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루
어제와 똑같은 하루.
‘꿈?’
너무 생생했는데, 그게 꿈이었나?
어안이 벙벙했다.
꿈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며 맞이한 전장.
또 난전, 비슷한 자리에서 싸우다 보니 반사적으로 환영이 겹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어제도 이러지 않았나?’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흔들었다.
잡념이다. 꿈이었을 거다.
운이 좋아 예지몽이라도 꾼 걸까?
‘예지몽을 운이 좋다고 꾸는 게 맞나?’
모른다. 알 수 없다.
엔크리드는 혼란스러웠다.
특히.
기름 먹인 방패가 쪼개지고.
“염병, 뒈질 뻔했네.”
벨이 저 말을 했을 때 더 그랬다.
“벨, 머리통이 쪼개져서 정신을 놔 버렸냐?”
반사적으로 기억한 말을 그대로 뱉으니.
“무슨 미친 소리야.”
벨이 주섬주섬 일어난다. 엔크리드는 벨을 보고 생각했다.
벨은 곧 죽는다.
그걸 두고 봐야 하나.
두고 봤다.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리 놔뒀고.
섬광이 벨의 머리통을 터트렸고, 눈알이 튀어나와 다시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때렸으며.
“정신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렘이 다시 자신을 구했다.
“뭐?”
“드디어 돌아 버린 거요?”
렘이 귀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가 보였다.
“오늘 매의 새끼인지, 발톱인지 하는 새끼가 와서 나 그거 잡으러 가야 하니까, 정신 좀 차리쇼. 씁, 이거 원 불안해서 놔두면 금방 뒈질 것 같네.”
“네 걱정이나 해.”
반사적으로 말하니, 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발을 뗐다.
“집중하라니까, 말 참 안 들어.”
그리 중얼거리며 렘이 떠났고.
난 왼손에 방패 대신 바닥에 굴러떨어진 도끼를 줍고, 오른손에는 검을 쥔 채로 전장에 섰다.
찝찝했다.
그리 버티는 와중이다.
앞에서 적병 하나가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이었다. 발을 쓸 줄 아는 놈이었다.
검술 선생 중 그런 말을 한 작자가 있었다.
검술에서 칠 할은 발이 하는 거라고 하던가.
칼날이 보이며 엔크리드는 다시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다.
찰나의 순간, 집중력이 빛을 발한다.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작아졌다가 금세 커졌다.
엔크리드는 그걸 끝까지 지켜봤다.
그 점이 칼날이 되어 제 목을 뚫는 것까지.
‘아.’
비명과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목이 꿰뚫렸으므로.
시-익 하고 공기 빠지는 소리만 목구멍에서 나올 뿐이었다.
끔찍한 통증이 목구멍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진다. 엔크리드는 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대로 피를 꿀렁꿀렁 흘리자.
“자비다.”
자신을 잠시 지켜보던 적병이 말하며 머리를 칼끝으로 찍었다.
그걸로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또 들었다.
깡, 깡, 깡.
국자로 냄비를 때리는 소리를.
“아침부터 눈빛이 왜 그따위인지 묻고 싶은데.”
옆자리의 렘이다.
그가 부츠를 들고 말했다.
또 하루다. 같은 하루.
‘꿈?’
“개 같은 꿈이라도 꾼 거요?”
“그치, 꿈이지?”
“아, 시발, 벌레.”
렘은 부츠에 있던 벌레를 털어 내곤 가래침을 뱉고 짓밟았다.
세 번째 보는 장면이었다.
엔크리드는 부츠도 안 신고 장비도 걸치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게 꿈이라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벨이 죽고 렘이 자신을 구한다.
렘은 매의 신체 부위 중 하나를 별명으로 가진 궁수를 찾으러 떠나고.
검을 잘 쓰는 적병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
“너 뭐냐?”
엔크리드가 물었다.
적은 대답 없이 검을 찔렀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그 찌르기.
두근.
심장이 뛴다. 집중력이 발휘된다. 엔크리드는 이전보다 더 확실히 검 끝을 볼 수 있었다.
몸을 뒤틀며 피했다.
드드득!
그리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다. 유려한 찌르기는 엔크리드의 목을 꿰뚫진 못했으나, 목 옆을 크게 뜯어 냈다.
화끈한 통증이 목덜미를 따라 전신으로 퍼졌다.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고.
피가 꿀렁꿀렁 쏟아진다.
“자비다.”
머리통으로 칼날이 떨어진다.
깡, 깡, 깡!
“악!”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통증이 여실하다. 엔크리드는 목을 쓰다듬었다.
“악몽이요? 마녀가 총각 딱지라도 떼간 거요?”
렘이 시답잖은 농담을 지껄였다.
“부츠에 벌레 있다.”
