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30화 (30/170)

30. 어둠을 친구로 삼는 순간은 언제인가.

어둠을 친구로 삼는 순간은 언제인가.

이게 문제라면 답은 쉬웠다.

자신이 잘 아는 곳.

앞마당처럼 훤하게 지형을 파악한 곳.

기왕이면 최근까지 생활한 곳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어렴풋하게 주변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더없이 익숙한, 예를 들어 바로 어제까지도 야간 훈련장으로 삼고 사용한 장소라면 더 좋을 것이다.

지금 엔크리드가 도달한 곳이 그러했다.

본래라면 생소한 장소여야겠지만.

“이건…….”

본래라면 이리 보고 놀라야 했지만.

“젠장.”

본래라면 적의 규모가 눈에 들어온 순간 절망해야 했지만.

엔크리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수차례 여기에 왔으니까.

그냥 오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구르고 또 굴렀다.

싸우고 또 싸웠다.

그때마다 함께 오는 인원이 조금씩 변하긴 했다.

그래도 기본 구성은 비슷했다.

앤드류와 인상 험악한 병사, 엔리, 그 외 분대원.

그중 깡패 출신 분대원 둘은 큰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키다리 풀밭을 역행에서 빠져나온 곳.

예상치 못한 장면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분대원 중 일부는 본대로 향하는 퇴로가 막혔으니, 이쪽이 반대로 활로가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엔리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인상 험악한 병사만큼이나 방향 감각이 좋았다.

평원 사냥꾼 노릇은 괜히 한 게 아니었으니까.

엔리는 적이 풀밭 안에 매복했으니, 이쪽은 오히려 비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틀렸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었다.

엔리는 다리가 풀리는 걸 느꼈다.

화르륵.

처음 보인 건 타오르는 횃대였다.

그리고 그 불빛을 반쯤 가로막는 넓고 두꺼운 천이 보였다.

그걸 보자마자 엔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들고 시야를 넓히자, 눈에 들어온 구조물의 형태가 드러났다.

천막이었다.

여기서 천막이 왜 나와?

어렴풋한 불빛에 의지해 고개를 옆으로 넘기자, 천막 옆으로 타오르는 횃대가 보였다.

저 멀리까지, 줄지은 횃대.

대강 숫자를 세도 열 개는 넘었다.

간신히 주변이 보일 정도로 횃대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달빛과 횃불의 빛이 엮이며 시야가 더 트였다.

그들의 눈에 보인 건 천막이었다.

최소 스무 동이 넘는 천막이 키다리 풀밭의 옆을 타고 쭉 이어져 있었다.

이쪽은 아군 진지를 기준으로 반대편.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천막은 적군인 아즈펜 공국의 진지였다.

“씹, 이게 뭔데?”

깡패 출신 병사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죽인 채 중얼거렸다.

“허, 기껏 온 곳이.”

엔리가 허탈한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쉿, 조용.”

이 순간, 인상 험악한 병사가 가장 빨리 반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경계병에게 발각되면 전투가 일어날 것이고.

그리되면 순식간에 살해당할 것이다.

모두의 눈에 횃대의 불빛 말고도 저 멀리 움직이는 불빛이 몇 개 보였다.

경계병이 든 횃불이란 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다 알았다.

“주둥이 다물어.”

인상 험악한 병사가 말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수틀리면 죽는다. 위기의 순간에 베테랑의 경험이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행동했다.

자세를 낮추고 경계병의 기척을 감지하려 했다.

최대한 몸을 숨기고 상황을 파악한 뒤, 도망갈 구멍을 찾는다. 운이 좋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밤이었고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적군의 예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방향으로 움직였으니까.

손만 뻗으면 적군의 천막에 손이 닿을 만큼 적진 한복판에 들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지만 않으면 도주할 기회는 있다.

그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정신만 차리면 마물 무리 한복판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날붙이 뽑지 말고 자세 낮춰.”

