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살았네?
밤이 됐을 때, 암살자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했다.
별 의미는 없었다.
소리나 기척 따위가 느껴지는 일은 없었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하자.’
고민 따윈 없다. 수련법이 정해졌다면 소가 밭을 가는 가듯 그냥 하면 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독침이 날아오기 전, 분명 암살자는 천막에 들어온다.
그 기척을 듣는 거다.
매일 누워서 잠이 들면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밤 쪽 수련만 반복하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면 좋다.
낮에는 작센을 찾았다.
청각 단련을 배운 바로 다음 날의 오늘.
엔크리드는 천막 앞에서 수수하게 기다려야 했다.
평소보다 너무 일찍 온 탓이었다.
안에서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기에 더 가까이 가진 않았다.
무슨 밀어를 속삭이는지는 몰라도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다린 뒤, 작센을 만나고.
“같이 좀 걷지.”
그리 걸으며 말을 나눈다. 같은 질문, 같은 태도.
엔크리드는 매번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크랑이 했던 경청의 태도를 보였다.
잘 듣는 건, 잘 배우는 것과 연관이 깊었다.
일단 잘 듣고 이해해야 다음이 있는 법이니까.
깨닫지는 못했어도 본능적으로 듣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엔크리드의 잘 들었다.
그런 면에서 경청의 태도는 더없이 훌륭한 도구였다.
작센은 번번이 같은 말을 반복했고.
엔크리드는 가끔은 천재를 흉내 내야 했다.
“머리 뒤에 눈을 단다는 거, 듣는다는 거지? 귀로 들으면 된다는 거?”
“……딱히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군요.”
“소리에도 방향은 있구나. 앞과 뒤, 좌우를 구분할 수 있을 테니까. 들려오는 소리와 세기를 통해서 맞지?”
“천재였나?”
“뭐라고?”
“아닙니다. 생각보다 영특하시군요.”
“왜 내가 멍청이로 보였어?”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죽는다. 다시 반복된 오늘.
벤젠스 소대장의 불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 아침 안 줘? 이 새끼 빠져서 어디 간 거냐?”
“네, 배고프면 짜증이 나기 마련이죠.”
“뭐?”
“우리 소대장님 그만 징징거리시게 아침 찾으러 갑니다.”
“……너 미쳤냐?”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해도 큰 의미가 없으니까 놀리면서 시작해 봤다.
주변에 흘러가는 이들을 눈에 담고.
흘러가는 일 중 일부를 지표로 삼아 반복되는 오늘을 조금씩 다르게 보낸다.
엔크리드는 반은 장난으로 아침을 넘긴 뒤, 하루를 반복했다.
다섯 번, 열 번.
그리 반복하다 보니 천막에서 작센을 꺼내는 것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뻘쭘하기도 했지만, 둘이 나누는 밀어를 우연히 들은 뒤로는 거침이 없었다.
오늘은 어디가 좋았고.
저번에는 어디가 좋았으며.
어떤 자세를 선호한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반복된 오늘에서 엔크리드는 천막을 거침없이 젖혔다.
“작센 시간 있지?”
“……뭡니까?”
“더 할 거면 비켜 주고.”
“하고 싶어도 흥이 깨지게 하는군요.”
“그럼 나와.”
옆에 있던 여자가 황당한 눈으로 ‘이 새끼는 뭐지’라는 눈빛을 쏘아 낸다.
처음에는 난감하기도 했지만, 익숙해지니 뻔뻔해졌다.
무시했다는 거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도 작센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엔크리드가 왜 이러나 궁금해할 뿐이었다.
그의 호기심도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게 궁금해?”
“아니요. 됐습니다.”
수련도 그렇다. 어느 정도 소리를 듣는 게 익숙해지니, 작센이 의문을 표했다.
“……이런 거 배운 적 있습니까?”
“어릴 때 조부께 조금.”
엔크리드는 전쟁고아다.
조부는커녕 부모도 몰랐다.
“그렇군요.”
이런 되지도 않은 핑계에도 작센은 그냥 넘어갔다.
엔크리드는 하루를 항상 값지게 보냈다.
찌르기를 훈련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일이었다면, 이번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일이었다.
성과는 있었다.
엔크리드는 더디지만, 착실한 걸음을 이어 나갔다.
‘배운 대로 하자.’
한 걸음씩 갈 수 없다면 반걸음씩.
