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꿈, 질책, 책임
“깃대는?”
“괜찮소.”
아즈펜 공국의 중대장은 지금 진행하는 작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온 걸 일개 지휘관이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서 까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나우릴리아의 쥐새끼 몇 마리가 막사에 잠입해서 불을 질렀다.
병력의 반 이상이 키다리 풀밭에 매복했음에도 침입을 허용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시작된 작전이다.
여기서 당하는 건 자존심 문제였다.
실패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거였고.
“방비를 더 철저히 해 주셨어야지.”
깃대의 주인이 말했다. 그 말에 중대장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이대로 검을 뽑아 목을 후려치면 단숨에 뒈질 놈이 입을 놀리는 게 아니꼽다. 그래도 어쩌겠나.
부대 경계에 구멍이 생긴 건 맞았다.
“그러지.”
펄럭!
중대장은 그리 말하고 막사 출입문을 손으로 쳐 내듯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적군이 여길 알아채는 건? 그래, 이건 알아챌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다음은?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숫자로 키다리 풀밭에 풀어 둔 병력을 지나쳐 본대의 깃대를 습격해?
중대장은 자신의 부대를 믿었다.
당연했다.
평소에 그의 별명은 악마 중대장이다.
훈련을 하도 지독하게 시켜서 붙은 이명이다.
평소에 피를 토해야 전장에서 피를 토하며 뒈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자신이 키운 부대였다.
‘이걸 뚫고 들어와?’
전투에 패배한 군인은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없다.
중대장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렇다고 아군의 경계를 나무랄 것인가.
무작정 그럴 순 없었다.
이걸 계획하고 실행한 놈은 보통이 아니었다.
적지를 소수로 들어올 수 있는 담력에.
자신의 수하로 있는 소대장과 맞붙어 살아남는 실력과.
불을 지르고 내빼는 완벽한 마무리까지.
소대장이야, 뒤쪽에 불이 번져 어쩔 수 없이 놓쳤다곤 해도.
‘운도 실력이지.’
긴 시간 전장을 떠돈 아즈펜의 중대장은 운의 중요성도 알았다.
중대장은 대기하던 부관을 향해 말했다.
“근무 나간 소대장을 제외하고, 모든 지휘관 불러와.”
“네, 대장님.”
그의 중대는 대대 휘하에 있으나, 별개의 작전권을 지닌 부대였다.
그러니까 독립 중대였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독립 중대는 별칭이 붙었다.
이 부대의 이름은 ‘그레이 독’이었다.
아즈펜 공국에서 그레이 독이란 회색 털을 가진 개로 집요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레이 독이란 개는 자신이 점 찍은 상대와 어떻게든 이어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게 사랑이 됐든, 싸움이 됐든 말이다.
그 덕분에 그레이 독 부대는 ‘집요한 사랑꾼’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 그 부대의 장이 이름도 모르는 적의 정찰 분대장을 찍었다.
‘반드시 잡아 죽인다.’
그레이 독, 회색 개가 표적을 정했다.
중대장은 제 가슴에 거듭 각오를 새겼다.
반드시 잡아 족치겠다고.
그의 머리 위, 천막 안에 있는 주술사의 수작인지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근래 간간이 내린 비는 대부분 지금 천막 안에 자리한 주술사의 솜씨였다.
그리고 이 주술사가 이번 전술의 핵심이었고.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게 효율적인 작전임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이 작전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면 독립 중대 그레이 독, 또는 ‘집요한 사랑꾼’이라 불리는 부대의 대장은 때려 죽어도 이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을 테니.
승리가 약속된 전장이라니.
복수심을 불태우는 것과는 별개이긴 하지만, 몹시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 * *
“우연히 적의 매복을 발견한 뒤, 우연히 적의 본진으로 진입해서 우연히 적진에 불을 지르고 왔다고?”
이렇게 말하니까 또 이상하게 들리긴 하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사족을 덧붙였다.
“네, 그 순간에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가 우연히 그렇게 됐습니다.”
정찰 소대장은 눈을 깜빡였다.
이 친구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나이는 자신과 버금가면서 운 좋게 분대장이 된 놈.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틈만 나면 검을 휘두르는 머저리.
그게 사고뭉치 분대장의 대외적인 평가다.