마치 그가 리더인 양 행동했다.

분대원의 대부분이 그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오직 둘만 제외하고.

당연하게도 한 명은 엔크리드였고, 다른 한 명은 앤드류였다.

“생각이 있겠지. 분대장은 엔크리드야.”

매가 약이 된 건지.

오늘 아침에 쥐어 터져서 분대장을 뺏긴 놈이 유일하게 엔크리드의 편을 들었다.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닙니다.”

인상 험악한 병사가 꾸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기세가 담겼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이곳은 적군 한복판이다.

키다리 풀밭에서 매복한 적을 맞이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천막 너머에서 곧바로 적군의 창날이 튀어나와도 할 말이 없는 순간인데.

이런 상황에서 생각은 무슨 생각.

인상 험악한 병사의 반응은 타당했다.

실제로 엔크리드는 몇 번이고 이 병사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보통내기가 아니야.’

실력도, 경험도, 판단력과 행동력도.

전부 어쭙잖은 병사 수준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오늘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분대장으로 삼고 발악하는 게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분대원은 몰랐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전부 엔크리드의 의도대로였다.

시간, 위치, 장소 모든 게.

벌써 몇 번의 밤을 이곳에서 보냈던가.

몇 번의 목숨을 던져 버렸던가.

몇 번의 오늘을 반복했던가.

지금 눈앞에 있는 천막에는 둔해 빠진 병사 셋이 곯아떨어져 있으며.

진지를 순찰하는 병사를 만나려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알고 있기에 엔크리드는 행동했다.

촤악.

검을 뽑아 천막의 벽을 찢었다.

아래에서 위로 검날이 달빛을 반사한다.

“이 미친 새끼.”

인상 험악한 병사가 기겁했다.

그리고 여기서 앤드류는 엔크리드의 행동에 반응했다.

찢어진 천막 안으로 단숨에 들어가 놀라서 눈을 뜬 적병의 목에 숏소드 끝을 내리꽂은 거다.

푹!

그 뒤로 엔크리드도 뛰어 들어갔다.

일어나려는 놈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자, 자다가 깬 놈이 놀라서 헛바람을 들이키며 손으로 칼날을 쥐려 했다.

엔크리드는 힘으로 칼날을 내리눌러서 목을 그었다.

부우욱.

가죽 뜯기는 소리 따위가 나고, 곧 피 냄새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적병은 깡패 출신 분대원이 심장에 단검을 꽂았다.

“끄륵, 끄르그극.”

심장에 칼을 맞은 놈이 바닥을 기며 손을 뻗었다.

생명력이 질긴 놈이었다.

천막 입구 쪽에서 비춰 들어오는 불빛이 손을 뻗은 적병의 머리통을 비췄다.

그리고 그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인상 험악한 병사다.

그가 무릎으로 적병의 등을 누르고 손으로 목을 잡고 비틀었다.

우득.

목뼈가 부러진 적병은 혀를 쭉 내밀고 죽었다.

“야, 너.”

어둠 속에서 인상 험악한 병사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가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당장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 섬멸당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도박 같은 짓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옆으로 이동한다.”

엔크리드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그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검을 뻗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인상 험악한 병사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절절한 짜증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보기에는 하염없이 미친 짓이었으니까.

엔크리드는 천막 옆을 검으로 찢고 베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뒤에서 자신을 어찌할 거란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살기를 뿌리는데도?

적지에 고작 순찰대 병력으로 돌격한 상황인데도 둘 사이에 번개가 튀는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가 오가자, 다들 둘의 눈치를 봤다.

“이름은?”

“뭐?”

“네 이름.”

엔크리드의 태연한 태도 때문일까.

살기에 반응하지 않는 담대함 때문일까.

검을 잡고 밑으로 내리그으며 묻는 엔크리드의 질문에 인상 험악한 병사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맥이라고 불러라.”

