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야수의 심장
“전군 집합! 4소대 집결!”
소대장의 외침이 막사 앞을 울린다.
충족감이 가슴을 채운 하루, 그 하루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쉽게 말하면 이건 몸으로 익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백날 연습만 해서 소용없는 거고, 그런데 훈련한다고 이걸 이만큼 익힌 걸 보면 재능이 없다고 하긴 어렵지 않수?”
소대장의 부름에 움직이며, 렘은 답지 않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엔크리드는 반문할 뿐이다.
자신한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믿기도 어려울뿐더러, 그걸 믿는다고 해도 문제다.
얘기라도 퍼지면?
진짜 신의 축복이라면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이단심문관이랑 면담이다.
이단심문관이란 작자들과 면담해서 그 끝이 좋을까?
어림도 없지.
잘해야 화형이고 최악은 고문 파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몸에 못질을 당하고 손발톱이 뽑히고 싶은 사람은 없다.
물론 엔크리드도 그랬다.
용병 시절, 이단이란 이름으로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많이 봤다.
그중 일부를 뒤로 조금 도운 적도 있고.
누가 알았다며 자살도 골라서 한다고 비아냥거렸을 거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도 했다. 그리 돕는 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칼잡이로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뭐지, 그 여유는? 몹시 보기 꼴값지 않은데, 어디서 금괴라도 주웠수? 오늘 탈영할 예정이고? 그런 거 혼자 먹으면 탈 나는 거 모르슈?”
금괴라…….
그것보다 좋은 걸 얻긴 했다.
“닥치고 가자.”
집합 명령이 떨어졌으니, 움직여야 할 때다.
엔크리드는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대충 소매로 닦았다.
이대로 투구를 쓰면 고약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와중에 냇가로 가서 몸을 닦고 가겠다고 할 수도 없다.
옆에 선 렘 놈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무슨 훈련을 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엔크리드는 4소대 소속.
소대 위치로 이동했다.
‘먹힐까?’
하루 만에 배우는 건 무리다. 그래도 어느 정도 요령은 터득했다.
칼에 찔려 죽은 경험 덕분이다.
“우리는!”
소대장이 외친다.
“이긴다!”
소대장은 모난 곳 없이 무난한 사람이다. 특별할 것 없이 윗선의 지시를 잘 따르는 사람이고.
전장의 문이 다시 열리려 한다.
해가 서쪽을 따라 내려가며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떨렸다.
왜?
엔크리드는 자신에게 되물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두려움.
칼에 찔려 죽는 것만 세 번.
그 통증, 그 아찔함, 몇 번을 겪는다고 해서 적응될 것 같진 않았다.
엔크리드가 목을 쓰다듬었다.
아무 상처가 없는데도 따갑다. 칼날을 삼킨 기분이었다.
“왜? 목이 간수가 안 될 것 같수?”
옆에 선 렘이 속삭였다.
“긴장 좀 해라. 전장이다.”
엔크리드가 ‘전군 전진!’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옆에서 렘이 발을 맞춰 걸었다.
“긴장감이 몸을 굳게 만드는 거요. 안 그러려고 나한테 그거 배운 거 아니요?”
맞는 말이다. 그래서 얄밉다.
야수의 심장.
가르친다고 배우는 놈이 몇 없다고 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른다.
걸음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요. 오늘도 뒈지지 말고 봅시다. 꿈이 야무진 대장.”
렘의 말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만약 오늘 또 죽으면 내일은 기사가 꿈이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전장이었다.
백병전의 시작.
똑같은 하루가 흐른다. 엔크리드에게는 네 번째의 오늘이다.
방패가 쪼개지는 걸 막아 보려다가 관뒀다.
애초에 방패의 역할이 뭔가.
상대의 칼이나 창, 도끼 따위를 막으려고 들고 있는 걸 아끼겠다고 용쓰는 게 더 우스운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잡생각이 길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뭔가 훅하고 날아왔다.
