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23화 (23/170)

23. 누의 발자국

“평소보다 부자연스러운 소리, 그걸 듣는 겁니다.”

정찰대 출발은 동이 트기도 전인 푸른 새벽이었다.

혼자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자니,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작센이 말을 툭 내뱉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엔크리드가 되묻자.

“전장에서 칼 안 맞는 법, 물어봤잖습니까.”

엔크리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의무 막사, 암살자의 습격, 요정 중대장, 크랑, 불.

그 모든 소란을 끝내고 왔더니 사고뭉치 분대는 싸움박질 중이었다.

정신이 산만할 법도 했다.

덕분에 듣고 나서야 떠올랐다.

그 모든 일이 있기 전, 암살자와 마지막 춤을 추기 전의 마지막 하루에서 지나가는 말로 물었었다.

“잘 듣는 법은 알겠는데, 전장에서 칼 안 맞으려고 계속 집중해서 들을 순 없잖아? 뒤도 안 보고 피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청각 단련, 그래 좋다.

하지만 이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다.

전장 한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수 있을까?

‘어려워.’

해 봤기에 안다. 익숙해지면 여럿을 상대로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잘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작센은 성실했다.

지나가는 질문을 무시하지 않고 충실히 답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더 성실했다.

그는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질감을 느끼라는 거지?”

“평소와 다른 감각을 깨우면 좋겠지만, 그건 쉽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풀밭이라면 풀잎 스치는 소리를 유심히 듣다가 종류가 다른 소리를 찾는 겁니다.”

정찰 지역이 풀밭이다. 짧으면 종아리, 길면 눈높이까지 자란 풀이 가득한 곳.

그걸 알고 해 주는 말 같았다.

친절한 답변을 들으며 엔크리드는 문득 궁금해 물었다.

“꽤 자세히 말해 주네?”

작센은 그 말에 엔크리드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그 눈이 다 알면서 뭘 묻냐는 그런 말을 포함한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제야 작센이 마저 말했다.

“분대장은 지독하니까요.”

“……뭐?”

어디부터 대화의 방향이 틀어진 거냐?

갑자기 지독하다는 말이 왜 나와?

작센은 분대장의 집요함을 안다. 검에 대한 열정을 안다. 그러하기에 한 말이지만.

엔크리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더 물으려다가 엔크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가 중요한가?

사고뭉치 분대원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럼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배울 사람이 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으며.

내용이 가치가 있다면 그뿐.

당장 정찰대 소집에 끌려가는 중이니, 이걸 곱씹고 가면서 단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고로 따지지도 않고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은 무시했다.

“종류가 다른 소리를 어떻게 구분할까?”

엔크리드는 당황한 기색을 순식간에 지우고 본론으로 돌아섰다.

그걸 보는 작센의 눈빛이 묘했다.

머리가 셋 달린 용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왜?”

“아닙니다.”

설명이 이어졌다. 이질적인 소리란 무엇인가.

청각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훌륭했다. 배우는 즐거움이다. 엔크리드는 더없이 흡족한 기분으로 길을 나섰다.

“그래, 그런 식이었구나.”

작센은 여전히 묘한 눈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엔크리드는 그걸 느끼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럼 갔다 오겠다.”

그가 정찰 임무를 위해 막사 외곽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걸 보며 작센은 생각했다.

‘말이 안 되는군.’

최근 분대장이 귀를 기울이며 발소리를 듣는 걸 본 적이 있다.

꽤 먼 거리에서부터 반응했었다.

청력, 듣는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신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다만, 조금 이상할 뿐.

그가 아는 모든 훈련 방식과 같은 훈련을 받은 인간 전부를 대입해 본다.

소리를 듣고 귀를 단련한다는 건, 계속해서 다른 소리를 듣고 구분한다는 거다.

그러다 보면 소리의 종류를 파악하는 거고.

그런데 지금 분대장은 어떤가.

‘듣는 귀는 수준급인데, 구분하는 건 초보자다.’

마치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듣는 행위만 단련한 사람 같다.

하지만 그게 단련한다고 되는 건가.

여벌 목숨이 수십 개라면 저런 식으로 단련도 되겠지만.

‘묘해.’

분대장은 참 묘한 사람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자신이 아는 걸 하나라도 더 말해 준 거다.

그리고 분대장은 조금 전 배운 걸 금세 흡수할 것이다.

듣는 귀를 단련하는 게 힘든 거지.

소리를 구분하고 분류하는 건 부가적인 거니까.

그리 불침번을 끝내고 막사에 들어서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렘이 있었다.

손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웃는 낯으로 자신을 보는데, 그게 심히 불쾌했다.

“눈깔이 재수가 없는데?”

작센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렘은 부드럽게 웃다가 답했다.

“너도 이제 분대장의 매력에 빠진 거냐? 보고 있으면 막 가르쳐 주고 싶고 그러지?”

“정당한 교환이다.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상응하는 가치를 받을 거다.”

등가교환의 작센.

부대 내의 별명이다.