반걸음도 안 된다면 반의반 걸음씩.
그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면 발가락을 꿈틀거리는 것부터.
같은 오늘을 반복하는 게 스무 번쯤 지났을 무렵.
‘들린다.’
바람이 깃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고.
끼리리릭.
마차 바퀴에서 나는 껄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맞물리는 톱니가 망가진 태엽 같다.
‘부서지는 소리다.’
소리에도 종류가 있다.
어떤 소리는 말하듯 정보를 전해 준다.
가령 깃발을 통해 들리는 소리가 그렇다.
“서풍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쉽습니다. 지금 제가 앉은 쪽을 확인하고 북쪽을 찾은 뒤,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의 방향을 쫓으면 됩니다.”
말이야 쉽지. 이걸 단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반복 또 반복.
언제가 그래 왔듯이, 하루와 하루를 쪼개며 사는 것임에도 변하지 않는 마음가짐.
모든 것이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다.
‘깃이 흔들리는 소리를 따라.’
자신이 앉은 위치에 따라.
바람의 방향을 알아낼 수 있다. 딱히 실생활이나 전장에 통용될 건 아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야 앉은 자리에서도 알 수 있는 거니까.
다만, 이걸 소리로만 알아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의사의 목소리를 구분하고.
크기를 가늠해, 거리를 잰다.
‘제대로 익히면 전장에서도 쓸 만하겠어.’
그러고 보면 작센은 언제나 한발 앞서 위험한 전장은 피했다.
미리 듣고 판단하고 움직인 걸까?
그렇게도 할 수 있나?
지금 당장은 모를 일이다.
소리를 분간하는 게 이 훈련의 첫 번째였고.
두 번째는 듣는 거로 거리를 재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이제 막 이 두 가지를 마친 셈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작디작은 소리를 구분해서 듣는 것.
제일 좋은 훈련은 암살자의 기척을 듣는 거라고 했던가.
‘우습지만.’
최고의 환경이었다.
뭔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죽는 건 정말, 생각보다 너무 불쾌했다.
어떤 반항도 없이 훅 가는 그 상황 자체가 최악이다.
그래도.
‘이건 기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괜히 주근깨 불침번과 엮이면 번번이 이 친구가 죽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일단은 듣는 것부터.
그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낮에는 수레 구르는 소리, 나무못이 깨져 흔들리는 소리, 반대로 멀쩡한 수레 소리 따위를 듣고.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천막,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분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고되고 괴로울 수 있었지만.
‘재밌어.’
엔크리드에게는 달랐다.
그에게는 소소한 성장조차도 기쁨이었다.
야수의 심장을 배울 때처럼 몸을 굴리는 건 아니었지만.
심력 소모가 극심했다.
너무 집중하면 머리통이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서른 번쯤 반복하니, 금세 괜찮아졌다.
조금이지만,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산다.
엔크리드는 그게 몸서리칠 만큼 좋았다.
그렇게 쉰여섯 번째의 밤.
슥.
횃대에서 타오르는 횃불 소리.
밤을 지키는 병사가 졸다가 놀라 창대로 바닥을 찍는 소리.
주근깨 가득한 의무 막사 불침번이 가끔 천막 안을 들추는 소리.
그 소리 사이로 작디작은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휙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
‘들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 엔크리드의 귀가 미약한 차이를 구분해 냈고.
들리는 순간, 엔크리드는 서슴없이 옆으로 굴렀다.
‘피했어.’
처음 계획은 피한 뒤에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히육.
등 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품에 숨겼던 단검을 꺼낼 틈도 없었다.
다시 앞으로 굴렀다.
시익, 수윽, 쉭.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소음이 계속해서 들린다.
소리로 방향을 구분함으로 엔크리드는 가까스로, 정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칼날 끝이 허벅지 어림을 스치기도 했다.
‘이건 운이 좋았다.’
잘못했으면 허벅지가 베였을 거다. 생채기도 위험한 상대였다.
독침을 쓰는 놈이 칼날에 아무것도 안 발랐을까.
거듭 구르고 몸을 튕기며 피한다.
야수의 심장이 빛을 발한다.
거듭 위험한 순간이 계속됨에도.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흥분할 필요가 없으니.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뿐이라면.
‘괜찮아. 할 만해.’
반격을 포기하면 피할 수 있다.
칼날이 등을 노리며 길게 세로로 그어진다.