말하면서도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엔크리드는 그런 병사를 향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맥, 항명은 받지 않겠다.”

“뭐?”

부-욱.

엔크리드가 천막 벽을 마저 찢고 나갔다.

남은 이들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후, 진짜 뭐가 뭔지.”

맥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앤드류와 눈이 마주쳤다.

“네, 갑니다.”

맥이 그 눈빛에 답했다.

일단은 따라가야 할 판이다.

그 옆 막사는 비어 있었다.

막사에 있는 병사 전부가 어디 야간 경계 근무라도 나간 것 같았다.

‘그게 말이 되나?’

천막은 아무리 적어도 열 명 이상은 수용할 만한 크기다.

최소 분대 단위다.

좀 무리하면 두 개 분대 병력도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천막 내부 흔적을 보면 열 명 이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그 천막을 지나고 나선 뒤, 사고뭉치 분대장은 아예 천막 벽을 찢지도 않았다.

천막 입구에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보더니, 앞으로 훅 나간다.

그 뒤를 분대원이 따랐다.

어느새 구름이 껴 달빛을 가렸다.

그러자 횃대의 불빛만으로는 주변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야간에 적응하려고 해도 컴컴했다.

그런 곳을 엔크리드는 서슴없이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는 분대원의 숨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 작지 않은 목소리다.

혹시 주변에 적군이 있다면 듣기 충분한 그런 소음이다.

맥은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새끼가 진짜.’

그런데 기척이 없다. 미처 감지하지 못한 적군의 움직임도 없고.

만약 발견했다면 당장 누구냐 따위의 말이 들렸을 테니까.

엔크리드는 또 움직였다.

이제는 맥조차도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키다리 풀밭에서야 머리 위에 태양이 버젓이 떠 있으니, 방향을 살피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사방이 어둡지 않나.

‘뭘 알고 가는 건가?’

그래 보였다. 엔크리드의 걸음에는 망설임 따윈 없어 보였으니까.

그는 움직였고, 저 멀리 횃대 두 개가 붙어 있는 천막을 시야에 두고서야 멈췄다.

앞에 솟은 적당한 나무를 엄폐물로 삼은 엔크리드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어둠에 적응된 눈에 간신히 그의 손짓이 보였다.

맥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걸었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천막의 개수를 토대로 진지의 크기를 가늠해 봤을 때.

‘관통한 것 같은데?’

적지를 관통할 정도는 걸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도 몰라? 이거 왜 안 걸려?

이러니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드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대기.”

엔크리드가 뒤로 돌아서서 말했다.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그가 말한 천막을 슬쩍 보니, 지키는 병사가 넷이다.

적의 진지는 밤이라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는데 저 천막만큼은 붐비는 것처럼 보였다.

휘잉.

바람이 불며 횃대의 불빛이 흔들리자, 병사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천막 안쪽에서 누군가 나와 뭐라 말하는 게 보였다.

거리가 있는 탓에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들은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건 보였다.

‘뭘 지키고 있는 건가?’

그럼 사고뭉치 분대장은 저걸 노리고 온 거고?

그제야 맥은 이 상황을 이해했다. 아니, 추측했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며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자리 잡았다.

‘비밀 임무였군.’

자신과 다른 분대원을 제외하고 오롯이 사고뭉치 분대장에게만 주어진 임무.

그만큼 지휘관의 믿음을 산 것일 테고.

맥은 앤드류가 말한 걸 떠올렸다.

중대장의 지시로 사고뭉치 분대장이 합류했다고 했었다.

이제야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엔크리드, 분대장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거였다.

‘그런 거였나?’

오해였다.

맥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말로 내뱉진 않았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런 오해가 생겼다는 걸 알아도 굳이 가타부타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할 일이 더 급했으니까.

“우리는 저 막사에 불을 지른다.”

엔크리드가 손가락을 들었다.

전면에만 병사 넷이 지키는 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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