하지만 말하면서도 작센은 알았다.

분대장을 향한 가르침은 뭘 요구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충동적인 판단이었다.

최근 전장에서 눈에 띈 활약을 했던 게 인상에 남은 탓일까?

작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여기서 끝내면 될 뿐.

“조까, 새캬. 사내새끼가 수줍어하기는.”

렘은 낄낄대다가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모포를 당겨 턱 밑까지 덮더니 포근함에 취한 듯 곧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가끔 작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미친 야만인은 뭘 믿고 저리 나대는 걸까.

“가서 누워라. 나 잠들었다고 덤비면 머리 쪼개진다.”

잠든 척하던 렘이 말했다.

작센은 렘의 말을 무시한 채, 제자리를 찾았다.

괜히 대거리하면 말만 많아지는 상대다.

“하여간 새끼, 툭하면 대답을 안 해.”

아니나 다를까, 렘은 제가 말해 놓고 제가 투덜거렸다.

* * *

새벽 나절부터 출발한 정찰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아즈펜 새끼들 만나면 머리통을 쪼개 버린다. 알았나?”

소수 지휘를 맡은 정찰 분대장의 말이다.

순간 엔크리드는 자기도 모르게 넌 정찰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물을 뻔했으나 그보다 분대장의 말이 더 빨랐다.

“사고뭉치 분대장, 당신도 지금은 그냥 병사인 거야. 명령에 불복할 거면 지금 말해, 실력으로 얘기하자고. 뭐, 난 누구와 달리 똥구멍으로 분대장이 된 게 아니라서 자신 있거든.”

말투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화나지 않았다. 그리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평소에 이런 찬사를 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자신을 모르는 이들이 내뱉는 단순한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괜한 분란을 만드느니, 얌전히 순찰이나 돌며 배운 걸 곱씹고 돌아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니꼬워도 참아요. 좀 나대는 성격인 것 같더라고요.”

바짝 붙은 다른 병사가 말했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나이도 찬 병사였다.

“신경 안 써.”

“그럼 다행이고.”

옆에 붙은 병사가 분대장의 눈을 피해 수수하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럼 출발!”

총원 열, 정찰대이자 순찰대의 출발이다.

정찰대라고 해서 모두 적지를 염탐하는 건 아니었다.

이쪽 평야는 대륙에서 그린 펄이라 불리는 넓은 초원이다.

동쪽으로 가면 얕은 구릉을 따라 몇 개의 완만한 산등성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넓고 시야를 가리는 게 없다.

서쪽으로 가면 나우릴리아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펜-하닐 강이 흐르고, 그 강은 지금 적군인 아즈펜 공국도 공유하는 넓은 강줄기였다.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이쪽 평야 전투에서 기습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찰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적지 탐사와 주변 순찰이다.

혹시나 낮이나 밤을 틈타 이동하는 무리는 없는지.

적의 기병이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는지.

혹은 다른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게 일이다.

그 와중에 주요 지역을 확인하는 것도 포함이고.

물론 정찰대는 위험하다.

언제 적군과 조우할지 모른다.

정찰대끼리의 교전이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자주 일어나서도 안 되고.

“가자, 나우릴리아 보병의 위대함을 보여 주러.”

엔크리드가 볼 때, 저 앳된 분대장은 제 실력에 취한 머저리였다.

어디 귀족의 사생아라도 되는 건가.

그게 아니면 부대 지휘부 쪽에 믿는 구석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막 열아홉이나 스물이나 됐을까.

나우릴리아 정규군 분대장으로서는 꽤 빠른 진급이다.

그래 봤자 진짜 천재에 비하자면 저런 병사는 널리고 널렸지만.

정찰대의 역할 따위는 이미 정찰 분대장이란 놈의 머리통 속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중 병사 일부는 그 말에 동조하기도 했다.

“당연하죠. 대장님 실력이면 몇 놈쯤은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용병 다섯 놈을 때려눕힌 용력을 보여 주십쇼!”

‘분대장 꼬마 똥구멍 헐겠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됐는지는 너무도 뻔한 얘기였다.

하필 정찰대에 속한 병사의 부상이 잦아서 머릿수가 부족했을 것이고.

그 덕분에 자신도, 그리고 저 머저리들도 이곳에 오게 된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새끼들은 수준 이하 아닌가.

그래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 정찰대의 루트는 정해져 있다.

‘아군 진지를 기준으로 원을 그리며 순찰.’

세부적인 루트는 분대장의 몫이지만.

엔크리드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정찰 분대장이 심각하게 머저리 짓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누 발자국이군.”

분대장이 지나가다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누는 소를 닮은 초원을 무리 지어 달리는 동물 중 하나다.

많으면 쉰, 적으면 스무 마리씩도 이동하는 동물이다.

“이걸 쫓으면 오늘 포식하겠군. 다들 바비큐나 해 먹자고.”

……누 스무 마리를 쫓자고?

그보다 더 황당한 건, 저 발자국이 누가 아니라는 거다.

