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5화 (15/170)

15. 그저 한마디 말.

‘자면서 당했다고?’

엔크리드는 황당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둔했나?’

자다가 칼 맞고 뒈져도 모를 만큼?

그럴 리가 있나.

그 정도로 둔했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죽었는지 짐작도 어려웠다.

엔크리드는 잠들기 직전의 순간을 떠올렸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어떤 징조 따위도 못 느꼈다.

잠들었고.

이후 깬 적은 없었다. 잠결에 벌레 소리 따위를 들었던가? 잠을 설쳤던가?

아니다.

푹 잤다.

하루만 지나면 복귀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잤다.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황당해하지만은 않았다.

당황했다고 머리가 굳으면 죽는다.

또 다른 오늘이 시작된 것뿐이었다.

이미 한번 해 봤기에, 엔크리드는 해야 할 일, 고민해야 할 부분을 알았다.

생각해야 할 건 두 가지.

하나는 ‘어떻게’다.

목이 베였든, 코와 입을 막았든.

어떻게 통증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둘은 ‘왜’다.

‘날 왜?’

죽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당했다.

어설픈 솜씨가 아니라는 거다.

상대가 암살자라면 일류 그 이상일 것이고.

적병이라면.

‘일류 암살자보다 더한 놈이겠지.’

의무 막사는 후방이다.

여기까지 몰래 들어와 멱을 따고 가는 수준이라면.

기사의 뺨을 후리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갈 수준의 암살자일 것이다.

왜라는 질문의 답은 사실상 어느 정도는 나와 있는 거 아닌가.

막사 안에는 자신을 제외하면 크랑과 벤젠스뿐인데.

‘벤젠스를 노리려 이만한 위인이 올 리는 없고.’

그럼 답은 하나다.

크랑.

제 소속 부대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개념 없는 병사.

그런 놈이 그냥 병사일 리가 없었다.

‘왜’의 답은 나왔고.

‘어떻게’는 집어치웠다.

오늘 밤 당해 보면 알겠지.

참 이상하게도.

찌르기 변태에게 당할 때, 죽을 때마다 겪는 그 지랄 맞은 통증 덕분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변태 새끼의 눈깔을 보는 게 가장 기분이 개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이 더 지랄 맞네.’

기분이 더러웠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죽어 버렸다는 거.

정말 너무나 기분이 더러웠다.

똥을 밟는 걸 넘어 그 안에서 나뒹굴어도 이런 기분은 아닐 것이다.

‘기분이 정말.’

개 같네?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기에.

엔크리드는 기분 따위는 잊었다.

그 대신 할 일을 떠올렸고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는 오늘 밤에 확인하면 그만이고. 왜는 크랑을 노리고 왔다고 보면 될 것이고.’

여기에서 의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어떻게’와 ‘왜’를 넘어서 ‘누구’라는 의문이다.

암살자는 누구인가.

적병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의무 막사의 위치를 알고 몸을 숨길 줄 알며 암살에 능할 만한 사람.

목표를 이미 확인했으며 접근이 용이한 위치의 아군.

번뜩 떠오른 인물이 하나 있었다.

‘중대장?’

합리적 의심이었다.

요정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몸놀림은 은밀하고 날쌔다.

암살하기 딱 좋은 종족이었다.

하물며 자신이 여기에 있으니 이곳을 오갈 구실도 있다.

며칠 전에 와서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버린 것도 목적이 이쪽이라면 이해가 된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너 뭐 하냐?”

옆에서 벤젠스가 물었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생각.”

“생각? 말 졸라 짧네. 진짜 돌았냐? 이 미친 새끼야?”

허벅지 자상이 어느 정도 나았는지, 벤젠스 소대장이 절뚝이며 일어났다.

“아, 크랑인 줄 알았습니다. 소대장님. 실수입니다.”

“실수라고 하면 다냐?”

“미안합니다.”

“사과하면 끝이냐?”

꼬리를 잡았군.

“먹을 걸 좀 챙겨 오죠.”

엔크리드는 평소와 똑같이 벤젠스를 무시하듯 외면하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뒤에서 벤젠스가 악을 쓰는 목소리 사이로.

