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화 (1/170)

프롤로그

섬광이 번뜩였다.

엔크리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불에 달군 꼬챙이가 목을 쑤신 듯한 통증을 느꼈고.

가죽을 덧댄 갑옷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몸 안을 돌던 빨갛고 뜨거운 액체를 왈칵 쏟아 내며 정신을 잃고.

다시 눈을 뜬다.

하루의 시작이다.

꿈은 아니다.

이미 수차례 겪은 일이기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

따-앙.

아침을 알리는 소리.

불침번이 국자로 냄비를 땅땅 두드린다.

세 번째 같은 아침.

엔크리드는 그제야 실감했다.

‘또?’

매일, 죽기만 하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는 걸.

1. 내 꿈은 기사였다.

엔크리드에게 칼을 가르쳐 준 선생은 성격이 꽤 좋은 편이었으며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넌.”

그 선생이 검집째로 든 검을 바닥에 수직으로 세운 채 몸을 기대고 엔크리드를 불렀다.

“마을로 돌아가라. 농사를 짓는 게 싫으면 마을 자경단 노릇을 하고. 그럼 자경단장쯤은 꿰찰 거다.”

그때 이 칼밥 좀 먹었다는 선생의 말을 들었으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릴 때 들었던 한마디가 문제였다.

“엔키, 넌 천재다.”

서너 살 많은 동네 철부지와 목검을 들고 다퉜는데 가뿐하게 이겼다.

이때가 11살, 처음으로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자식이 엄청나게 칼싸움을 못 했다는 걸.

엔크리드는 열다섯에 마을 어른과 목검을 들고 겨뤄 이겼다.

그 후로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가 태어난 작은 마을에는 제대로 칼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는 놈은 삼류 용병 출신이었는데.

다리 하나를 잃고 마을에 흘러들어온 뜨내기였다.

그가 마을 꼬맹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엔크리드도 있었다.

“넌 천재구나.”

열다섯에 두 번째로 같은 말을 들었다.

일전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네 어른이 한 말이었다면, 이번에는 제 입으로 말하길 기사 작위를 포기하고 레이디를 위해 다리를 잃은 용병의 말이었다.

‘내가 천재구나.’

그리 생각했다.

꿈을 품었다.

기사가 되기로 했다.

전화에 휩싸이는 대륙을 일통할 군주를 보필하는 기사.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기사.

이때 즈음 대륙 전체에 한 음유시인의 노래가 널리 퍼졌다.

작은 마을, 엔크리드의 마을에까지 닿을 정도로 널리.

내용은 평이했으나 음률이 귀를 홀렸고, 마지막 가사가 마음을 흔들었다.

이 전쟁을 끝내는 기사!

전쟁을 황혼으로 물들게 할 기사!

우리는 그를 황혼의 기사!

종말의 기사라 부르리!

끝의 기사! 전란을 끝낼 기사!

전란을 끝맺을 기사.

음유시인의 노래가 소년·소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내가 바로.’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열여덟, 마을에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 엔크리드는 마을을 떠났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

친구는 몇 놈 있지만, 어릴 때부터 검에 빠진 엔크리드 곁에는 마음을 붙일 이들도 몇 없었다.

그 틈에서 소년은 성장했고 떠났다.

그렇게 용병 생활을 시작했다.

실력이 나쁘진 않았다. 특히나 노력하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두 달이면 충분했다.

이름도 없는, 흔히 말하는 삼류 용병이란 작자한테 깨지고.

“덜 여물었다.”

이런 말을 들었다.

좋은 선생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모았다. 죽을힘을 다했다. 목숨을 반 개쯤 걸고 도적 무리와 싸웠다.

그렇게 번 돈으로 교습소를 찾아갔다.

큰 도시에는 검술 교습소가 두어 개는 있었다.

검을 배웠다.

운이 나쁘진 않았다.

선생은 솔직했으며 양심적이었으니까.

그는 엔크리드에게 칼을 놓으라고 했다.

“아니요. 안 그럴 겁니다.”

엔크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참 열심이다. 열심이야.”

엔크리드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야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손바닥이 터지고 팔근육이 후들거리고.

수없이 반복했다.

끼리끼리 모인 곳에서는 괜찮았다.

엔크리드는 특출난 노력가였다.

그리 돈을 모아서 이 교습소, 저 교습소를 헤매다 보니 스물이 넘었고.

스물다섯이 넘었을 때쯤에는 그래도 경력이 쌓이고 실력이 쌓여 용병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래봤자, 작은 도시에서 몇 번은 되물어야 ‘아, 그 친구, 칼 좀 쓰지.’라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희망.

그렇게 스물일곱의 봄.

엔크리드는 자신의 재능이 보잘것없음을 깨달았다.

지나가다 붙은 시비의 결과가 그리 만들었다.

다섯 합 만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고 배에 구멍이 났다. 엔크리드는 구멍 난 배를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물었다.

“너, 몇 살이냐?”