발자국은 누가 아니라 가젤의 것이었다.

“잘도.”

뒤에 붙어 있던 인상 좋은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으며 분대장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첫째 날, 정찰대는 전진하며 있지도 않은 누를 찾아 헤맸다.

당연하게도 대놓고 흉흉하게 눈을 부라리는 무리에게 잡혀 주는 짐승은 없었다.

“에이씨.”

분대장은 괜히 성질을 부렸다.

만약 누를 잡았으면 저 새끼는 정말 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을까?

그랬다면 참 볼 만했을 것이다.

몰래 움직이는 것도 부족해서 모닥불까지 피우는 정찰대라니.

‘나는 정말 완벽한 병신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나마 아무 짐승도 못 잡아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해가 떨어지기 전, 구릉과 훌쩍 큰 나무 네 그루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야영할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사고뭉치 분대장님은 어디 출신입니까?”

첫인상이 좋았던, 무엇보다도 정찰 분대를 이끄는 머저리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 병사였다.

“보더 가드.”

“직업 군인?”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더 가드는 변방을 지키는 요새 도시다.

그곳에도 농지가 있고 상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군사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훈련 시설과 직업 군인이 잔뜩 머무는 도시란 거다.

“전 산골 마을에서 왔고 사냥이라면 자신 있는 편인데, 아까 그 발자국을 보고 누라고 하는 데서 기겁했습니다. 가젤의 흔적이었는데.”

기겁한 건 엔크리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공감대가 생겼다.

사냥꾼 출신 병사의 이름은 엔리.

수더분한 성격이지만, 현재 분대장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내일은 재밌는 걸 알려 드리죠. 초원에는 딱히 길이 없는 것 같아도 짐승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거든요.”

몇 마디 더 떠들던 엔리는 금세 눈을 붙였다.

그날 세 번째 순서로 불침번을 서며 엔크리드는 작센이 가르쳐 준 걸 곱씹었다.

실제로 검을 쥐지는 않았지만,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배운 걸 되새겼다.

정찰 파견을 나가기 전, 라그나와 렘과 한 대련이 꽤 도움이 됐다.

‘어떤 자세에서도 찌르기를 넣으라고 했었지.’

렘이 한 말이다. 자신도 그걸 위해 단련 중이었다. 렘은 방법도 알려 줬다.

하체를 단련하라고 했다.

정찰대는 많이 걷는다. 기병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걷는 것도 좋아.’

다릿심을 기르기 나쁘지 않다.

육포로만 배를 채웠더니 속이 허할 법도 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그런 걸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할 훈련과 앞으로 해야 할 훈련과 검술, 작센에게 배운 청각, 엔리가 가르쳐 준다던 사냥꾼의 잡기 따위가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그는 순수하게 배우고 익히는 걸 즐겼다.

물론 익힌 만큼 쓰는 것도 즐겼고.

‘돌아가면 다시 대련해 보자.’

엔크리드는 불침번 내내 이질감을 느끼는 청각 단련과 함께 생각을 이어 갔고.

곧 다음 불침번을 깨우고 잠이 들었다.

이틀째 동이 트기 시작한 이후부터 정찰대는 다시 길을 나섰다.

아침에 엔리에게 짐승 길을 보는 법을 대강 배우고.

종아리까지 오는 풀을 스치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배울 게 많아.’

엔크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엔리가 알려 주는 사냥꾼의 상식도 꽤 재밌었다.

그동안은 이런 쪽 지식을 쌓을 여유가 없었다.

“이쪽으로.”

정찰 분대장이 앞장서서 길을 나선다. 향하는 곳은 키다리 잡초가 가득 자란 잡초밭이다.

‘무난하네.’

적군을 만나서 머리를 쪼갤 거라던 것치고는 문제없는 루트였다.

배정받아 확인해야 할 지점이기도 했다.

물론 정찰 분대장은 엔크리드의 상식을 간단히 깨부쉈다.

“이대로 풀밭을 뚫고 나가서 정찰대 흔적을 쫓는 거다. 어때?”

이 새끼는 진짜 미친 새끼인가?

절로 그런 말이 입 밖에 나올 뻔한 걸 꾹 눌러 넣었다.

키다리 잡초밭에서 뭘 보고 방향을 잡을 것이며.

이렇게 간다고 적의 정찰대를 만난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대강 안쪽에 혹 적의 매복은 있는지, 이상 상황이 발생했는지만 확인하면 될 일을.

“끼어들지 마쇼. 거, 분대장이라고 다 같은 분대장이 아니야.”

돌려 말하는 거로 다독이려 했더니, 휘하 병사가 나서서 이리 말한다.

허허.

엔크리드는 여전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이걸 이대로 놔둬도 되나 생각했을 뿐.

고민은 짧았다.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만약 수틀려서 죽게 된다면.

다음 날 다시 생각해 보기로.

그게 아니라면.

‘헛다리 짚고 돌아가는 거지.’

뭐가 됐든 자신한테 손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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