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임의 보직 변경
4소대장은 시답잖은 말을 던졌고.
엔크리드는 대충 답하고 흘려들으며 이 작자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할 말 있으시면 편하게 하시죠.”
땀에 푹 절었다가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는 중이다.
지금이 딱 좋았다. 적당한 탈력감과 함께 바람을 즐기는 순간이니.
그러니 어서 할 말 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찰대로 편입해서 임무를 수행해 줬으면 하는데.”
4소대장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 지휘관의 단호함이 아닌 방어적인 태도가 엿보였다.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정찰대라.
흔한 차출은 아니다. 하물며 자신의 위치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걸 엔크리드 자신도 안다.
분대장급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444분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을 정찰대로 뺀다고?
“괜찮겠수? 우리 분대장 데려가도?”
뒤에서 불쑥 렘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렘이 엔크리드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신장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그럭저럭 편하게 기대는 자세가 나왔다.
“그거 진심이우?”
반쯤 웃으며 묻는 건데, 데려가지 말라고 시위하는 것 같다.
“명령이다. 렘.”
4소대장이 눈을 부라렸다. 허세다. 엔크리드는 한눈에 알아봤다.
렘은 사고뭉치다. 수틀리면 도끼를 휘두르는 망나니다.
그런 망나니를 상대로 지휘관의 권위를 들먹여 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그건 4소대장도 알고 엔크리드도 알고 렘도 안다.
“렘.”
엔크리드는 이 도끼질 좋아하는 분대원이 뭐라고 더 입을 열기 전에 제지하는 의미로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털어 렘을 뒤로 밀어냈다.
“아니, 뭐, 마음대로 하시든가.”
렘이 툴툴대며 뒤로 빠졌다.
“내가 대신 가도 됩니다.”
라그나가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미아가 장래 희망이었냐?”
그걸 들은 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라그나는 발끈하려다 꾹 화를 눌러 참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그나는 길을 찾는 일에 재주가 없다.
아니, 지도를 손에 쥐여 주고 설명해 줘도 다른 곳에 도착하는 놈이다.
그렇다고 옆 사람과 손발을 잘 맞추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분대에서도 명령을 무시하며 제멋대로 싸워서 결국 여기에 온 거 아닌가.
정찰병으로 뽑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다 되도 넌 안 되지.”
4소대장도 라그나한테는 고개를 가로저을 도리밖에 없다.
엔크리드는 이 상황 자체가 안 좋은 신호로 들리긴 했으나.
‘이것저것 따져 보면 내가 적격이긴 한데.’
자신의 애매한 위치는 444분대원 사이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딱 일주일 자리를 비운 거로 소란도 꽤 일었고.
그런데도 자신을 콕 집어 부른다?
그만큼 부를 사람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저주라고 떠들던 말은 금세 쏙 들어갔으나.
그게 준 여파는 남았다.
보, 잭, 로튼 셋 다 전부 정찰대 소속이었으니까.
머릿수가 부족한 거다.
“휴, 나도 골치 아프다. 소대장 하나가 배탈이 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
정말 저주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하필 정찰소대에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소대장은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굳이 엔크리드를 부르고 싶은 기색도 아니었다.
‘묘하게 위화감이 드네.’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쳐다보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다 말할 테니까.”
“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내가 뭘?’
그냥 쳐다봤는데 4소대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과잉 반응하는 거다.
“거, 눈으로 그런 욕을 하면 어쩌자는 거유? 가끔이지만, 당하는 사람 기분도 생각해야지. 그것도 상관한테.”
렘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저 농담에 반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에 다시 소대장을 보니.
“임의로 정찰대 인원을 늘리기 위해 분대장 하나를 소대장으로 임의 진급시켰는데, 아무래도 숫자가 부족하지 않나. 그래서 급한 김에 각 부대에서 정찰 임무 수행이 가능한 인물을 차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너를 포함하는 게 어떻겠냐고 윗선에서 말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고.”
“윗선입니까?”
“새로 온 중대장. 뭐 찍힌 건 아니지?”
비밀을 알고 있으니, 정찰대로 보내 소리소문없이 죽여서 입을 막겠다?
아니, 그럴 거면 굳이 이럴 이유가 있나?
없다. 몰래 죽여도 될 만한 재주도 있어 보였고.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많으니까.
그렇다고 쉽게 죽어 줄 건 아니지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별생각 없이 말한 것 같은데.’
엔크리드는 그렇게 판단했다.
“윗선의 명령이다. 그러니까 좀 가자.”
옆에서는 렘이 눈을 부라리고.
그 뒤에서는 라그나가 자신이 가겠다고 한다.
막사 바로 앞에서는 일반 병사보다 훌쩍 머리 하나는 큰, 곰도 맨손으로 두들겨 팰 것 같은 분대원이 하늘을 보며 신에게 기도하는 중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여, 저의 작고 소중한 분대장을 빼앗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 작고 가냘픈 종에게 시험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그걸 들은 4소대장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누가 뺏어간다는 거냐고.
