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6화 (16/170)

16. 실력 부족

세 번째 오늘.

악력 훈련, 전투 복기는 그대로 했다.

엔크리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똑같은 하루,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내가 눈치 못 챘던 거지.’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

크랑은 아침을 걸렀고 점심 이후에야 돌아왔다.

의무 막사 병사도 자리를 오래 비웠다.

본래라면 항상 막사를 지키는 게 일이었던 병사다.

그 외에는 같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의무 막사에 환자가 몇 있는 것도 비슷했다.

엔크리드는 막사 앞에 앉아서 주변을 오가는 병사를 관찰했다.

아무래도 이쪽은 후방인지라, 전투 병력이 전방에 비해 적긴 했다.

사람이 끄는 짐수레 중 하나의 바퀴가 부러져 수레가 옆으로 기우뚱 무너졌다.

여기저기서 병자의 신음이 들렸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덕에 불평을 토하는 병사가 있다.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대단한 경계 태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암살자 몇 놈을 놓칠 수준은 아니지.’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암살자와 맞서며 소란을 피우면 끝이다. 마음가짐을 다잡는다.

나머지는 평소와 똑같이 보냈다.

“그거 안 지겨워?”

크랑의 일상적인 질문이 있었고.

“돌아가면 두고 보자, 이 자식들.”

벤젠스의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 있었다.

밤이 깊었다.

엔크리드는 잠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침상에 궁둥이를 반쯤 걸치고 앉았다.

그는 앉은 채로 자신이 아는 정보를 되새겼다.

암살자가 오는 시간은.

‘세 번째 불침번이 교대한 후.’

사용하는 무기는 독침과 칼날.

여자 또는 아이처럼 보이는 체형.

의심되는 용의자는 새로 부임한 중대장.

노리는 건 아마도 크랑.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란만 피우면 되는 일인데.

교대하는 불침번을 보며 엔크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으, 오줌?”

경계를 서던 병사가 하품하며 물었다.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내일이면 본대 복귀라면서요?”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슬쩍 웃음을 보인다. 주근깨와 축 처진 눈, 순한 인상의 병사였다.

엔크리드는 분대장 지위니, 일반병보다 직급이 높긴 했다.

“그렇지.”

“긴장돼서 잠이 안 오는 겁니까?”

“아니, 달이 밝아서.”

엔크리드의 말에 주근깨 병사가 머리 위로 고개를 들었다.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구름이 달빛을 야무지게 가린 밤하늘이다.

저 멀리 밝게 빛나는 별이 반짝거리긴 하지만,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횃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달이요?”

“농담이다.”

엔크리드는 말하며 옆 막사 불침번을 슬쩍 봤다.

아무리 군기를 다잡아도 저런 병사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슬쩍 천막 기둥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조는 불침번이 보였다.

“하하.”

주근깨 병사가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횃불이 밝아서 못 자겠어.”

“예민하시군요.”

“어릴 때부터 그런 편이었지.”

빈말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보통 사람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잘 듣고 잘 맡고 맛도 잘 분간했다.

오감이 예리했다.

‘그런데 벌써 두 번이나 눈치도 못 채고 당했다 이거지.’

어지간히 은신에 재주가 있는 상대였다.

하긴 암살자가 은신과 잠입에 자신이 없다면 뭐에 자신이 있겠나.

어둡다. 밤하늘의 별과 횃대에 타오르는 불빛을 보며 엔크리드는 시답잖은 말을 몇 마디 더 건넸다.

고향은 어디고, 어쩌다 군대에 들어왔는지에 관한 그런 이야기.

주근깨 병사는 거리낄 것도 없이 제 얘기를 줄줄이 했다.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엔크리드는 말하면서도 뒤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목 언저리를 자꾸 손으로 만졌다.

‘목에 맞았기 때문에 독이 바로 효과를 보인 거다.’

목이 아니라 팔뚝에 맞았다면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을 거다.

대비다.

깨어 있다면 소리 지를 여유 정도는 충분히…….

“로라가 절 기다린다고 했…….”

주근깨 병사는 한창 고향에 있는 여자 친구에 관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순간 푹- 하고 뭔가가 주근깨 병사의 목을 뚫고 나왔다.

‘칼날!’

목 앞으로 손가락 길이만큼이나 칼날이 튀어나왔다.

피가 왈칵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저 칼을 뽑기 전에는 저게 곧 출혈을 막는 도구가 될 테니.

주근깨 병사가 옆으로 휘청하더니 어느샌가 입이 틀어막힌 채로 소리 없이 무너진다.

핑- 그리고 무언가가 엔크리드를 향해 날아왔다.

그 모든 동작이 한 호흡이었다.

엔크리드도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목을 손으로 감쌌다. 픽 하고 손등 위로 독침이 꽂혔다.

이제 고함을 지를 차례였다.