“열둘.”

열둘이란다. 기도 안 찼다.

이런 게 진짜 천재였다.

“미안, 첫 실전이었어.”

꼬마가 말했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농노 출신의 꼬맹이.

검을 잡은 지는 고작 반년.

“손속이 과했군. 치료비에 보태게.”

꼬맹이의 스승이란 작자가 돈주머니를 던졌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내장도 다치지 않았고, 그리 깊게 찔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주머니는 챙겼다.

열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16년을 손바닥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고작 6개월 배운 열두 살 꼬맹이에게 졌다.

우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습한 감정을 품고 살진 않았다.

굳이 그리 어둡고, 칙칙하게 살아갈 이유는 없지 않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엔크리드는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란 법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칼잡이 생활을 이어 갔다.

용병 생활만 얼추 십 년.

뛰어난 기사나 검사는 될 수 없어도 노련한 병사는 될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용병 일을 때려치우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게 그가 택할 최선이었다.

이제 와서 농사나 짓고 살 순 없지 않나.

용병 출신의 삼류 검사, 적절한 수식어였다.

“군대가 장난으로 보이시나, 아무나 다 받아 주는 줄 아냐고.”

누군가는 비웃었고.

“힘내쇼.”

누군가는 어깨를 두드렸다.

인정을 받기도 했고, 뒤처지기도 했다.

그렇게 서른.

나우릴리아 왕국, 사이프러스 사단.

4연대, 4대대 4중대, 4소대.

일명 사사 소대 소속이 곧 엔크리드가 있는 곳이었다.

소대장의 바로 밑, 십인장이 바로 엔크리드의 지위였고.

깡, 깡, 깡.

불침번이 쇳덩이를 후려쳐 막사 전체를 깨웠다.

“……꿈자리 한번 더럽게 뒤숭숭하네.”

그 소리에 깬 엔크리드가 중얼거렸다.

“무슨 꿈을 꿨는데 그러슈?”

옆자리 부하 놈이 면포를 겹겹이 쌓아 만든 야전 침대에서 일어나, 부츠에 발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껄렁껄렁한 태도지만, 실력은 자신보다 나은 친구였다.

“내 일생.”

“불길하게, 씁. 아, 벌레.”

부츠 안에 벌레가 있었는지, 부하가 신다가 만 신발을 벗어 탈탈 털고는 다시 신었다.

그 뒤, 바닥에 떨어진 벌레를 보곤 침을 뱉고 발로 비볐다.

진득한 체액과 침이 섞인 흔적이 바닥에 남았다.

그걸 본 엔크리드도 일어나서 복장을 챙겼다.

심장 어림에 쓰로잉 나이프가 꽂힌 흉갑, 팔을 보호하는 완갑, 정강이 보호대 등이다.

몸 안에는 두꺼운 천을 겹으로 쌓은 내갑을 입고.

그 위로는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친다.

갑옷은 가죽을 몇 겹으로 덧댄 물건이지만, 그리 튼튼한 가죽이라고 할 순 없었다.

잘 벼린 칼날이면 쓱싹 베일 만한 물건이다.

기름 먹인 나무를 덧댄 완갑 정도는 다른 놈들 것보다야 조금 낫긴 했다.

“이전 십인장이 뒈지기 전에 이런 꿈을 꿨다고 들었는데.”

엔크리드는 얼핏 그런 소문을 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뒈질 팔자요?”

부하가 웃기에 뒤통수를 툭 때렸다.

“안 죽어. 재수 없는 소리는.”

일어나서 냄비에 물을 붓고 육포 몇 조각을 던졌다. 그 후 몇 가지 먹을 만한 채소를 더 넣고 끓인다.

아침 식사였다.

“오늘 교전 계획 있수?”

옆자리 부하가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자신은 말단 십인장이다.

네 명의 십인장 위로 한 명의 소대장이 있다.

아마 그 소대장도 모를 거다.

엔크리드는 검술 실력도 그저 그렇고 귀족도 아니기에 십인장이자 분대장에 머무르지만, 전장에서 구른 짬밥은 어지간한 중대장도 씹어 삼킨다.

그걸 알기에 십인대의 부하도 엔크리드를 존중하는 거고.

“그래서 어릴 때 꿈에서 대장은 뭐가 되고 싶었수?”

부하가 툭툭 다가오더니 물었다.

“기사.”

“……웃으면 때릴 거요?”

“안 때려.”

“풉.”

“그렇다고 비웃냐? 이 새끼가 빠져 가지고.”

말하며 궁둥이를 걷어찼다.

맞은 부하가 아픈 척을 하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기사라니.”

기사란 무엇인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자다.

홀로 천을 상대하는 괴물이다.

홀로 수백의 적을 베어 죽이는 영웅이다.

하물며 현재 그들이 속한 부대, 그러니까 사단의 이름도 기사 이름을 땄다.

사이프러스 사단, 사이프러스 경의 군대란 소리다.

