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복기
이틀을 내리 기절한 뒤에도 엔크리드는 반나절을 더 잤다.
깨어나 보니, 눈앞에 빵과 수프 따위가 놓여 있었다.
빵과 수프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졌다.
눈을 반쯤 열린 천막 입구로 돌렸다. 새벽인 듯했다.
사람이 오가는 소리도 안 났고, 횃대도 몇 개 안 세워 뒀는지 막사 입구로 들어오는 빛도 아까보다 훨씬 적었다.
이 막사 안에 있던 모두가 다 자고 있었고.
엔크리드는 빵으로 손을 뻗었다.
‘팔은 무리 없이 움직이고.’
엔크리드는 손을 뻗은 김에 아예 몸을 반쯤 틀어서 일어나려고 했다.
찌릿.
그러자 옆구리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뒤통수까지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이 정도면.’
렘이 부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판단으로도 그랬다.
머리가 흔들려서 기절했다고도 했지만, 다행히도 머리통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어지럽지도 않았고 눈도 코도 귀도 다 멀쩡했다.
푹.
찢은 빵을 식은 수프에 찍어서 입에 쑥 넣었다.
‘혀도 멀쩡하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이조차도 맛있다고 느꼈다.
밀가루가 주는 은근한 단맛에 혀가 반응했다. 뭘 넣고 끓였는지 수프는 맹물보다 조금 간이 있는 정도였으나 빈속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걸쭉한 수프와 빵이 제대로 된 식당에서 나온 메뉴라도 되는 양, 엔크리드는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천천히 삼켰다.
‘기절한 뒤에 급히 먹으면 속이 뒤집힌다.’
경험으로 아는 거다.
본래라면 의무 막사를 지키는 병사가 해 줘야 할 얘기지만.
저녁나절에 본 그 병사는 만사가 귀찮아 보였다.
애초에 의무 막사를 지키는 병사라니, 그게 필요한 병과인가?
‘뒷배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사지 멀쩡한 놈이 여기서 다친 병사를 지키는 일이나 할까.
속을 채우고 나서 억지로 앉았다.
먹자마자 누우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
다쳤다면 일단 잘 먹고 잘 쉬어야 하는데.
잘 먹는 일에는 먹은 걸 제대로 소화하는 것도 포함이었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엔크리드는 천막 입구의 흔들리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눈빛은 흔들리는 횃대를 보고 있으나, 정작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반복된 하루, 오늘, 결국 넘어선 그날.
엔크리드는 그 ‘오늘’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꿈에서도 나올 만큼 그 순간을 되새겼다.
찌르기 자체만 보자면 훌륭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더없이 깨끗한 일격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싸움을 끌어간 것도 나쁘지 않았어.’
발렌 식 용병검의 도움이 컸다.
그동안 수없이 반복한 오늘을 통해 단련한 덕도 있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잘했다고 할 순 없었다.
‘어설펐어.’
수없이 그 순간을 되새긴 결과다.
막사 앞을 누군가 지나갔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횃대 앞을 지나가는 병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늘어진 그림자는 곧 엔크리드의 상상 속에서 찌르기 변태가 됐다.
‘내가 찔렀을 때.’
만약 상대가 피했다면?
그림자가 찌르기를 피한다. 피한 뒤, 검을 휙 돌려 벤다.
검날이 너무도 쉽게 엔크리드 역할을 한 그림자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그럼 죽는 건 나.’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퍽이나.
‘부족했다.’
상대가 조금만 영리했다면, 조금만 싸울 줄 알았다면.
아주 약간의 경험만 더 쌓았다면.
최소한 다음 전장까지만 살아남았다면.
‘아니, 너무 나갔다.’
이건 비약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한도 끝도 없다.
검을 들고 싸우던 그림자는 상상의 산물, 생각을 털어 내자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이미 일어난 일에 신경을 껐다.
‘그랬다면 따위를 하느니, 다음 스텝을 생각하자.’
렘은 전심전력으로 찌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 공격을 그렇게 할 순 없을 터였다.
그래서 머리를 굴렸다.
찌르기를 보여 주는 건 한 번.
그전에는 계속해서 상대의 속을 긁는다.
도발에 빠진 상대가 찌르기를 시도하면 역공.
‘찌르기 한 번에 전부 걸었다.’
실패하면 죽는 찌르기.
그게 과연 옳은가.
싸움을 그런 식으로 이끌면 안 된다. 그건 엔크리드도 안다.
만약 안 됐다고 새로운 오늘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찌르기가 안 먹혔다면 운에 기대야 했을까?’
아니지, 그럴 순 없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운이 아니라 실력.