여기 암살자가 있다!

습격이다!

라든지.

하다못해.

아아아아아아!

이런 의미 없는 고함이면 충분했다.

그랬는데.

텁.

뭔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도 없고 경고도 없다.

엔크리드는 누군가 자신의 목뼈를 잡고 비트는 걸 느꼈다.

우두둑.

이후 목 뒤로 화끈한 통증과 함께 칼날이 쑥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하도 쑤심을 많이 당해 봤더니, 이제는 들어오는 칼날의 깊이와 부상의 정도까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엔크리드는 찔린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뜨끈한 피가 목덜미부터 흘러서 가슴까지 적셨다.

상대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

엔크리드에게는 그쪽 상황까지 확인할 여력이 없었다.

‘크랑은? 벤젠스 소대장은?’

왈칵왈칵 생명력과 같은 피를 쏟아 내면서 엔크리드는 제 앞에 널브러진 둘을 확인했다.

하나는 주근깨 병사였다.

목이 뚫려 죽었다.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며 천막 바닥을 적셨다.

‘저 친구 이름이 뭐였지?’

별 얘기를 다 했는데 하나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천막 입구 안쪽, 벤젠스 소대장도 보였다.

이쪽도 목이 졸렸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크랑은 보이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고개를 들어 천막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움직이자, 꽂힌 칼이 흔들리며 끔찍한 통증이 따라왔다.

“끄으허륵.”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몸을 세워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자가 보였다.

찢어진 천막 뒤쪽, 그 앞을 막은 요정족 여자가 보였다.

‘역시 너였냐.’

새로 부임한 중대장이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없어도 이걸 못 알아볼 순 없었다.

“벌써 빼…….”

거기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섞인다.

여기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다시 시작된 오늘.

‘염병.’

피식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상대는 암살자.

야수의 심장이고 발렌 식 용병검이고 뭐고 간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마주하고 싸워야 뭘 해도 할 거 아닌가.

근데 일언반구 말도 없이 대뜸 목을 찌르고 독침부터 날린다.

팍 하고 모포를 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침부터 미쳐 버린 거냐?”

날아간 모포를 반쯤 머리에 뒤집어쓴 벤젠스 소대장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오냐, 죽어 보자. 이거 하극상이지?”

엔크리드는 절뚝이며 일어나는 벤젠스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 도망가냐? 이 새끼가? 너 잡히면 뒈진다!”

벤젠스의 외침 뒤로.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일어난 크랑의 목소리까지.

다시 같은 하루의 반복이다.

‘한번 해 보자고, 암살자 씨.’

엔크리드는 네 번째 밤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단검 몇 자루도 챙겼다.

그와 함께 주근깨 병사를 꼬드겨 막사 안으로 들어오게도 했다.

“지킬 사람이 여기 다 있잖아?”

설득은 쉬웠다. 이 순박한 시골 청년은 엔크리드의 말에 홀라당 넘어왔다.

횃대 하나를 안쪽으로 가져와서 꽂았다.

막사 안이 확 밝아졌다.

‘자, 암살자 여러분. 이렇게 밝은 데서도 작업이 가능할까?’

가능했다.

언제 숨어들었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가까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천막 위에서 뚝 하고 암살자가 떨어졌고.

떨어진 그림자는 주근깨와 엔크리드의 목에 독침을 꽂았다.

죽기 직전, 엔크리드는 천막이 서걱 하고 잘리는 걸 봤다.

하얀 칼날.

너머의 검은 인영.

안쪽에 가져다준 횃대 덕분에 불빛이 일며 상대의 얼굴을 비춘다.

새로 부임한 중대장이다.

“사이프러스! 사이프러스!”

다섯 번째 오늘이 밝았다.

“오냐.”

알면서도 당했다. 네 번째였다.

오기가 생겼다.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시도하되, 이번에는 정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쪽 막사의 침대는 밑을 띄워 둔 형태였는데.

거기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짧은 화살을 던졌다. 던지는 종류의 화살 암기다.

화살촉에는 독이 발려 있었다.

맹독이었다.

칼에 찔려 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극통이 찾아왔다.

심장을 개미가 물어뜯어 먹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며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고로 뭘 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여섯 번째 오늘도 비슷했다.

간간이 조금씩 변화는 있었다.

죽기 직전, 암살자 무리가 뭐라 말하는 걸 들었다.

“너, 호…….”

“네가…….”

“이건 경…….”

“공정…….”

물론 그걸 들었다고 변하는 건 없다.

뭘 당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잘해야 단어 몇 마디가 전부인데.

어찌어찌 머리를 굴려 이어 보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김에 엔크리드는 이런저런 시도를 다 해 봤다.

포기를 모르는 건 장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라는 건 고금의 진리이니까.

끝없는 도전이 반드시 답은 아니라는 거다.

