환하게 웃고 아들에게 그림을 건네주었다.
엄마의 배 부분에 아주 작은 아기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본 태준이가 숨을 멈췄다.
“……!”
잠시 후, 아이의 환호성이 방을 가득 메웠다.
“와아, 나도 동생 생겼다!”
- 어린 상사,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