엔크리드는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는 최선이라고 했다.
궁리한다고 해서 자괴감에 휩싸인 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되새기고 부족했던 것과 잘한 것을 나누는 작업이다.
전투나 대련 후에 언제나 해 왔던 대로.
“만약 목숨 반 개쯤 걸고 싸워서 살아남았다면, 그 싸움은 네 재산이 될 거다. 엔키.”
늙은 검사는 한적한 해안 도시에서 애들이나 가르치는 검술 선생이었다.
실력만 보자면 대도시는커녕 작은 상업 도시에도 이름 날리기 부끄러운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에게만은 아주 훌륭한 선생이었다.
“죽을 때까지 칼밥을 먹을 작정이라면 전투가 끝난 뒤, 그 전투에서 얻은 모든 걸 소화하고 싸고 다시 소화해라. 그게 네가 살 길일 테니.”
늙은 선생이 직접 경험하고 걸어온 길일 것이다.
그는 왼쪽 발을 절었고.
전신에 칼자국이 가득했으니까.
그야말로 몸을 굴려 가며 얻어 낸 교훈.
그 교관은 수업료도 많이 받아먹었다.
그게 아깝지는 않았다.
꽤 값진 시간이었으므로.
지금 그에게 배운 것을 되새길 때였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매 순간 전심전력으로 찌를 순 없다.
그럼 죽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렘도 그렇게 싸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미친 렘 새끼와 대련할 때가 되면, 놈의 도끼질은 한 번 한 번이 전부 묵직한 무게감과 살기를 담았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찌르기를 성공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엔크리드는 성취감에 취하지 않았다.
아니, 기쁘긴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벽을 넘었다는 것에 만족감도 컸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진 않았다.
자연스레 엔크리드는 내일을 그렸다.
찌르기에 성공한 이후를.
그걸 성공하기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내일이 보이므로.
그는 그 내일의 태양을 향해 손을 뻗고 걷는 중이었다.
‘전력으로 뻗되 마음을 전부 싣지는 않는다면?’
그렇게 정답에 가까워지는 중이었고.
머리만 굴려서 알 수 있는 건 너무 적었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이 엔크리드에게 주어진 시간의 전부는 아닐 테니.
얼굴 없는 뱃사공은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벽은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반복된다고 했던가?’
그럼 다시 목숨을 걸고 도전하면 될 일이다.
또 그런 순간이 온다는 걸 알자, 심장이 뛰었다.
아랫배에서부터 시작된 묘한 열기가 전신을 달궜다.
엔크리드는 그 열기를 못 본 체했다.
지금은 몸을 굴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은 휴식부터.’
욱신거리는 옆구리는 의사가 아니라 자가 진단으로 봐도 며칠은 푹 쉬어야 했다.
‘근데 난 대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병사가 다치면 보통 어떻게 되나.
위중의 정도를 떠나, 소속 막사에서 치료하다가 뒈지거나.
‘끗발이 좋으면 곁에 의사를 두고 치료를 받겠지.’
또는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다발로 쏟았다면 사제의 기도를 받을지도 몰랐다.
신성 치료는 그야말로 운과 뒷배가 합쳐져야만 가능한 수준이니까.
물론 상급 지휘관쯤 되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어쨌든 엔크리드는 셋 다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누군가의 수작이 있었다는 건데.
‘모르겠다.’
슬슬 트림이 나오고 하는 걸 보니 소화는 다 된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드러누워 잤다.
아주 푹 잤다.
다쳤을 때는 잘 먹고 잘 자는 게 최고니까.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크고 동그란 눈알이 보였다.
“얼굴 좀 물려.”
손으로 왕눈이 얼굴을 밀자, 왕눈이가 손이 닿기도 전에 뒤로 물러났다.
“하도 곤히 자길래 깨우기가 뭐 했는데 타이밍 좋게 일어났네요.”
“퍽이나.”
시간 아깝다고 발로 걷어차 깨우지나 않으면 다행인 놈이다.
“씁, 여기에 분대장을 넣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왕눈이가 어깨를 펴며 말했다.
누구 솜씨인가 했더니.
하긴, 분대원 중에서 왕눈이나 작센이 아니면 이런 수완을 가진 작자는 없으니까.
“이 일로 저 주머니 좀 풀었습니다. 신세 진 거예요. 잊지 말아요.”
넣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의무 막사는 식사 수준도 일반 막사보다 더 낫고 후방에 있으며.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근무고 뭐고 간에 전부 열외니까.
여기가 아니었다면 아픈 옆구리 부여잡고 낑낑거리며 부대원 단속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 없어도 분대는 잘 돌아가려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444분대의 최약체가 누굴 걱정한다고.
