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29화 (29/170)

29. 나도 살고 싶다.

“더 앞으로 가겠다는 건가? 이건 미친 짓이야.”

엔크리드의 뒤로 바짝 붙은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했다.

최초 기습에 성공한 뒤, 앤드류 분대에서 엔크리드 분대가 된 정찰대는 두 번의 기습을 더 시도했다.

두 번째 전투는 다섯 명의 병사 무리였고, 세 번째 전투에선 열다섯 명이 넘는 병사 무리를 만났다.

둘 다 험난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적병 중에 실력이 뛰어난 놈이 있었고.

세 번째 전투는 상대 머릿수가 많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살아남은 병사의 숫자는 일곱.

둘을 더 잃었다.

‘더 살릴 수가 없다.’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성자 나부랭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여기서 죽은 셋을 살리겠다고 오늘을 반복하는 건 요정 뼈다귀 뜯는 소리였다.

그나마 엔크리드의 활약 덕에 이 정도였다.

물론 아군 병사도 피 터지게 싸웠다.

살아남았지만, 한쪽 눈을 잃은 놈도 생겼고.

앤드류도 얼굴에 칼자국이 남았다.

왼쪽 볼 위를 리넨 붕대로 감아 놨는데, 살아남으면 좋은 훈장이 될 만한 그런 상처다.

이런 상황인데도 엔크리드는 더 안쪽으로 향했다.

퇴로를 생각하지 않는 무지한 돌진과도 같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미친 짓이 맞았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솜씨나 경험이 녹록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그는 엔크리드가 적지를 향해 간다는 걸 눈치챘다.

그걸 본 엔크리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렘이나 다른 분대원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퍽 쓸 만한 인재다.

작정하고 나서면 최소 소대장은 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인재.

“이제부터는 숨 좀 돌릴 수 있을 거다.”

엔크리드가 말하자, 인상 험악한 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얘기가 아닐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항명은…….”

“항명이고 뭐고 간에 죽으러 가는 길이라면 분대장이든 뭐든 아군의 등 뒤에다 칼을 꽂아서라도 살길을 찾을 거다. 난.”

이 새끼, 위험한 말을 너무 막 뱉네.

그러다 살아 돌아가면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빤히 쳐다봐도 미동도 없다. 뻔뻔했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 목숨이 먼저지, 임무가 먼저겠나.

특히나 얘처럼 특수한 목적으로 종군하는 놈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앤드류와 자신의 목숨이 최우선이겠지.

엔크리드는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한 뒤, 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레 아군도 멈춘다. 모두 엔크리드와 인상 험악한 병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호흡을 고르는 병사 무리 사이로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지금 돌아가면 어차피 죽어. 뒤에는 미친 들개 떼처럼 뭉친 적군뿐이다.”

말하며 엔크리드는 손의 보호구를 느슨하게 풀었다.

가죽을 덧댄 보호구는 분명 쓸 만한 물건이지만, 오래 끼고 있으면 손 근육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느슨하게 차자니, 전투 중에 위험할 게 분명하고.

“그걸 어떻게 알고? 우리 존재 자체를 모를 텐데, 퇴로를 어떻게 벌써 막는다는 거냐?”

인상 험악한 병사는 엔크리드가 손등 보호구를 푸는 걸 슬쩍 보다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여유를 보이는 엔크리드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엔크리드는 벌써 수십 번 이 순간을 맞이했다.

수십 차례 반복한 오늘이었다.

적군은 숫자가 많고 놈들은 기습을 확인한 순간, 반드시 퇴로를 끊는다. 그것도 무척 집요하게.

지휘관이 누군지 모르지만, 여기에 매복한 걸 어지간히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언제나 같았다.

키다리 풀숲 사이, 적당히 몸을 낮춘 아군 무리는 불안해 보였다.

무작정 뒤를 쫓기는 하지만, 지금 둘의 대화를 듣자니 위험한 전장 한복판에 선 듯했다.

그럼에도 쉬이 나서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귀만 쫑긋 세울 뿐이었다.