잇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뒤로 몸을 젖히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땅!
날아오는 창날이 방패 모서리를 때렸다.
아슬아슬하게 막은 셈이다.
왼쪽 어깨가 시큰했다. 창이었다. 꽤 힘이 들어간 일격이었고.
적군이 뻗은 창을 뒤로 당기고 다시 뻗었다.
평소라면 굳은 몸이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또 뻣뻣한 자세로 막았을 거고 위기의 연속이었을 테지만.
마음이 가라앉는다. 덕분에 창날이 보였다.
자신을 죽인 찌르기보다 두 배는 느렸다.
그러므로 피하지 못할 것도 없다.
창날 끝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고개만 꺾었다.
씽.
창날이 투구 옆을 스쳤다.
태어나 처음 해 보는 묘기에 가까운 짓이었다.
야수의 심장은 쉬이 흥분하지 않는다.
작은 동작으로의 회피.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마음의 여유는 새로운 시각도 선사했다.
엔크리드의 눈에 창을 내지른 놈의 투구와 흉갑 사이의 틈이 보였다.
턱이 슬쩍 보일 정도의 틈.
그리 넓은 틈은 아니다.
그렇다고 좁다고 할 수도 없다.
칼날이 들어갈 만큼은 될 테니까.
칼을 쥐고 위로 찔렀다.
대단한 기술까지도 필요 없었다.
푹.
아래에서 위로, 칼날이 턱부터 목구멍까지 뀄다.
“꾸륵.”
적병이 피와 잘린 혀 덩어리 따위를 입 밖으로 뿜어냈다.
빈틈을 노리는 칼질은 대단한 완력이 필요치 않는다. 그걸 새삼 되새긴 엔크리드는 예전에 검술 선생이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상대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그다음이 쉬워져.”
꽤 비싼 교습소였는데, 가르치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몇 개조차도 엔크리드는 한동안 개소리라고 생각했었다.
‘돈값 했네.’
그 개소리 중 하나가 현실이 됐다.
짧은 동선의 회피와 공격, 유효했다. 효과적이었고.
발로 상대 복부를 밀며 칼을 뽑았다.
턱 밑으로 생긴 구멍에서 피가 더 울컥울컥 쏟아졌다.
적병은 그대로 뒤로 무너졌다.
“이 새끼가!”
바로 뒤에서 다른 놈이 달려든다. 엔크리드는 숨을 몰아쉬지도, 급하게 대응하지도 않았다.
‘여섯 걸음.’
엔크리드는 상대와의 걸음을 재며 검을 들어 왼손등에 고정된 방패 끈을 그었다.
두드드득.
스윽.
두드드득.
두 번을 긋자 고정해 둔 끈이 잘렸다. 팔뚝에 방패를 끈으로 칭칭 감아 두는 건 살아남기 위해 배운 편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난전 중에도 방패를 쉬이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
적병이 다가온다. 엔크리드는 방패를 집어 던졌다.
땅!
창을 든 적병이 갑자기 방패가 날아오자 놀라서 양손을 당긴다.
자연히 손에 들린 창도 뒤로 후퇴요.
발도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넓적한 방패는 잠깐이지만, 상대 시야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방패를 던진 엔크리드는 상대 시야가 가려진 틈에 왼쪽으로 성큼 두 걸음 걸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지만, 좌우 시야를 좁게 한다.
엔크리드도 눈앞에서 갑자기 적군이 사라지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
그걸 이용해 상대의 눈을 속이고 밑으로 몸을 숙이고 떠받치듯 상대를 뒤로 넘기는 기술도 애용했었고.
처음 죽는 날에도 한 일이다.
그걸 이번에는 더 깔끔하게 썼을 뿐이다.
상대의 오른쪽이다. 엔크리드는 달려들기 전에 적병의 손부터 살폈다. 긴 창대의 앞은 왼손, 오른손은 창대 뒤를 쥐었다.
