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33화 (33/170)

33. 목표

소대장의 보고를 들은 중대장의 에메랄드빛 녹색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고작 열 명으로?”

정찰 임무 중 다른 분대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평이했다.

유일하게 있었던 일이라고는 평원에서 아즈펜의 보병 정찰대를 만났고, 서로 싸우는 대신 거리를 두고 헤어졌다는 것뿐.

당연하게도 아즈펜 쪽에서도 정찰대를 운용할 테니, 평원에서 마주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한 번만 마주쳤다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엔크리드 부대가 한 일은 궤가 달랐다.

적이 키다리 풀밭에 매복한 것.

적군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는 것.

정보를 알아내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작 열 명의 병사로 적진에 침투하고 불을 질렀다.

‘뭐 하는 새끼지?’

그 모든 일의 중심에 엔크리드가 있었다.

이전 암살자 사건도 그렇고.

묘하게 일이 꼬이는 곳마다 엔크리드란 분대장이 있지 않나.

순전히 재수가 없다고 봐야 하나?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악운에 강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번번이 활약 아닌 활약을 했다.

가진 바 실력은 그저 그런데, 매번 벌어진 일의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다.

암살자 때도 그 분대장이 버틴 덕분에 목표를 보호할 수 있지 않았나.

이번에 한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적진에 침투해서 정보를 알아낸 것만 해도 백번 상을 줘도 부족한 일이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소대장이 답했다.

열이 적진에 침투해서 고작 다섯이 죽고, 나머지 다섯은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루고 돌아왔다.

사이프러스 사단이 키운 정예 특급 부대도 아니고 최하급 병사가 이끄는 정찰대 열 명이 한 일이다.

중대장은 흥미를 느꼈다.

‘엔크리드, 엔크리드.’

이건 진짜 뭐 하는 새끼지?

실력은 고만고만한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깊게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운.’

그저 운이 따른다고 생각했다.

이게 운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적 지휘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부대 위치를 다 외웠다면 모를까.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차라리 아즈펜 공국이 키운 첩자라는 가설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떤 멍청한 놈이 이런 첩자를 키워서 보낸단 말인가.

겨우 분대장에, 실력은 형편없는 일개 병사를?

“분대장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이런 걸 거짓으로 말할 만큼 멍청한 놈이라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중대장은 앉은 자리에서 주먹으로 턱을 괴고 생각했다.

엔크리드란 분대장은 운이라 치고.

아즈펜 놈들은 뭘 노리는 걸까?

일단 대대장에게 말을 전해야 한다.

그게 순서였다.

그녀는 생각을 끝내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 멍청한 놈은 누가 소대장으로 뽑은 걸까?

중대장은 머저리를 밀치며 말했다.

“대대장 막사로 간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보고가 최우선 아니겠나.

* * *

렘은 심심했다.

소소한 전투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다.

현재 양군은 각 진지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버티기 바빴다.

이번에는 이대로 전쟁이 끝나리라는 소문이 부대 내에 돌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거죠. 곧 겨울이고 이쪽 평원 전투가 단숨에 끝날 일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또 내년을 기약하겠죠.”

귀가 밝은 크라이스의 말이다.

본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돌고 도는 소문을 듣고 종합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렘은 크라이스가 뭐라 떠들든, 이딴 일에는 관심 없었다.

이 전장이 매년 반복된다는 거나.

아즈펜과 나우릴리아가 과거에는 사이가 좋았다던가.

알게 뭐란 말인가.

‘더럽게 할 일 없네.’

적당히 도끼날을 갈고 그거로 도끼 저글링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할 일이 없다는 게 변하진 않는다.

렘은 미치도록 이 시간이 지루했다.

그를 제외하면 다들 할 일이 있어 보였다.

“아니, 궐련을 그 가격에 달라고요? 돌았어요? 머리에 화살촉이 박히셨나.”

한쪽에서 왕눈이가 연신 뭘 파느라 바빴다.