그런데 지금 그가 한 일을 들어 보면 이건 뭐.
하물며 엔크리드의 입에서 들어서 이 정도다.
살아남은 분대원의 입에서 들은 얘기는 더 가관이었다.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요. 가능하다면 옆에서 더 배우고 싶습니다.”
떠나기 전에는 너무 건방져서 걱정되던 앤드류다.
이 새끼를 이대로 보냈다가 혹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했는데.
정찰대의 지휘권을 강압적으로 뺏겼는데 그게 당연하단다. 아니, 더 배우고 싶단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앤드류가 맞는 건가?
“실력만 보자면 중급 병사 수준은 넘었다고 보는데.”
다음은 앤드류의 보모 맥이었다.
정찰 소대장은 맥의 솜씨를 알았다.
반쯤은 그를 믿고 앤드류에게 정찰대를 맡긴 것도 있었다.
그런 맥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거다.
그것도 실력으로.
“아는 게 많더군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마지막은 평원 사냥꾼 엔리다.
분대원의 평가가 한결같았다.
믿고 따랐을 뿐이란다.
다 같이 입을 모아서 거짓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엔크리드가 정찰대 지휘권을 빼앗았고.
고작 열 명으로 키다리 풀밭에 매복한 적병의 눈을 피해 적 진지에 불을 지르고 살아 돌아왔다고.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는 것 같은데, 이미 불도 지르고 적의 움직임도 파악했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들었던 모든 걸 정리해 보는데 당황스럽다.
적군 사이에서 멈춰 있었더니 알아서 피해 갔다는 둥.
어둠 속에서 적지를 관통해서 움직이는데 아무한테도 걸리지 않았다는 둥.
“그, 음, 운이 엄청 좋았나 보군.”
결국, 정찰 소대장은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엔크리드는 그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반복되는 오늘 덕분에 적군의 움직임과 진지 상태를 외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네, 운이 따랐습니다.”
이게 운이라면 정말 보통 운이 아니었다.
행운의 여신이 키스를 넘어 동침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기도 했다.
딱히 숨길 일이 아니기에 정찰 소대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고뭉치 분대장인 엔크리드는 운이 따르는 남자라고, 행운의 여신이 동전을 맡겨 둔 남자라고, 행운 그 자체라고.
또는 평생의 운을 이번 정찰 임무에서 다 썼다고.
본대로 복귀하는 길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반나절 동안 걷는 중에 잠깐 비가 추적추적 내린 게 전부였다.
맑은 하늘에 비가 떨어졌다.
흔치 않지만, 가끔은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내내, 엔크리드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그게 최선이었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만약 ‘오늘’을 몇 번 반복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든 미련은 남는다. 엔크리드는 어려서부터 그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선택이고 그 선택의 과정이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을 반복할 수 있으니, 절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게 최선이었나 하는 미혹과 의문, 혹 다른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겨우 넷.’
함께 살아 돌아온 숫자다.
자신을 포함하면 다섯.
부대의 반수가 죽었다.
결과가 엔크리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게 최선이냐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냐고.
‘다섯이 죽었다.’
그 다섯은 엔크리드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고작 짧은 일정을 함께 한 부대원일 뿐이다.
그들이 있거나 없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그저, 그 순간, 그 오늘에서 그들이 엔크리드의 책임이었을 뿐.
오랜 시간 가슴 속에 품었던 꿈이, 그를 지금까지 올곧게 이끈 신념이, 그를 질책했다.
과연 그게 최선이었냐고.
더 지킬 수 있지 않았냐고.
‘넌 대체 어떤 기사가 되겠다는 거냐?’
그저 기사, 두 글자에 매료된 건 소년 시절의 엔크리드였다.
종전의 기사란 음유시인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소년은 성인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 엔크리드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재능의 소유자란 걸 알았다.
전장을 구르며 자신의 한계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꿈은 버리지 않았다.
그 꿈이 헤지고 헤진 가죽이 되었다 해도.
결국, 현실이란 칼에 뜯기고 찢긴 천 조각이 되었다고 해도.
포기한 적은 없었기에.
그러므로 고작 기사란 글자에 매료된 채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기사란 지키는 자, 기사란 나서는 자, 기사란 자신의 뜻한 바를 보이는 자.