그리고 누가 작고 가냘픈 거냐.
기도하는 병사의 팔뚝 근육이 불끈불끈 움직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팔뚝이 어지간한 병사의 허벅지만 했다.
키도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저 병사의 팔뚝은 그 자체로 무기다.
그러므로 저 독실한 병사가 가냘픈 거라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참 드물 것이다.
“이번 한 번이면 될 거야. 곧 겨울이 될 거고 그럼 이번 출정도 끝날 테니까.”
차기 출정 때는 어차피 정찰대 편성을 다시 할 것이다.
그때 444분대장을 정찰대에 두진 않을 테니까.
엔크리드는 소대장의 말을 이해했다.
겨울에 전쟁을 이어가는 바보는 별로 없다.
고로 이번 전쟁도 가을이 지나면 멈출 가능성이 컸다.
굳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자주 있는 종류의 일이다.
이런저런 일에 땜빵으로 불려 가는 건.
싸우는 재능이야 부족하지만, 다른 일은 또 중간 이상은 한다.
정찰 임무도 마찬가지고.
다만, 이번에 부상으로 막사를 비운 것 때문인지, 제 분대원이 하나같이 자신을 떠나는 걸 반기지 않았다.
‘내가 딱 적임이긴 한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죽는다면 하루를 반복할 수 있다.
이번 임무는 그 어떤 누구보다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다.
위험을 인지하고 피하는 건 그의 장기이기도 했고.
“명령이다. 사 분대장.”
소대장이 명령이라고 하는데 어째 구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엔크리드는 뒤를 돌아봤다.
렘이 도끼를 갈기 시작했고.
라그나는 자기가 가도 된다는 의견을 다시 피력했다.
마지막 분대원은 결국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까? 라고 거듭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참.’
어디서 한 대 맞고 오면 이들이 다 같이 들고일어날 것 같았다.
원래 이랬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처음에 분대에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서로 관여하던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내가 없을 때 많이 힘들었던 거냐?’
왕눈이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렇다고 해서 상부 명령을 어쩌겠나.
제 분대원들이야 막 나가는 놈들이라고 해도 엔크리드는 아니었다.
“갔다 와야겠는데.”
후 하고 숨을 한번 내쉬고 한 말이다.
윗선에서 내린 결정이다. 애초에 항명은 불가다.
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야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엔크리드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정리된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감투뿐이라도 그가 이 여섯뿐인 분대의 대장이다.
“맘대로 하슈.”
렘이 흥하고 콧바람을 불더니, 답했다.
“거, 내가 가도 된다니까.”
라그나는 끝까지 우겼지만, 그게 먹힐 일은 없었다.
진지 안에서도 길을 잃는 놈이 정찰병이라니 그게 되겠냐?
엔크리드는 라그나가 어떻게 방랑 생활을 했는지 그게 더 신기했다.
동쪽 끝 바다까지 다녀왔다고 했던가?
길을 잃어서 거기까지 간 건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걸 물을 일은 없었다.
엔크리드는 항상 그랬듯, 이들과 적당히 거리를 뒀다.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게 분대장 엔크리드다.
“그래, 좋다.”
4소대장이 말하고 돌아섰다.
올 때보다 배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어깨에 있던 짐이 내려간 듯했다.
소대장이 떠나고 씻고 쉬는 사이, 막사 내에서 사소한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배운 건 계속 연습하고 있습니까?”
침상에 반쯤 기대 누운 작센이 말을 던진 게 시작이었다.
작센의 침상은 가장 안쪽.
엔크리드는 가장 앞쪽이다.
막사 내에 모두가 작센의 목소리를 들었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센에게 청각을 단련하는 걸 배운 채로 반복된 하루를 넘겼으니, 물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들은 렘이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뭘 배워?”
그동안 엔크리드는 분대원 여럿의 손을 탔다.
렘에게도, 라그나에게도, 독실한 신도 분대원에게도 이런저런 걸 조금씩 배웠다.
하나같이 당장 전장에서 살아남는 방편 같은 거였고.
엔크리드는 열심히 배웠으나, 다 체득하진 못하고 대강대강 써먹은 편이었다.
완벽하게 배우기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그나마 이제 야수의 심장은 몸에 제대로 붙었달까.
하지만 그동안 작센에게 뭘 배운 적은 없었다.
“네가 뭘 가르쳤다고?”
누워 있다가 상체를 일으킨 렘이 물었다.
“꾸준히 하십시오. 도움 됩니다.”
완벽하게 무시당한 렘의 눈에서 불길 비슷하게 타올랐다.
“이 새끼가?”
“하지 마라.”