엔크리드가 손으로 얼굴 반쪽을 덮으며 말했다.
죽을 때 고통도 고통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뭐? 뭐요, 이거 어떻게 안 거요?”
렘이 부츠 안에 든 벌레를 바닥에 버리곤 가래침을 뱉어 짓밟았다.
“그냥.”
“예언가였소?”
“아니야.”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엔크리드는 평소와 같이 준비를 마치고 나가다 말고 멈췄다.
“렘.”
“왜 그러쇼?”
“머리가 너무 아프다. 식사는 알아서 해결하고, 누가 날 찾으면 막사에서 앓고 있다고 해 줘.”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거라면야.”
렘이 낄낄 웃었다. 웃음이 헤픈 친구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고.
죽은 뒤에 다시 반복되는 거라면.
그게 맞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엔크리드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막사 안으로 도로 들어가 장비를 풀고 앉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원인은?’
언뜻 생각나는 게 있어 더듬더듬 품을 뒤적였다. 없었다. 화전민 촌장에게 받은 목걸이가 없었다.
‘그거 때문이라고?’
갈망? 소원?
‘축복?’
아니, 이걸 축복이라고 할 수 있나?
그저 하루가 반복되는 것뿐인데?
하물며 축복 계열, 그러니까 블레싱 계열 아티팩트에 관해서는 엔크리드도 주워들은 게 있었으나, 이런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에 가깝지 않나?’
생각하며 엔크리드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참 끔찍하게도 아프다. 죽을 때마다 더럽게 아팠다.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터질 듯했다.
점심까지 거르자, 렘이 먹을 걸 챙겨서 들어왔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요? 진짜 게으름이라도 피우고 싶어서?”
설마 그러겠냐는 눈치다.
엔크리드는 이곳에서도 알아주는 노력가였다.
“응.”
“진짜?”
“응.”
엔크리드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별일이네, 그럼 쉬쇼. 오후 늦게 전투가 있다고 하니까 잘 쉬고. 내가 잘 둘러대 줄 테니, 그때까지 몸 추스르고.”
렘이 나갔다.
시간이 흐른다. 생각이 정리될 리가 없었다.
이런 건 정리한다고 정리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니까.
아아아!
함성이 들린다. 땅이 울린다. 전투가 시작됐다.
엔크리드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나가면 그 찌르기에 죽을 테니까.
그리 버티려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버틸 순 없었다. 전장의 소모품 주제에 몸이 아프다고 전장을 외면할 순 없는 노릇이니.
“다들 준비하고 나가! 전투다!”
막사 안을 도는 감시병이 있다.
엔크리드는 장비를 갖추고 나갔다.
다시 싸웠다.
어제보다 한참 후방에서 싸웠다.
벨도 렘도 안 보고 버티는데.
훅- 하고 앞쪽 군세가 요동쳤다.
적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군이 밀렸다.
어느새 엔크리드는 최전선에 섰다.
그리고 다시 그놈을 만났다.
이건 우연인가, 필연일까.
모른다. 다만, 전장의 어디로 가든 죽거나 이 친구를 만나게 된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고민할 때였다.
왜 만나는지 알아볼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느냐다.
찌르기.
칼날이 날아온다.
‘기술 이름이 뭐였더라?’
렘이 집중하라며 기술에 관해 말한 적 있었다. 이것만 할 줄 알아도 전장에서 그냥 뒈지진 않을 거라고 하며.
마물의 굴에 갇혀도 차분히 숨을 돌려야 한다고도 말했었다.
지금 엔크리드가 시도하는 이 짓은 렘이 알려 준 거였다.
무슨 심장이라고 했었는데.
이름이 떠오를 듯 말 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재주가 다시 빛을 발한다. 엔크리드는 칼날을 보며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두근.
심장이 요동친다. 칼날이 제 목을 파고드는 타이밍과 각도를 본다.
몸을 옆으로 날렸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지만, 살았다.
그리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뻑!
뒤통수에 충격이 오며 끔찍한 고통이 뒤따라왔다. 머리가 멍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줄도 몰랐다.
뒤쪽에서 다른 적군이 도끼로 투구를 후려친 거다.
그리 얻어맞은 뒤, 몽롱한 눈으로 위를 쳐다보니.
“자비다.”
찌르기 새끼가 다시 칼날을 꽂았다.
퍽.
깡, 깡, 깡!
다시 눈을 뜬다.
반복되는 하루.
‘생각하지 말자.’
목걸이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생각하지 말자.
이게 무슨 일인지도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생각할 건 두 가지다.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
그리고 그걸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
“부츠에 벌레 있다.”
“응? 예언가요?”
“그거 뭐였지? 나한테 예전에 가르쳐 주려고 했던 거.”
끔뻑끔뻑.
렘이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야수의 심장?”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야수의 심장.