‘아, 최약체는 얘지.’
왕눈이는 싸움에 젬병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주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전투만 일어나면 특수 병과라고 해서 후방으로 잘만 빠져나가니까.
재주도 좋지.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그 재주 덕을 보기도 했다.
“고맙다고 머리라도 박아 줘?”
“거창한 인사는 됐고. 잊지 말라고요.”
‘내가 안 잊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알았다.”
“좋아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바쁜 와중에 병문안까지 와 주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왕눈이와 렘만 온 건 아니었다.
작센이 지나가다 들렸다며 툭 하고 작은 통 하나를 던져 줬다.
“하루에 한 번 옆구리에 바르면 통증이 좀 덜할 겁니다. 어디서 이런 거 받았다는 말은 하지 마시고요.”
“특히 우리 분대원에게 비밀이겠지?”
작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훌쩍 떠났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통을 비틀어 열어 보니 진녹색의 연고가 보였다.
‘약초라도 으깨서 만든 건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면 지극정성이다.
물론 그런 건 아니었다.
일전에도 몇 번 봤던 물건이었다.
써 보는 건 처음이지만.
대강 손가락 끝으로 연고를 떠서 옷 사이로 손을 쑤셔 넣고 옆구리에 슬슬 펴 발랐다.
움직일 때마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연고를 바른 부위가 화끈해지며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좋은데?’
엔크리드는 아껴서 발라야겠다고 생각하며 통을 잘 여며 침대 밑에 넣었다.
‘그런데 의무 막사가 우리 막사랑 가까웠나? 지나가며 들를 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약효 좋은 연고를 받았으면 된 거지.
그 뒤에 다른 분대원 둘도 더 왔다 갔다.
“미안하군요, 분대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꼭 뭔가를 해 줄 수 있는데 안 해 준 것처럼 말하는 분대원 하나와.
“분대장이 없으니 분대가 개판입니다. 이거 드십쇼.”
먹던 사과 반쪽을 던지고 간 분대원까지.
마지막에 들른 놈은 확실히 지나가다가 들른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은 툭하면 길을 잃곤 하니까.
의무 막사 앞에서 ‘여기에 우리 분대장이 있다고? 왜?’ 이렇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으니까.
‘저 새끼는 애초에 내가 다친 것도 몰랐네.’
분대원 키워 봤자 다 헛거다.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엔크리드 자신만 빼고는 다 알아서 잘 싸우고 잘 내빼는 놈들이다.
‘내 일이나 걱정하자.’
자기 하나 없다고 분대가 개판이 되면 얼마나 개판이 된다고.
다들 알아서 잘 지낼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 두는 게 맞다.
그것보다는.
“너 이 새끼.”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혼자 잘 쉬고 있는데 들어온 새로운 손님.
점심나절에 막사로 들어온 작자다.
의무 막사는 컸다. 끼어서 누우면 열 명은 넘게 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큰 막사에 있는 환자는 총 셋이었다.
옆구리가 아픈 엔크리드와.
오늘부로 합류한, 자신을 쳐다보는 소대장 하나.
그리고 저 구석에 누워서 하릴없이 천장을 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금발 하나.
엔크리드에게 말을 건 건 소대장 쪽이었다.
“실력은 최하급 병사 수준, 거기에 용병 출신이면서 분대장이라니. 분대원에게 돌아가며 엉덩이라도 대주는 건가? 어떻게 분대장이 된 거지?”
그러니까 이쪽이 더 문제라니까.
이쪽 소대장은 구면이었다.
툭하면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옆 중대 소대장이다.
이름은 벤젠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름 참 야무지게 잘 지었지.
벤젠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 모른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으르렁거리는 놈이었다.
“거기에 의무 막사라니, 팔자 편한 새끼.”
‘그래,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팔자가 참 편하긴 하지.
옆자리 벤젠스 소대장만 없었으면 더없이 완벽했을 것이고.
“네, 만나서 반갑군요. 소대장님.”
“반가워?”
그럼 엿 같다고 할까?
엔크리드는 성인이었다.
그는 가면을 쓸 줄 알았다.
“네, 조금.”
“조금?”
“아주 반갑지는 않아서.”
“이 새끼가.”
벤젠스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다고 덤비지는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이전 전투에서 허벅지를 깊게 베였다고 했다.
당장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 만큼.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완벽하게 놀리기 좋은 기회가 아닐까?’
엔크리드는 성인이었다. 그는 가면을 쓸 줄 알았고.
아니꼬운 놈을 놀릴 줄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