“난 안 먹어!”

크랑이 느지막이 일어나 외쳤다.

저 친구 덕에 죽었다고 해서 그가 얄밉진 않았다.

기분이 더러운 것도 맞고.

덕분에 짜증이 치솟는 것도 맞지만.

크랑이 자신을 죽인 건 아니다.

결국, 죽은 건 자신의 실력 부족 때문이 아닌가.

또는 운이 더럽게 나쁘든지.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고 있으면 안 당해.’

몰래 다가온 암살자다. 소란을 피우는 것만으로 주변에 있는 아군이 몰려올 것이다.

야밤에 들어온 고양이를 잡는 것쯤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직접 잡을 필요도 없단 거다.

얼마 안 있어 의무 막사 담당 병사가 눈을 비비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발을 질질 끌며 오는 게 참 만사 귀찮아 보이는 태도다.

이 새끼도 참 한결같네.

“그쪽이 늦은 덕분에 소대장 하나가 화가 잔뜩 났어.”

“내가 늦어서? 그거야 분대장인 당신이 자꾸 놀려서 그런 거잖아.”

공식적으로는 이 병사도 분대장급이었다.

고로 우리 둘은 계급이 같았다.

“최하급 병사라면서 간덩이가 부은 거야?”

만난 김에 같이 돌아가는 길, 게으른 병사가 물었다.

앞뒤 다 잘라먹은 질문이었지만 알아듣는 게 어렵진 않았다.

자꾸 겁도 없이 왜 덤비냐는 거다.

“벤젠스?”

“그쪽은 중급 병사야.”

사이프러스 사단뿐 아니라, 나우릴리아 왕국의 군대가 병사의 등급을 나눴다.

일종의 사기 진작을 위한 포상 제도나 다름없었다.

실력을 증명하면 그에 걸맞은 등급을 내리므로.

제 능력을 증명하고.

계급을 부여받는 체제다.

등급이 오를 때마다 포상금도 있다고 들었다.

엔크리드도 이게 여러모로 유용한 체제라고 생각했다.

최하급,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

총 다섯 개의 등급은 병사가 치열하게 훈련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하니까.

나우릴리아는 무를 숭상하기에 어지간한 지휘관은 전부 상급 이상의 무력을 갖췄다.

그리고 기사는 등급에서 제외.

기사는 기사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이니까.

이런 체제 안에 묶어 둘 수 없는 거고.

그러니 소대장쯤 되면 중급 병사 이상이다.

분대장은 하급 수준이거나 중급.

물론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는 수준으로 등용하진 않는다.

소대장 이상쯤 되면 나름 가려 뽑는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최하급 병사면서 분대장이었다.

휘하 분대원은 최소 중급 이상의 병사였고.

“당신은 특이한 인간인 것 같아.”

병사는 생각 없이 말했으나.

엔크리드는 기분이 묘했다.

‘내가?’

평생 평범하다는 말만 들었다.

또는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이나.

“식사는 2인분이면 될 거야.”

엔크리드가 말했다.

병사는 그를 보더니, ‘역시 조금 이상한 인간이라니까’라고 중얼거리면서도 2인분만 준비했다.

막사로 돌아와 벤젠스를 조금 달래 주고.

아침을 해결한 뒤, 평소와 똑같이 훈련하고 지나간 전투를 복기했다.

크랑은 아침을 먹지 않고 자리를 비웠다.

그러니 먹을 사람은 엔크리드와 벤젠스뿐.

“크랑은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 갔나 보지?”

“뭐, 그렇지.”

엔크리드의 물음에 의무 막사 담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대강 끄덕였다.

요정 중대장을 용의자로 삼았지만.

이쪽도 유력했다.

‘이 병사도 여기에 언제든 드나들 수 있잖아?’

막사 앞을 지키는 불침번이 있지만, 의무 막사 담당 병사를 막진 않을 것이다.

‘섣불리 단정 짓진 말자.’

아귀가 딱딱 맞긴 해도 결론을 내려 버리면 머리가 굳어 버린다.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낫다.

점심이 지나고 나서야 크랑이 돌아왔다.