상대의 의도는 명확했다.
스치기라도 하라는 거다.
엔크리드는 이 소란에도 꿈나라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벤젠스의 침상 쪽으로 굴렀다.
구르며 어깨로 침상을 밀쳤다.
퍽.
어깨 근육에 묵직한 충격이 돌아온다.
통증을 참아 내면서 힘껏 들이받았는데도 벤젠스 소대장은 깨지 않았다.
‘독침.’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비 또는 수면에 관련한 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한 놈.”
이번에는 어지간히 급했는지 암살자가 중얼거리며 툭 하고 땅을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엔크리드는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라, 숨을 몰아쉬었다.
암살자는 상대의 숨이 헐떡이는 걸 느끼곤 오른손에 든 나이프를 찌르며 왼손에 든 독침을 던졌다.
필살의 한 수에 가까웠다.
엔크리드는 가뿐 호흡과는 별개로 잽싸게 대응했다.
나이프는 피하고 독침은 벤젠스 소대장의 팔을 들어서 방패로 삼아 막았다.
픽 하고 독침이 벤젠스의 팔뚝에 박혔다.
막힌 걸 보고 암살자가 주춤하는 사이, 엔크리드는 그대로 천막 입구 쪽으로 몸을 굴렸다.
숨이 가빠 보이는 건 속임수였다.
‘이게 바로 발렌 식 용병검, 속임숨이다.’
싸움을 쉽게 끝낼 기회를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틈을 노리는 수작이었다.
보기 좋게 먹힌 한 수다.
구르던 엔크리드가 몸의 탄력을 이용해 반쯤 일어나 천막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처럼 굴었다.
암살자가 훅 몸을 날렸다.
그 또한 속임수였다.
엔크리드는 입구 대신 벽으로 향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며 천막 벽을 그으려 했다.
찢고 뛰쳐나가면 이기는 싸움, 그렇게 생각하는데.
부우욱.
그보다 먼저 천막 벽이 찢어졌다.
잘린 천막 벽 너머.
“좀 늦었군.”
목소리와 함께 녹색으로 빛나는 눈이 보였다.
요정 중대장이었다. 암살의 주범.
반사적으로 찌르기를 시도했다.
손에 든 건 단검이지만, 수없이 반복한 기술이기에 몸에 익었다.
왼발을 축으로 몸을 틀며 단숨에 상대를 향해 찌른다.
오른팔이 투창처럼 뻗어나간다.
요정족 중대장은 눈을 빛내며 안으로 들어서더니 오른손을 안에서 밖으로 휘둘렀다.
턱, 휙.
그 손짓에 찌르기의 궤도가 틀어진다. 동시에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발 축을 걷어찼다.
세상이 빙글 돌며 엔크리드는 곧 땅을 굴렀다.
그 뒤 요정족 중대장은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티디딕.
엔크리드는 외면하고 제 망토를 당기더니 펄럭하고 앞을 막았다.
투두둑 하고 망토 위로 뭔가 박혔다.
독침이었다.
“괜찮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보고 있자니, 천막 밖에서 엎드린 크랑이 보였다.
“호위가 있었나?”
암살자의 목소리에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암살질이라니 구토가 쏠리는군.”
요정족 중대장이 망토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엔크리드의 머리는 상황을 이해하기 바빴다.
‘암살자가 아니라?’
지키는 쪽이었나?
그럼 죽을 때 본 건, 자신을 죽인 쪽이 아니라 그냥 늦게 도착한 거였고?
“다친 것 같진 않은데?”
“놀라서.”
엔크리드는 크랑의 질문에 답하고 몸을 돌렸다.
암살자는 요정족 중대장을 보자마자 내뺄 궁리를 했는지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려 있었다.
중대장은 굳이 그걸 잡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곧 암살자는 뒤로 슬금슬금 발을 빼더니 천막 입구를 박차고 나가서 도주했다.
뛰면서도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이거 참.”
크랑이 쑥스럽게 웃으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중대장은 천막 앞까지 다가가더니, 기절한 거로 보이는 주근깨 병사의 어깨를 잡고 발을 질질 끌어 천막 안에 던지듯 놓고는.
벤젠스 소대장을 힐끗 본 뒤 돌아섰다.
녹색의 눈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짧은 침묵.
잠시 뒤, 고개를 갸웃한 중대장이 입을 열었다.
“살았네?”
그 질문에는 놀람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