오른손잡이라는 거다.
평소라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보였다.
냉정함이 준 시각이다.
소규모 전투나 대결에서는 가끔 이용하는 것들이지만, 난전 중에는 쉽게 쓰지 못했던 잡기들.
용병으로 살아남으며 배운 통찰력이다.
오른손잡이 창수는 오른쪽으로 창을 휘두르기 어렵다는 것.
방패를 막은 적병이 다급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화들짝 놀란다. 그럴 만도 했다. 눈앞의 상대가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적병의 눈이 곧 엔크리드를 쫓아 발견한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고 놀라는 사이, 엔크리드는 상대의 뒤통수 쪽에서 가슴 앞쪽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내리쳤다.
빡!
놈의 갑옷은 목 뒤를 가로막는 형태였다.
두툼한 천과 그 위를 덮은 얇은 가죽이 그의 목이 완전히 잘리는 걸 막았다.
칼날이 목 뒤에 반쯤 박혔다.
“컥, 컥, 아.”
적병의 눈이 보였다. 놀란 그대로의 눈. 동그랗게 뜬 눈.
반쯤 잘린 목 뒤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목이 반쯤 잘렸음에도 창수는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대가 엔크리드의 오른쪽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충격은 없었다. 이미 반쯤 죽은 사람이었고, 애초에 창대에 힘을 싣기 어려운 각도로 움직인 덕분이었다.
엔크리드는 검을 위로 들어 뽑았다.
우드득.
뼈에 박혔었는지, 꽤 힘을 줘야 했다. 빠진 칼날에 핏덩이 따위가 엉켜 흘렀다.
전장의 상황을 얼핏 살피며 엔크리드는 바닥에서 도끼 대신 귀퉁이가 깨진 방패를 주웠다.
이제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이게 되네.’
너무 쉽게 된다. 전장에서는 평소 가진 실력의 반도 보이기 어렵다.
그게 당연하다.
죽고 죽이는 한복판에 서서 어떻게 평소와 같이 움직일 수 있을까.
가끔 더 미쳐 날뛰는 놈도 있지만, 대부분 당황하기 마련이다.
세 번의 죽음을 겪기 전까지는 엔크리드도 그랬으나, 이제는 좀 달랐다.
‘되겠다.’
그 찌르기, 상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엔크리드가 한 일이 전장의 판도를 바꿀 만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병사가 조금 더 잘 싸우는 정도였다.
판세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엔크리드 개인에게는 큰 변화였다.
적병 두엇을 그리 쓰러뜨린 후.
“억!”
벨이 다시 넘어진다.
조금의 여유가 그를 붙들어 세울 시간을 줬다.
“괜찮냐?”
“염병, 여기 무슨 돌부리가 있어.”
마른 벌판이다.
돌이 삐죽 솟아 있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다만, 벨은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므로 넘어진 벨이 멍청한 거다.
“정신 차리고.”
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덕분에 살았네.”
엔크리드는 손에 힘을 빼지 않고 벨의 손을 꽉 쥐었다.
“……손 좀.”
벨이 손을 놔달라 중얼거린다.
반쪽으로 쪼개진 투구, 피로 물든 머리통, 벨의 눈이 보인다.
섬광은 화살이었고 그 화살은 벨의 머리통을 꿰뚫는다.
이미 아는 일이다.
다만, 난전 속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알아채는 건 어렵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엔크리드는 잡은 손을 당기려 했다.
벨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다가 용케 힘을 주며 버텼고.
퍽.
머리통이 깨졌다.
화살이 날아와 벨의 머리통을 부쉈다.
흉갑에 피가 튀었다.
엔크리드는 벨의 머리가 터진 걸 보자마자 머리를 숙였다.
훙- 하고 머리 위에서 섬뜩한 뭔가가 지나갔다.
화살이겠지.
