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2화 (12/170)

12. 이틀

프록은 자신의 눈에 담긴 장면을 되새겼다.

‘이길 줄 알았는데.’

자신이 가르치기도 했고 재능도 꽤 있던 놈이다.

성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거야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니까.

찌르기를 중점적으로 배운 병사.

재능이 꽤 쓸 만했던 놈.

고작 이런 소소한 전장에서 죽을 놈은 아니었다.

놔뒀다면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의 실력은 됐을 텐데.

프록은 병사가 죽은 이유를 떠올렸다.

‘경험이 일천해서?’

아니지, 이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키운 병사가 한둘인가.

고작 이 정도로 죽을 놈이 아니다.

‘상대가 나빠서?’

고로 운이 좋지 않았다는 거다. 행운의 여신에게 외면당했다.

프록은 그륵그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운도 실력이니까.’

아군 진지로 들어서자, 부관이 다가왔다.

“한참 찾았습니다. 장군.”

“어, 그래?”

“적지에 다녀오신 겁니까?”

“그냥 놀이 삼아 나갔다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거기’를 찔려 죽은 놈을 봤어.”

프록에게 심장은 금칙어다.

옆에서 그게 찔려 죽는 것만 봐도 질색한다.

그런데 그걸 말하며 웃는 프록이라니.

부관은 장군의 머리통에 벌레가 있지는 않나 의심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부관은 의심하지 않았다.

경험 많은 프록은 심장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눈앞의 프록 장군은 노련한 군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심장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뱉을 만큼.

그러니 심장이 뚫려 죽는 걸 보고 웃을 수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장 뚫려 죽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걸 봤을 때, 이 프록은 웃을 수도 있다.

“재밌는 걸 보셨나 봅니다.”

“뭐, 그냥, 이상하게 흥미가 가는 놈.”

아군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진즉에 데려왔을 테니까.

프록은 싱겁게 말하며 저벅저벅 걸었다.

프록의 발바닥 가죽은 두껍다. 부츠조차 필요치 않았다.

오히려 너무 미끄러운 탓에 프록 중에는 가끔 발바닥에 못을 심는 놈들도 있었다.

다만, 프록 장군은 발바닥에 못 따위를 심는 프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타입이었다.

훌륭한 감각과 적당한 훈련이 동반된다면.

미끄러운 발바닥 또한 무기가 되니까.

‘찌르기를 그대로 흉내 냈다.’

재능의 영역은 아니었다. 프록의 눈은 상대가 익힌 기술의 정도를 파악한다.

프록 장군은 적의 병사가 찌르는 걸 봤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수없이 담금질하고 또 담금질한 기술.’

배웠다기보다는 목숨 걸고 익힌 기술에 가깝다.

재능이 아닌 무지막지한 노력의 영역.

‘재능은 일천했으니까.’

운이 수십, 수백 번이 겹친다면 안 될 일도 아니다.

눈앞에서 찌르기를 수없이 보고도 살아남는다면, 저런 움직임도 가능하겠지.

다른 건 다 개판인데, 찌르기 하나만큼은 봐 줄 만했다.

근데 이게 말이 되나?

‘그따위 실력으로?’

번번이 전장에서 살아남아?

목숨 걸고 배웠다는 건,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는 걸 증명한다.

분명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수없이 부딪치고 깨짐으로써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안 된다.

그러니 흥미가 생긴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지만.’

프록 장군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행운의 여신은 불공평하다. 그녀는 편애주의자다.

누군가에게 운을 몰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운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평생의 운을 다 써 버렸겠지.’

또 볼 일은 없다.

그게 오늘 죽는다는 말은 아니었다.

흥이 돋아 발로 걷어찼지만, 그걸 어찌어찌 막았으니까.

거기에 마지막에 그를 지키러 온 두 놈을 보니, 지금 전장에서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게 오래 갈 것 같진 않았다.

자기보다 뛰어난 상대를 향해 무지막지하게 덤비면 미약한 재능으로도 실력은 늘겠지만.

목숨이 수백 개는 필요할 테니까.

“장군.”

“밥 먹자.”

프록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쪽에 관한 관심을 접었다.

이제는 다른 일에 집중할 때다.

즉, 밥이나 먹고.

전략을 수립할 때였다.

장군의 말에 금발의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 * *

뱃사공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앉은 곳이 나룻배 위임을 자각했다.