‘어떤 기사가 될 것인가.’
오늘을 반복함으로써 엔크리드는 한계 너머로 발을 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평소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깨닫고 확립한 무언가를 지켜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기사가 되고 싶었던가.’
현실에 찢기고 찢긴 꿈이, 신념이란 글자가 되어 질책하니.
엔크리드는 그 질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으로 이미 지나간 일을 넘기기로 했다.
오늘을 반복해서 다섯을 더 살릴 수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므로.
이미 그 ‘오늘’은 끝났다.
거기에 미련을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본대다.”
함께 걷던 병사 중 하나가 말했다.
“후으, 살았군요.”
뒤에서 부축받아 오던 엔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돌아가면 그 꽃집 미망인한테 바로 달려갈 건가?”
“이번 전투가 끝나야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엔크리드의 말에 엔리는 기쁜 낯으로 말했다.
살아 돌아왔다는, 그 험난함을 뚫고 생환한 기쁨이 그의 가슴에 가득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그중 깡패 출신 병사는 더 그랬다.
그는 오는 내내 이번에 있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과연 자신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나.
평생 양아치처럼 살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종군하게 됐고.
또 어쩌다 보니 앤드류란 주군을 모시게 됐다.
그리고 이번 정찰 임무.
그는 느낀 바가 많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깡패 병사는 다친 다리를 절뚝이며 엔크리드의 옆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는 내내 단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었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 새끼가 아니라고 했다.’
어릴 때 자신을 거둬 준 형님이 해 준 말이다.
그 형님은 진즉에 죽어서 다시 볼 수 없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 준 말은 어느새 삶의 지표가 됐다.
껄렁껄렁하게 대강 살았어도 깡패는 은혜를 알았다.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기회가 되면 갚겠습니다.”
엔크리드는 갑자기 다가와서 말하는 병사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해 준 게 맞나?
사실상 수틀리면 죽을 자리였는데, 살아남은 건 병사 자신의 운이었다.
실제 오늘을 반복하며 이 병사가 죽은 적도 많았으니까.
그저 그 오늘, 그 순간에 행운의 여신이 잠시 머물렀을 뿐.
“마음대로 해.”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돌아서니, 이번에는 앤드류와 맥이 보였다.
“신세 졌네.”
맥이 먼저 말했다. 전에 없이 호의적인 눈빛이다.
앤드류는 그보다 더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한없이 건방진 애새끼라고 생각했는데, 태도가 변했다.
눈빛이 공손해졌다.
엔크리드는 통증이 느껴진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같은 전장에 있으면 또 보겠지. 전장의 꽃은.”
“보병이다.”
보병대의 구호를 작별 인사로 삼았다.
그걸 옆에서 보던 정찰 소대장이 다가왔다.
“모두 복귀해도 좋다. 부상자는 의무 막사를 찾아 몸을 돌보도록 하고. 다들 수고했다. 그리고 그, 아니다.”
정찰 소대장은 몸을 돌리기 전 엔크리드에게 성과와 포상에 관해 말하려다가 관뒀다.
‘일단 보고부터.’
듣고도 못 믿을 일을 하지 않았나.
위에서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럼.”
금세 옆구리 통증이 가라앉는 걸 보며 엔크리드는 굳이 치료가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하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복귀할 시간이었다.
‘별일 없으려나.’
키다리 풀밭에서야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부대에 돌아와 막사로 돌아갈 때가 되니, 과연 자신의 분대원이 얌전히 있었을까 싶었다.
다른 부대원과 시비가 붙었든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웠든지.
뭐가 됐든, 일이 있었을 것 같은데.
괜히 분대에 사고뭉치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막사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따-앙!
쇠와 쇠가 만났을 때나 나올 법한 굉음이 귀를 때렸다.
작센을 통해 배워 훈련한 청각이 빛을 발했다.
소리의 근원지를 단숨에 찾았다.
본대 막사 쪽이었다.
엔크리드의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막사에 다가가자, 주변에 사람이 에워싼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도끼와 검을 맞댄 둘이 보였다.
위치는 사고뭉치 분대 막사 앞.
도끼를 든 건 렘.
검을 쥔 건 라그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