엔크리드는 다시 위를 슬쩍 보며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서너 시간 뒤면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그러면 활로가 열릴 거고.

그 전에 일단 이 자리에서 이들을 설득해야겠지만.

힘으로 찍어누르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상대다.

그렇다고 강압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강압과 폭력으로 몰아친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기습, 도주, 기습.

분대원을 정신없게 몰아쳐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다.

기다리자니, 이런 의문이 생기는 거고.

굳이 힘들여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늦었다는 거 모르나?”

그 말이 맞았다. 이미 시간이 지체됐다.

여기서 돌아가는 게 더 미친 짓이었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지?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리 말하는 대신 눈알을 굴리더니, 물었다.

“생각이 있는 거겠지?”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보고 주변 아군과도 한 번씩 눈을 맞췄다.

엔리, 앤드류까지 전부.

그들의 눈에는 의심과 불안이 담겨 있었다.

숨이 돌아오자, 여유가 생겼고.

여유는 이들에게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들었다.

이미 늦었다는 건 알 거고.

엔크리드는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적절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말하겠나.

오늘을 반복해서 미래를 봤다고?

그 반복된 오늘을 끝내기 위해서,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조건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퍽이나 믿겠다.

그러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나도 살고 싶다.”

짧지만, 모든 게 담긴 한마디였다.

죽으려고 발악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삶의 갈망.

그게 꼭 이들에게만 있을까.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걸 모두에게 주지시킨다.

물론 엔크리드는 죽으면 다시 오늘을 반복하면 되지만.

‘정체되지 않겠다.’

그 강의 사공이 누구든.

눈앞에 세워진 벽이 얼마나 높고 단단하든.

멈출 생각은 없다.

엔크리드에게 반복된 오늘은 넘어야 할 산이자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믿어. 죽으러 가는 길 아니다.”

설명 따윈 생략한 채, 모두의 믿음을 사겠다.

이들의 믿음을 토대로 하루를 비틀어서라도 오늘을 벗어나 내일을 맞이하겠다.

삶의 갈망, 반복된 전투, 흥분이 가신 뒤 생긴 불안, 이런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리라.

그런 이들에게 엔크리드의 짧은 두 마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신뢰감을 줬다.

나도 살고 싶고, 그러니 믿으라 한다.

또한, 이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았다.

여기서 당장 어떻게 할 건데.

적군은 키다리 풀밭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득실거리고.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어떻게 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면 누군가를 믿는 것만이 방법이 될 테니.

“저, 꼭 살고 싶습니다.”

엔리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다들 엔크리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그나마 냉정했지만, 그에게도 방법은 없었다.

앤드류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실력을 떠나서 엔크리드가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 같았다.

지금의 엔크리드는 미래에 이럴 것이라 꿈꾸던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나.

‘이런 상황에서도 의연하고.’

포기를 모르며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도, 나도 믿습니다.”

그리하여 앤드류도 말했다. 어느새 말도 높였다. 그게 어색하지도 않았다.

아군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일어 엔크리드에게 닿는 듯했다.

“그럼 모두.”

그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엔크리드가 입을 연다.

“지금부터 내 신호를 받을 때까지 두더지처럼 엎드리고 소리 내지 마라.”

신뢰를 얻었다면 쓸 차례다.

그부터 솔선수범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리고 숨을 죽였다.

다들 엔크리드를 따라 했다.

당장 도망가지 않고 무슨 짓을 하나 싶지만, 어쩌겠나 조금 전까지 뜨거운 무언가를 나눈 사이다.

단 5분이라도 믿음을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인상 험악한 병사는 제 코 위로 풀벌레 하나가 톡 뛰어서 사라지는 걸 보며 기가 찼다.

‘이 새끼, 기가 막힌 수완가잖아.’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런 솜씨로 그 사고뭉치 분대를 움직이는 거였나?

당연히 드는 생각이다.

푸스스슥.

그때,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숨도 조심히 쉬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 가깝진 않았다.