뒤쪽에 있던 죽은 아군의 시신에 화살이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행운의 여신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온 거요?”
피하자마자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벨의 머리통을 지켜 주진 못했지만, 내 머리통은 지켰다.
물론 안 그랬어도 렘이 구해 줬을 거다.
네 번째, 똑같은 상황이었다.
“뭐, 비슷한 거.”
대강 답하니, 렘이 피식 웃는다.
투구 사이로 그의 치아가 보였다.
생긴 건 나름 곱상한 놈이 말투나 하는 짓은 과격하기 짝이 없다.
“좋수다. 이 화살 날린 게 매의 젖꼭지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고 하니, 난 그놈 찾으러 가오. 여신에게 기도 열 번 더 하시고.”
“가다가 뒈지지 말라고 네 기도도 대신해 주마.”
“그럼 고맙지. 이거 잊지 말고.”
렘이 도낏자루로 제 왼쪽 가슴을 툭 때리며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매의 눈인지, 발톱인지를 잡으러 가는 거다.
엔크리드는 오늘 밤에 렘이 이 화살을 날린 궁수를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물어볼 수 있기를 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렘이 사라진 자리로 아군과 적군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간격이 좁아지기 시작하며 엔크리드는 전장 흐름이 도저히 좋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세 번의 경험이 있다.
아군은 밀리는 중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살아남는 것.
엔크리드는 기묘한 흥분이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조금만 있으면 그 실력 좋은 병사를 만날 테니까.
얼마 안 있어 그 일은 현실이 됐다.
그 찌르기가 다시 제 머리를 노렸다.
피하는 대신, 엔크리드는 날아오는 칼날에 제 칼날을 들이밀었다.
티디디디딩.
허공에 불똥이 튄다.
적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걸 막아?
그리 묻는 듯한 눈이었다.
“실력이 괜찮은데.”
적병이 말하며 다시 검을 뻗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처음은 방패로 두 번째는 옆으로 몸을 굴려서, 세 번째는 역으로 칼을 휘둘렀다.
짧은 동선을 그린 엔크리드의 칼날은 허공을 그었다.
그리고 적병이 다시 팔을 뒤로 당긴 순간, 뒤에서 뭔가가 허리를 후렸다.
뻑!
“끅.”
비명이 절로 나오는 걸 씹어 삼켰다.
이후 다시 찌르기가 날아온다. 일부러 몸의 무게 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해 아예 넘어지듯 구르려 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타이밍은 나빴다.
뿍.
칼날이 목 옆 빗장뼈를 부수며 안으로 박혔다.
불에 달군 인두가 살과 뼈를 지지는 것 같았다.
“끕!”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꽂힌 칼날을 손으로 쥐려 하자, 상대가 쑥하고 칼을 회수한다.
평소에 칼을 갈 때 공을 들였는지, 칼날이 무척 날카로웠다.
검이 뽑힐 때는 더 끔찍한 통증이 따라왔다.
눈앞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아팠다.
엔크리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뒤를 돌아봤다.
엉거주춤하게 선 덩치 큰 적병이 보였다.
손에 든 몽둥이도.
저게 자신의 허리를 때린 것일 터.
“자비다.”
날 세 번이나 죽인 놈이 그렇게 말하며 칼을 수직으로 세워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눈이 감긴다. 어둠이 눈앞에 스며든다.
깡, 깡, 깡.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다섯 번째.”
염병할.
될 줄 알았는데.
“뭐가 다섯 번째요?”
옆자리 렘이 물었다.
“부츠에 벌레.”
엔크리드는 말하면서 일어났다.
또 죽었지만, 배운 게 있다.
아니, 그동안 교습소에 돈을 금화 단위로 쏟아부으며 얻은 교훈이다.
한 번에 되는 건 없다는 것.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열 번으로 안 되면 백 번 하면 되는 거였다.
원래라면 한 번 뒈지면 끝이겠지만.
다행히도 엔크리드는 이 짓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