‘꿈?’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꽤 오래된 기억이었다. 언제였지?

‘처음 다시 깨어났을 때.’

입 없는 뱃사공.

호기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아련한 기억을 떠올려 깨운다.

‘그때는.’

개꿈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에서 만난 뱃사공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용케 하루를 넘겼네?”

뱃사공이 말한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엔크리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듣는 것만이 여기서 허락된 전부인 듯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네.”

뱃사공이 노래하듯 말했다. 실제로 음률과 박자가 섞인 말이었다.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오감을 비롯해 무엇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갑갑하고 답답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꿈이라면 손에서 막 주문도 나가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꿈이지만, 꿈이 아닌 거다.

그걸 깨달은 엔크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듣는 것뿐임을 알았다.

“계속해서 버틸 수 있니? 그럴 수 있겠니? 계속해서 네 앞을 가로막을 건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까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넌 아직 내 이름도 들을 수 없다.”

뱃사공을 바라봤다. 검은 장막 위로 흐릿하게 상이 맺혔다.

새벽이슬처럼 맺힌 물방울이 눈앞을 가로막은 듯했다.

그만큼 흐릿했다.

다 검다. 처음에는 입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네가 들을 수 있는 건 내 변덕, 그리고 호의지.”

말하고 킥킥 웃는다. 웃는 게 보여서 아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아이야,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넌 벗어날 수 없단다. 네 앞을 막는 ‘벽’은 계속 있을 거란다. 그게 네 운명이 될 것이고.”

벽이란 단어는 이상하게 들렸다.

실제로 말한 건 다른데, 벽이라고 들린 것 같았다.

당최 이게 뭔지.

“너 살아남을 수 있겠니?”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당연한 말을.”

어? 말이 나오네?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다.

상대가 더 놀란 것 같았다.

“너…….”

뱃사공이 뭐라 속삭였지만, 금세 정신이 아득해졌다.

풍덩.

나룻배가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물 깊은 곳에 빠졌다.

물 위, 이슬 너머로 맺힌 검은 덩어리가 말을, 아니 의지를 전했다.

“이건 기억에 안 남을 거다. 하지만.”

피식피식.

뱃사공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진짜 재밌는 애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 깊은 곳에 빠지며 정신을 잃는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깊은 심연에 빠져들었다.

* * *

“……이 전장의 영웅은 누구?”

“사이프러스!”

“이 전장의 주인은 누구?”

“사이프러스!”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건 누구?”

“사이프러스!”

“판결을 내리는 건 누구!”

노랫소리였다. 경쾌한 음률, 굵은 목소리, 박자가 딱 맞는 그런 노래.

‘군가?’

아니, 군가는 아니다.

이 부대에 소속된 뒤로 군가 몇 개를 배웠지만, 이런 건 없었다.

여기서 배운 건 군가라기보다는 박자만 있는 기합 같은 거였다.

우리는 이긴다!

지지 않는 태양의 가호를 받아!

주신의 힘이 깃들어!

뭐, 이런 종류다. 음률 따윈 없고 악이나 지르며 내치는 외침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음률이 있고 박자가 살아 있다.

귀에 익은 노래이기도 했다.

‘음유시인의 노래.’

음유시인도 다 같은 종류는 아니다.

개중에는 한쪽 편에 서서 군대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종군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사이프러스 찬양가 따위를 만들어 부르고 싶은 음유시인이 어디 있으려고.

하물며 저 작자는 그 사이프러스라는 기사를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살아났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렘이 보였다.

옆구리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손을 들어 만지려고 하자, 렘이 툭 그 손을 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부러지진 않았으니 걱정 마슈. 대신 머리통이 한 번 제대로 흔들렸다고 합디다. 자, 이거 몇 개요?”

렘이 손가락 몇 개를 폈다 접으며 흔들었다.

“엿이나 처먹어.”

엔크리드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오늘’이 끝났다.

그 상황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사납다.

렘이 하는 농지거리를 받아 주기 어려웠다.

“봐, 정신이 나간 것 같다니까. 나 렘이유, 분대장의 영원의 단짝.”

“미친 새끼.”

“날 잊은 거유? 이러면 너무 섭하지.”

엔크리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늘은 넘겼다.

그럼 하루가 지나갔다는 거고.

정신이 산만하다. 꿈이 너무 난잡했다.