키다리 풀밭은 빽빽한 풀숲과 같다. 바로 앞까지 다가오지 않고서야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숨기는 좋은 곳이었다.

주변에서 풀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앞에서 뒤로 소리의 방향이 흘러간다.

멈춘 이들에게는 상황이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키다리 풀숲 위를 나는 새가 있어, 지금의 광경을 봤다면 놀랄 만한 일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엔크리드 일행이 멈춰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의 풀들이 요동치며 움직인다. 그들 전부가 적군이었다.

다만, 그들은 중앙에 멈춘 채 엔크리드 분대가 숨은 곳만은 피해서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엔크리드가 멈춘 장소는 적병 사이에서 유일하게 안전지대인 무인도와 같았다.

운이 따라 준다고 해도, 적군이 움직이는 궤도 사이에서 이런 빈틈을 발견할 순 없을 것이다.

행운의 여신이 키스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축복을 힘껏 쏟아부은 수준이다.

물론, 이건 운 따위가 아니었다.

미치도록 반복한 오늘을 통해 터득한 꼼수지.

풀 밟는 소리가 멀어지며 이제 소리로는 적군의 위치가 분간이 안 될 때쯤, 엔크리드가 다시 말했다.

“다시 이동한다. 전군 일렬종대로 전진.”

이동할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웅크린 몸을 펴며 저린 다리가 회복될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러며 작센에게 배운 오감 단련이 무척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소리로 거리를 가늠하고 방향을 판단하는 것.

보통의 훈련으로 습득할만한 기술이 아니었지만, 엔크리드는 암살자에게 목을 갖다 바치며 배웠고, 풀숲에서의 오늘을 반복하며 소리를 구분해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목표도 지나쳤고.’

기습과 도주를 반복한 뒤, 여기에서 적병을 뒤로 흘려보내는 것.

그가 생각하는 활로의 핵심 중 두 번째였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가 남았다.

그건 시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저린 다리가 풀린 뒤에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다들 불만을 내비치는 대신 잘도 따라왔다.

내심 다들 놀라는 중이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적군이 그득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잘 피해 가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의 전투 양상도 희한했다. 마치 적군의 위치를 아는 것처럼 습격했으니까.

전부 아군의 기습으로 전투를 시작했고.

덕분에 유리한 고지에서 차지한 채 싸울 수 있었다. 그 모든 전투에서 엔크리드는 선두에 섰고, 미친 듯한 활약을 선보였다.

제 목숨을 도외시하는 놈처럼 보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분대원 모두는 엔크리드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걸 안다. 그가 가장 선두에서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도.

고요한 풀숲 사이, 다시금 기이한 열기가 일어난다.

그건 살아남은 아군 가슴에 피어오른 불꽃의 열기였다.

엔크리드는 그 열기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다음을 생각할 뿐.

‘여기까지는.’

수월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렵지 않았다.

어려워서도 안 됐고.

현재까지 이르는 ‘오늘’을 벌써 오십 번을 넘게 경험했다.

그러니 이건 당연한 결과다.

그럼 왜 오십 번을 넘게 이 ‘오늘’을 경험해야 했나.

그건 전부 이다음 작전 때문이기도 했다.

이쪽은 소수고, 상대는 다수다.

의도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적의 지휘관이 이곳에 접근한 이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

처음 몇 번은 퇴로 확보를 위해 어금니를 깨물고 돌파하려 했다.

당연하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분대원의 도움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변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 뒤에는 생각을 전환했다.

‘우릴 잡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해가 떨어진다. 눈앞에 노을이 지기 시작하며 황혼의 주황빛이 내려앉았다.

노을빛이 키다리 풀밭을 비추자, 마치 주황색으로 빛나는 호수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지금만큼은 이곳을 그린 펄이 아니라 오렌지 펄이라고 해야 할 듯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맑았고 떨어지는 햇볕이 쏘아 내는 노을은 더없이 따스했다.

해는 금세 서쪽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엔크리드가 택한 활로의 세 번째 목표를 취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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