엔크리드가 확 불이 붙은 렘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 음흉한 놈한테 뭘 배운 거요? 거, 아무거나 배우면 안 좋은 버릇 든다니까.”
“훗.”
엔크리드와 렘의 대화를 듣던 작센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어, 그래, 음, 네가 죽을 때가 됐지. 오늘이구나. 저 평야에서 떠돌아다니는 마물의 양분이 되고 싶은 거지? 맞지?”
작센은 무시로 일관했다.
엔크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 렘의 팔을 잡아끌었다.
“적당히 해라. 다 죽고 죽이며 싸울 것도 아니고.”
“걱정 마슈. 내가 살아남을 테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누가 살아남아?”
“아, 신이시여, 믿음이 없는 어리석은 영혼을 위로 올려보내도 되나이까? 허락하신다면 그리하겠나이다.”
렘의 말에 라그나와 독실한 분대원이 반응했다.
“그만, 그만, 그만. 몇 번을 싸워도 말릴 거다. 괜한 짓 하지 말고 힘도 빼지 말자.”
엔크리드는 과연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게 맞는지 후회가 들었다.
이것들을 놔두고 가는 게 맞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래도 끝장은 잘 안 봐요. 무기 몇 번 부딪치다가 말더라고요.”
크라이스가 주머니에서 은화 개수를 세며 말했다.
그게 문제인 거다. 그 무기 몇 번이.
남들이 보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보인다는 거지.
이런 사고뭉치들임에도 지휘관은 이들을 내치진 않는다.
이유? 당연하게도 출중한 능력 덕이다.
전장에서 이들은 확실히 일당 십 이상의 우월한 전투력을 지닌 병사니까.
그러니까 정찰대로 자신이 빠지는 것도 맞다.
‘나는 전력 누수도 아닐 테니.’
하지만 이들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엔크리드는 자신의 부족함을 다시 깨닫는다.
‘난 재능이 없다.’
열두 살의 꼬마에게도 졌다.
아무리 그 아이가 천재라고 해도.
다 큰 어른이 검의 무게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이며 검을 든 아이에게 졌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다.
좌절할 일도 아니다.
그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 일일 뿐.
그렇다고 포기했던가.
아니다.
그 상황을 곱씹고 또 씹어 자신을 정확히 인지한 게 전부다.
그렇다면 이게 끝인가.
그 또한 아니다.
재능이 없다면.
‘언젠가는.’
한 걸음이 안 되면 반걸음씩.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아직 걸음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어쩐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엔크리드는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검을 좀 휘두르고 땀을 좀 흘려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그걸 본 라그나가 일어나 따라왔다.
“오랜만에 자세나 좀 보죠.”
“내가 있는데?”
렘이 뒤늦게 따라 일어나며 말한다.
둘의 눈이 마주치며 살벌한 기세가 오갔다.
눈이 마주친 중간 지점에서 소용돌이가 생길 것 같았다.
“꾸준히 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어쭙잖은 칼질보다.”
잠자리에 누운 작센이 말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보던 둘의 눈이 휙 하고 작센에게 향한다.
“어쭙잖은?”
렘이 말하고.
“칼질?”
라그나가 이어 말한다.
“둘 다, 내 자세를 봐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엔크리드가 셋 사이로 끼어들었다.
끝내 둘을 다독인 엔크리드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둘의 조언 반 잔소리 반을 토대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땀을 흠뻑 흘린 하루가 지난다.
아침 해가 밝으면 정찰소대로 잠시 소속을 변경한 채로 나가야 했다.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리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땀을 흠뻑 흘리고 나니, 다들 불쾌함이 가신 듯했고.
땀을 흘리고 개울가를 찾아 씻은 엔크리드도 개운하게 잠들었다.
* * *
“중대장님, 그 친구는 왜 굳이 정찰대에?”
요정 중대장은 1소대장이 횃대 근처에 서 있는 걸 보고 말했다.
“횃대 근처에서 물러나라. 넘어지면 불이 날 수 있으니.”
“네?”
“옆으로.”
“네.”
1소대장이 옆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중대장의 천막은 일반 천막보다 높고 넓었다. 가운데 위쪽으로 횃대 하나를 놓고 불을 밝혀 두기도 했다.
조악하지만, 회의를 위한 테이블도 있다.
회의를 통해 중대 정찰 루트를 정하는 자리였다.
그 와중에 1소대장이 물은 거였고.
물을 만도 했다.
1소대장은 중대장의 참모를 겸한다. 사이프러스 사단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눈치 빠르고 제 살길 잘 찾는 병사라면 잘 어울릴 듯해서.”
“네, 그렇군요.”
크게 무게를 둔 판단이 아니다.
직감에 의한 편성이다.
따로 이유는 없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답해야 할 일.
물론 중대장의 판단은 옳았다.
요정의 직감은 때로 예언가의 말보다 날카로운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