그런 기사가 꿈이라니.

“꿈이 참 야무져서 좋수다.”

“꿈은 원래 야무진 거야, 자식아.”

말하며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그릇을 챙겼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자신이었다.

다른 십인대는 모르겠지만, 엔크리드의 분대는 모든 잡일을 똑같이 분담했다.

십인장이라고 해 봤자 명령을 받고 전달하는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 창이나 칼을 제일 잘 쓰는 놈이 하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조금 특별했다.

그의 무력은 다른 분대원보다 약하다.

하지만 다른 분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이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는 있었다.

타 부대에서 엔크리드 부대를 두고 말하길, 사사사 분대라 한다.

사사 소대의 사고뭉치 분대라고.

엔크리드는 그런 분대의 분대장이었다.

“도와드리리다.”

“그럼 그 입은 좀 다물고 따라와라.”

“그럽시다.”

부하가 낄낄 웃었다.

이놈은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왔는지.

독특한 놈이지만, 엔크리드는 딱히 부하의 개인사가 궁금하진 않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고.

분대원들은 이런 엔크리드의 태도를 좋아했다.

과거를 묻지 않고, 현재도 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아마도 분대원 전부가 자신을 따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덜그럭거리며 그릇을 씻고 있자, 부하가 냇가의 물을 첨벙거리다가 물었다.

“기사는 왜 되고 싶었던 거요?”

도와준다고 따라와선 물장구나 치고 있는 꼴이다.

음유시인의 노래에 빠져서라고 답하면 웃으려나?

엔크리드는 잠깐 생각한 뒤에 답했다.

“칼도 잘 쓰고 싶었고, 기왕 하는 거 기사도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소년 감성이시구려.”

부하가 또 낄낄댔다.

“그 입 좀 닥치라니까.”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검 들고 춤을 춘 거였소?”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수없이 검을 휘두른 탓에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사가 되고 싶냐고?

그럴 수가 있나. 무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포기하진 않는다.

그저 묵묵히 견디고 나아갈 뿐.

엔크리드도 현실을 모르진 않았다.

다만 꿈은 현실에 침묵했고, 침묵한 엔크리드는 그저 칼밥을 먹고사는 병사가 되었다.

“다 닦았으면 가자.”

“그럽시다.”

시답잖은 대화였다.

몸을 일으켜서 막사로 돌아가고.

국지전이 진행 중인 왕국과 교전이 벌어질지.

아니면 근래 생긴 도적단이 보급품을 노린다는데, 거길 공격할지.

뭘 할지는 모르지만.

‘공기가 탁하네.’

전장의 공기는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오늘은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대기 시간이 길었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검이나 휘두를까 하다가, 낮잠을 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는 법이었다.

‘예전만큼 하긴 어렵지.’

부단한 노력,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삼류 용병 수준의 십인대장.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두 뼘은 넘어갈 때쯤에야 소대장이 외쳤다.

“사사 중대 전원 집합.”

교전이었다.

중대원이 모여 군대의 한 축을 차지했다.

엔크리드의 십인대도 마찬가지였다.

싸늘한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엔크리드는 용병 생활을 하며 얻은 목걸이 부적을 한 번 쥐었다가 옷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이게 목숨을 구해 준다고 했던가?’

개소리겠지만, 본래 전장에 나서는 병사는 미신을 쉬이 믿는 법이었다.

다만, 엔크리드 자신에게 이 부적을 믿는다고 하면 글쎄라는 답이 나올 터였다.

그저 그때 이걸 쥐여 줬던 노파의 눈을 봤고, 그 절절한 말투가 마음을 움직였을 뿐.

‘밑져야 본전이니까.’

목숨 걸고 싸운 뒤 보상으로 받은 게 달랑 이 부적뿐이었다.

반쯤은 운이 따라 죽인 거지, 수틀리면 죽는 건 자신이었을 거다.

험난한 마물 퇴치였음에도.

작은 화전민촌이기에 줄 돈이 없었다.

우연히 길목을 지나치는 엔크리드를 보고 마물을 처리해 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을 뿐이지.

‘웃기는 일이지.’

동정심에 목숨을 걸다니, 미친 짓이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기사란 그런 것이니까.

꿈은 현실에 침묵하고 잡아먹혀 찢겼어도, 흔적은 남았으니.

기사가 되고 싶었다.

전쟁 영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개 병사.

와아아아아!

함성이 터졌다.

덩달아 엔크리드도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내질렀다.

앞쪽에서 군대의 물결이 몰아쳐 온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긴 노을을 만든다.

그 노을빛을 부수며 양쪽 군대가 내달렸다.

엔크리드도 마주 달렸다.

“목숨 간수하면서 싸웁시다!”

언제나 웃는 낯의 부하가 외치며 먼저 튀어 나갔다.

곧 적과 아군의 창과 칼이 서로의 피와 살을 헤집기 시작했다.

오늘의 전투는 백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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