다행히도 엔크리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스무 번의 실패.

‘소리 지르는 것도 무리.’

암살자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거다.

한 번은 아예 상대가 뭘 시도하기도 전에 습격이라고 외쳐 보기도 했다.

주변 막사의 병사가 엔크리드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크랑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것도 봤다.

대충 세 번째 불침번이 온 이후니까. 타이밍에 맞춰 시도한 선제공격이라 할 수 있었는데.

“습격? 어디?”

결과적으로 옆 소대장한테 정강이만 까였다.

먼저 소리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오늘을 그냥 넘기게 되는 걸까?

그럼 정강이를 까인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소란이 끝나고 엔크리드가 개꿈을 꾼 거로 대강 핑계를 댄 이후.

“어떻게 알았지?”

엔크리드는 처음으로 암살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쇳소리가 섞인 남자였다.

그리고 죽었다.

목에 칼날이 꽂혀서.

이런 시도가 있었다면 다른 시도도 있었다.

“벤젠스 소대장님. 혹시 저 때문에 약 오르십니까?”

“뭐, 시발?”

“제가 아니라 크랑 때문이죠? 크랑이 자꾸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엔크리드는 가벼운 얘기로 둘의 정신을 환기하고 경고했다.

“암살자가 올 겁니다. 오늘 밤.”

“……곱게 미쳐라. 또라이 새끼야.”

벤젠스는 믿지 않았다.

“출생의 비밀이 있어? 너? 암살자가 왜 와?”

크랑도 믿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한 인간들이었다.

실패였다.

시도는 다양했으나 실패 원인은 비슷했다.

‘실력 부족.’

한 가지 이유로 귀결할 수 있었으니까.

암살자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수의 심장도, 발렌 식 용병검도.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밤중에 렘을 데려와?’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렘이라면 혹은 다른 분대원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왕눈이만 아니면.’

안 당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데려와?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일개 분대장이고 그들은 일개 병사다.

실력을 떠나서 지위가 그렇다.

의무소대를 책임지는 소대장에게 말해 본다면?

‘퍽이나 들어주겠다.’

핑계는 뭐라고 대고?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분대원을 데려오는 건 무리였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있었다.

같은 오늘의 반복.

엔크리드는 왕눈이를 보는 시간과 장소를 안다.

‘조언을 구해 볼까.’

자신의 분대원들은 전부 재주가 살벌하게 뛰어나다.

‘데려오는 건 아니더라도.’

의견은 들어 볼 수 있겠지.

오기로 버티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다.

엔크리드는 왕눈이를 만나기 위해 궁둥이를 뗐다.

“어디 가냐?”

뒤에서 벤젠스 소대장이 물었다.

크랑도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고.

엔크리드까지 나가니 물은 듯했다.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외로움 타십니까?”

“뭐, 시발?”

“아니면 말고.”

“야, 너, 이, 씹.”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 걷는다.

“너 내가 나으면 두고 보자!”

막사 안에서 벤젠스 소대장이 외쳤다. 엔크리드는 귀를 후볐다.

왕눈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표정이 더럽게 안 좋긴 한데.

왕눈이 표정이 뭐가 중요할까.

이쪽은 상대 얼굴도 못 보고 스무 번이나 오늘을 반복하고 있다.

“왕눈아.”

어딜 가는지 바삐 걷던 왕눈이가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가 엔크리드를 발견했다.

“분대장님? 이제 멀쩡하시네?”

“잠깐 얘기 좀 할까?”

“아, 제가 좀 바빠서. 그, 말 상대가 필요하면 저기, 작센 있습니다.”

왕눈이는 진짜 바쁜지, 엄지를 들어 뒤쪽을 가리키고는 발을 재게 놀려 걸어갔다.

붙잡을 틈도 없었다. 어차피 왕눈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분대원을 불러오라 시킬 참이었다.

엔크리드는 왕눈이가 손가락으로 알려 준 천막으로 향했다.

대형 천막이 아니라 작은 천막이었다.

보급 물품 중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정비 막사다. 고장 난 물자를 모아 둔 천막이니,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 정비 막사 사이에 있는 작은 천막이었다.

사람 둘이나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은데.

“분대장님?”

거기에 작센이 있었다.

적갈색 머리칼에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눈.

무난한 미소를 보이는 분대원.

그리고 렘의 평가에 따르자면.

제일 뒤가 구린 놈.

상대와 맞상대하는 것보다 빈틈을 후비고 찌르는 걸 즐기는 변태 새끼.

라는 말도 했었다.

긁적.

엔크리드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아무래도 곤란한 시간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시간 있어?”

작센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 천막 사이에서 꼬불꼬불한 노란 머리칼의 여자가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가 쏙 들어갔다.

“볼일은 다 끝나서.”

작센이 단추를 다 풀어헤친 셔츠를 어깨 어림에 걸치며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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