똑같은 하루였다.

물론 엔크리드만은 달리 움직였지만.

“바쁘네?”

엔크리드가 말을 걸자, 돌아온 크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물었다.

“그거 알아?”

대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뭐가?”

“네가 먼저 말을 건 거 처음이다.”

‘그랬나?’

그러고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딱히 의식하진 않았다.

“그랬나 보지 뭐.”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크랑은 피식 웃더니, 엔크리드의 침상에 궁둥이를 붙었다.

엔크리드는 크랑의 정체가 딱히 궁금하진 않았다. 아니, 않았었다.

하지만 이 정체를 감춘 병사 덕분에 오늘이 반복되기 시작했으니, 궁금증이 들긴 했다.

과연 뭘 하는 놈이길래, 암살자가 들이닥치는지.

살살 꼬드겨서 정체를 밝혀도 되지만.

자신의 꿈을 진심으로 들어준 상대이기도 했다.

때로는 돌려 묻는 것보다 상대의 마음에 진심을 전하는 게 나을 때도 있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그의 옆에 앉아,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고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벤젠스는 졸다가 일어나 둘이 붙어 있는 걸 보고 뭐라 하며 끼어들려다가 멈췄다.

그도 엔크리드의 질문을 들었으니까.

궁금한 건 벤젠스도 마찬가지였다.

엔크리드는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크랑은 웃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여유로운 웃음은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한동안 엔크리드의 눈만 바라봤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엔크리드는 한가롭게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참다못한 벤젠스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음, 말 못 하겠다.”

“왜?”

“말하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 나름 지켜야 할 약속도 있고.”

“그래?”

“그래.”

밝히기 싫다는 말에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 침상에서 둘을 바라보던 벤젠스는 이 황당한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마물 방귀 뀌는 대화인지.

지가 물어놓고 저기서 수긍은 왜 하는데?

숨겨 둔 정체가 있긴 있는 거라는 거잖아?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적군인가? 첩자?

벤젠스의 사고가 끝났다. 동시에 입도 열렸다.

“너 첩자냐?”

“난 사사사 분대장인데요?”

“너 말고 새꺄.”

“나? 아닌데.”

크랑은 고개를 저었다.

벤젠스의 질문을 들은 크랑은 곧바로 부인했으면서도 음 하고 짧은 잇소리를 내더니 침상에서 일어났다.

엔크리드는 가만히 그를 지켜봤고.

그는 몇 걸음 걸어 의무 막사 가운데에 섰다.

의무 막사를 지키던 병사가 졸다가 그를 보더니,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정체를 밝힐 순 없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지.”

묘한 느낌이었다.

막사 중앙까지 걸어갈 때의 걸음걸이, 말하는 태도, 손짓, 미소, 눈빛, 숨소리.

그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묘한 느낌.

마치 준비된 무대를 걸어가는 배우 같았다.

모두의 시선을 자연스레 집중하게 만드는 그런 묘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렀다.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크랑의 입술에 집중했다.

마음을 다해 들을 줄 안다면.

반대로 상대의 귀와 마음을 휘어잡을 말도 할 수 있는 것인지.

“난 이 왕국을 배신할 수 없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

그저 한마디 말.

때로는 거짓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소리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금세 스러질 사랑을 속삭일 때도 쓰이는 말.

그저 그런 말일 뿐일진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너무도 달라진다.

크랑이 한 말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진다는 것처럼 들렸다.

의심할 수 없는 법칙처럼 들렸다.

엔크리드는 환상을 봤다.

막사가 갑자기 확 넓어지는 것 같았고.

그 정중앙에 크랑이 선 것처럼 보였다.

넓다. 용병질을 할 때 나우릴리아 왕국의 곡창지대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 드넓은 초원처럼 주변이 트였다.

그렇게 주변이 트였음에도 크랑은 선명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가 광야를 아우르는 것 같았다.

‘보통내기 수준이 아니라.’

등급을 정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기사?’

아니다. 기사급이 겨우 이 정도 실력일까?

정작 그 기사급 실력자가 제 실력을 숨긴다면 알아볼 눈은 없지만.

직감이었다.