한낱 인간의 심장으로는 창과 칼, 도끼가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어찌 눈을 부릅뜨고 있으랴.
야수의 심장을 품으면 그럴 수 있으니, 그리하라.
렘이 말한 내용이 떠올랐다.
“다시 가르쳐 줘.”
“엥?”
렘이 황당해했다.
엔크리드는 렘을 이해했다.
한때는 배우겠다고 아등바등했고, 그 열정에 반한 렘은 가르치겠다고 아등바등했다.
결국, 엔크리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렘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눈을 감지 않는 게 훈련의 기초라는데.
뒈지기 일보 직전까지 눈을 뜨고 있는 건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눈만 뜨고 있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엔크리드가 보기에 렘의 실력은 어지간한 일류용병보다 나았다.
그의 도끼가 목을 반쯤 파고들 때까지 보고 피하는 게 훈련의 골자였다.
“해 보자고, 훈련.”
엔크리드의 눈에서 열정이 타오른다.
가슴에 불꽃이 지펴졌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따질 필요가 있을까?’
자신에게 재능은 없다. 그건 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므로 둔재는 천재를 이길 수 없다.
그럼 시간이 공평하지 않으면?
저주라도 좋다. 이건 끈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끈.
“좋수다. 요즘 뼈다귀 잃어버린 개새끼마냥 힘이 쪽 빠져 있었는데 오늘따라 힘이 넘치는 걸 보니 나도 힘이 나네.”
렘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침 먹고 바로.”
“뭐, 그럽시다.”
아침을 먹고 그릇을 씻어 내고.
기사가 꿈이었다는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렘은 그걸 보고 웃고.
그 뒤 수업 시간이 됐다.
“훈련법 까먹었수?”
“전혀.”
어찌나 인상적인지, 엔크리드는 렘의 훈련 때문에 악몽도 꿨다.
그놈의 도끼가 목을 가르는 악몽을.
“가 봅시다.”
훈련의 요지는 간단하다.
도끼가 목을 베려 하면 눈을 부릅뜨고 피하는 거.
렘이 실수하면 엔크리드가 죽는다.
원래는 그게 겁이 나서 제대로 못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죽어도 다시 땅땅땅이잖아.’
겁대가리 상실의 시간이다. 처음 죽으며 배운 집중력, 야수의 심장을 일깨운다.
엔크리드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놀라서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이 평온해진다.
야수는 쉬이 놀라지 않는다. 느려진 심장 박동이 평정심을 가져온다.
평정심, 야수의 심장의 핵심이다.
차분한 마음이 도끼날의 궤적을 눈에 담게 한다.
몸을 다루는 훈련이야, 그동안 쉬지 않고 해 왔다.
궤적을 보고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끼날이 허공을 가른다. 엔크리드는 타이밍에 맞춰 오른발을 뒤로 빼고 몸을 뒤로 물렸다.
도끼가 눈앞을 지나쳤다.
“……나 몰래 연습했수?”
렘이 물었다.
“조금.”
“좋수다. 좋아. 하지만 지금 타이밍은 조금 빨랐수. 직전에 피하는 거요.”
심장 가죽을 두껍게 하는 훈련이다.
렘이 도끼를 휘둘렀다.
엔크리드는 도끼가 목을 벨 듯 말 듯한 타이밍까지 기다렸다가 피했다.
“크, 우리 부족에서도 이거 배워서 하는 놈이 몇 안 됐는데 말이요. 신기하네.”
오전 훈련이 끝났다.
렘이 엔크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수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 어설픈 놈들은 상대해볼 만할 거요.”
“어설픈 걸 넘어서는 놈들이면?”
“뭘 묻고 싶은 거요?”
“그런 놈을 마주하면 어떨까.”
“몰라서 묻는 거요?”
엔크리드가 빤히 보자, 렘이 말을 이었다. 이 양반이 오늘 왜 이러나 싶은 눈빛이다.
“튀어야지.”
그래, 도망이다.
전장에서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마주해 부딪치는 건 미친 짓이다.
눈치가 있고 제 주제를 알았기에 엔크리드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어설프지 않은 상대로 연습하면 더 좋겠네? 이거?”
“그렇게 훈련하면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랄 거요.”
렘이 낄낄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지금 막 자기 목숨이 수백 개가 된 것 같다고.
축복이든 저주든.
‘쓸 수 있으면 다 쓴다.’
엔크리드는 지금까지 그리 살았다.
그리 살았으니, 지금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 찌르기, 마주한다.
그럴 생각이었다. 좋은 훈련 상대 아닌가.
죽을 때의 고통은 끔찍하지만, 그만큼 반대급부가 크다.
엔크리드는 십여 년 만에 성장의 기쁨을 느꼈다.
더 없이 마음이 충족되는 기쁨.
마약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충족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