‘기억 못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너무도 또렷이 남아 있다.

까만 물, 나룻배, 눈코입이 없는 뱃사공.

그가 한 말도 전부 기억에 남았다.

조금 흐릿한 느낌이라, 먼 과거의 일 같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기억력 하나는 좋은 편이었다.

엔크리드는 전부를 기억했다.

“안 잊었다. 귀족 사냥꾼.”

한때 렘의 별명이었던 걸 읊어 주자.

“쉿,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수.”

그제야 농지거리가 멈췄다. 그리고 눈으로 힐난한다. 그 얘기는 왜 꺼내냐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정신을 다잡았다.

일단.

“나 어떻게 된 거냐?”

그제야 제대로 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죽은 병사, 몰라보게 늘어난 실력, 그리고 프록.

‘개구리가 끼어들었다?’

용병질만 몇 년째지만, 프록을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물론 프록에게 맞은 것도.

갈비뼈가 몽땅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전장에서 프록을 적으로 만난다면?

“튀어.”

“숨어.”

“뒈져.”

노련한 용병 셋은 각기 다른 답을 내놨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였다.

튀거나 숨지 못하면 뒈진다는 것.

프록은 그만큼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다.

전투 종족이라는 게 다 그렇다.

거인도, 용인도, 요정도.

어떤 종도 인간보다는 우월한 능력을 타고났다.

하지만 기사급으로 성장하는 건 인간이 가장 많다.

그게 인간이 이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이유겠지.

“그 뒤에 내가 ‘직접’ 업어서 전장에서 뛰쳐나왔지. 그야말로 험로였소. 죽을 뻔했지.”

진짜 위험했다면 이렇게 말할 리 없었다.

“신세를 졌군.”

“그걸 알면 설거지 당번 열 번쯤은 그냥 해 줄 수 있겠수다.”

이 새끼는 진짜.

엔크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끝났으면 가라고 했는데도 렘은 쉬이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처럼 웃는 낯 그대로다.

“혼자 연습한 거요? 나 안 보는 데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니.

“심장이 무르익었던데?”

음?

“내가 가르친 건데 못 알아볼까 봐?”

‘아!’

엔크리드는 렘이 자신을 지켜봤다는 걸 알았다.

하긴 보고 있었으니, 적기에 도와줄 수 있었겠지.

“어쩌다 보니까. 죽을 고비 몇 번 넘기니까 뭔지 알겠더라고.”

이미 그럴듯한 핑계야 수십 번을 생각했다.

그중 제일 그럴듯한 말이었다.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실이기도 했다.

약간 축소한 것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지 않고 진짜 뒈졌다고 말할 순 없지 않나.

“잘했수다.”

렘이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푹 쉬쇼. 몸이 회복되어야 다음이 있지.”

엔크리드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의무 막사였다.

부상자가 모인 곳.

일어나 볼까?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한쪽에 앉은 병사가 흐릿한 눈으로 말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무리하면 덧나요. 머리가 많이 흔들렸어요.”

일개 사병한테 군의관이라도 다녀간 듯싶었다.

일개 사병 따위야, 다치면 동료 중에 약초 좀 볼 줄 아는 놈이 있으면 다행인 거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뒈지는 일도 다반사인데.

‘용케 의무 막사까지 왔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알아보면 그만이다.

그것보다는.

‘오늘을 넘겼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는 게 중요하지.

천막 입구 쪽을 보니,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햇빛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횃불의 빛, 그와 함께 오가는 그림자.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

“영웅은 누구!”

“사이프러스!”

후창으로 병사 무리가 외치는 소리도 함께다.

오늘을 넘겼고 다음 날을 살았다.

그런데 오전과 오후를 몽땅 기절한 채로 보내고 저녁에나 깨어난 듯싶었다.

“하루를 넘긴 겁니까?”

대기하던 의무병에게 물으니.

“하루라니, 이틀째요.”

충격이 컸구나.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어쨌든 오늘을 넘긴 게 중요했다.

그 찌르기 병사를 이겼다.

실력으로 넘었다.

이후 엔크리드는 뱃사공에 관해 생각했다.

그가 한 말을 떠올리고 곱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복될 거라고 했으니까.

그러므로.

‘죽으면 오늘은 다시 반복된다.’

뱃사공은 마치 벌이라도 받으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게 왜 벌이지?’

엔크리드에게 그건 형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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