기사는 아닐 것이다.

“뭐, 못 믿으면 말고.”

크랑이 가볍게 한마디 툭 내뱉자, 드넓은 초원도 광야도 사라졌다.

선명하게 보이던 크랑도 본래대로 보였다.

“믿어 주면 고맙지만.”

“믿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

“그래. 그렇게 말했으니까.”

엔크리드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크게 상관 있는 건 아니니까.’

암살자만 막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

상대가 말해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후아.”

벤젠스가 숨을 참고 있었는지, 이내 큰 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엔크리드와 크랑을 보고 뭐라 말을 하려다가.

“씨.”

그렇게만 말하곤 몸을 돌렸다.

크랑의 정체가 아무래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벤젠스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걸 본 크랑이 파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소대장. 난 지금 그냥 크랑일 뿐이니까.”

“……누가 뭐래?”

쯧, 바짝 쫄았구만.

엔크리드는 벤젠스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저러면서도 꾸준히 자신한테 시비를 걸어 오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또 렘을 보면 입을 싹 닫기도 한다.

다른 분대원에게도 딱히 시비를 걸진 않고.

‘그러고 보면, 왜 나한테만 그러는지 궁금하긴 하네.’

벤젠스를 일별하며 엔크리드는 시간을 죽였다.

똑같은 하루가 흐른다.

“잘 자라, 엔크리드.”

“너도.”

“크흠.”

벤젠스 소대장은 아무래도 후환이 두려웠는지 매일 하는 저녁 인사를 생략했다.

거, 사람 허전하게.

곧 배속된 불침번이 천막 앞에 선다.

엔크리드는 자지 않았다.

원하면 금세 잠들 수 있지만, 필요하다면 하루쯤 밤을 새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용병으로 활동할 때 그를 구해 준 건 검술보다는 체력과 잔머리였다.

시간이 흐른다.

밤이 깊어지고.

불침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벤젠스가 옆에서 고로롱 코를 골았고.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잊었다.

‘이대로 누워 있다가는 졸겠는데?’

일어나서 오줌이나 싸러 가 볼까 싶은 순간이었다.

따끔.

목 언저리가 따끔했다.

벌레한테 물렸나 싶어서 손으로 목을 쓸었다.

그러자 틱- 하고 손에 걸리는 게 있었다.

‘침? 독침?’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뽑았다.

나무로 만든 얇은 침이었다.

‘아니, 이건 예상 외인데?’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찔린 부위부터 둔한 통증이 일기 시작하더니, 곧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목과 몸을 잘라서 가져간 그런 기분이었다.

분명 있지만, 감각으로는 목 아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곧 현기증이 일어나며 머리가 핑 돌았다.

‘독침이라니.’

당했다.

‘어떻게’의 답이었다.

아무리 사람이 둔하다고 해도, 아무리 자고 있었다고 해도.

어떻게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뚫리는데 그걸 모를 수가 있을까.

답은 여기에 있었다.

지독한 마비독이었다.

엔크리드는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려 했다.

이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으므로.

흐릿한 그림자 따위가 보였다.

체형이 작았다.

특이 체질이 아니라면 성인 남성은 아니었다.

여자 또는 아이.

그런 체형으로 보였다.

그림자가 다가와서 팔을 휘둘렀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찬미가가 들린다.

새로운 오늘의 시작이다.

정확히는 세 번째 오늘이었다.

“빌어먹을 농땡이를 피우는 건가? 아침은 왜 안 가져다줘?”

똑같다. 아침에 오지 않은 병사를 두고 불평하는 벤젠스 소대장이었다.

오늘은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기에.

“제가 나가 보죠.”

상대할 것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일단 병사를 데려오는 것부터.

새로 시작해 보자.

솔직히 말하자면 독침이 어디서 날아왔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누워 있지 않고 대비를 하는 거다.

지금 필요한 건 적절한 핑계다.

밤중에도 깨어 있고 일어나 있을 핑계.

이곳은 후방이라고 해도 전장.

깨어 있을 핑계야 차고도 넘쳤다.

‘다시 해 보자고, 암살자 씨.’

엔크리드는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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