전투가 끝나면 한동안 수익이 줄어드니, 지금 바짝 벌어야 한다던가.

참 열심히도 산다.

“뭐? 화살촉?”

가끔 왕눈이 놈의 작은 체구를 보고 눈을 부라리는 놈들이 있었다.

렘은 그런 놈들을 위협하는 걸 소소한 취미로 삼기도 했다.

방금 갈아 둔 도끼날을 혀로 핥으며 바라봐 주면 끝이다.

애초에 도끼날은 그렇게 날카롭게 갈아 두지도 않는다. 손가락이 대자마자 베일 정도로 갈아 두면 날이 쉽게 깨진다.

마법이나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상은 이게 맞는 손질법이다.

그러니 도끼날을 핥는다고 해서 혀가 베이진 않는 거다.

“……저번 전투에서 투구에 화살이 맞긴 했지.”

금세 꼬리를 말 놈이 덤비기는.

“궐련은 구하기도 힘들다고요. 그래서 몇 대가 필요하시다고?”

크라이스가 금세 목소리를 높였다.

영락없는 장사치의 모습이었다.

음흉한 들고양이 같은 작센 놈은 막사에 붙어 있기보다는 밖을 나돌았고.

종교쟁이 놈은 기도하다가 몹시 우울한 얼굴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며 만날 ‘신이시여 답을 주소서’라고 중얼거리는데.

보다 보면 가까이하기가 꺼려진다. 하는 짓만 봐도 미친 광신도의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나.

진짜 저 새끼는 만날 왜 저러는 건지.

마지막으로 남은 라그나 놈은 툭하면 잠만 처자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고.

지루하지도 않은지, 저리 종일 멍 때리고 자고 멍 때리고 자고를 반복한다.

저게 재밌나?

‘분대장이 없으니 너무 심심하잖수.’

렘은 속으로 불만을 토하며 생각했다.

혹시 분대장이 뒈져 버린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정찰 임무는 위험하다. 그리고 분대장의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렘의 기준에서 보자면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실력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좀, 아니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씁,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나.’

그동안 지켜본바, 죽게 놔두기 참 아까운 인간이긴 했다.

그렇다고 쫓아다니며 지키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 인간이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만난 마음에 드는 인간일 뿐.

‘마음에 드는 인간?’

생각해 보니 그런 인간도 참 드물었다. 렘의 평생에 그런 인간이 몇이나 있었다고.

기왕이면 살아 돌아오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초조하진 않다.

애초에 어쭙잖은 놈들한테 당할 위인은 아니니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의 끝, 여전한 무료함에 렘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분대장이 죽었든 살았든 지금 이 순간의 무료함을 해결해야 했다.

“나 혹시 너 죽이고 싶냐?”

렘은 단순한 방법을 택했다.

하릴없이 드러누운 라그나를 툭 발로 차며 말했다.

라그나는 빤히 렘을 올려다봤다.

과연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짓인가 하는 눈빛과 함께.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

라그나는 진지했다.

“심심해서. 한판 붙자.”

긴말은 필요 없었다. 막사에 잠깐 들른 작센이 둘을 보고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종교쟁이야 평소와 같이 우울한 낯으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느라 바빴고.

크라이스는 자리를 비웠다.

둘은 합의하에 밖으로 나섰다.

챙.

가볍게 도끼와 검을 마주쳐 싸움의 시작을 알린 뒤.

서로를 향해 검과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앙!

렘의 팔이 휘어지며 도끼가 무섭게 내리꽂힌다. 라그나는 그 도끼날을 피하며 몸을 틀어 검을 내뻗었다.

분대장 엔크리드가 수없이 보였던 찌르기보다 완성도가 배는 높은 날카로운 공격이 렘의 복부를 노렸다.

렘은 발끝에 힘을 잔뜩 주며 뒤로 뛰었다.

퍽.

그의 발이 있던 곳에 족적이 남았다.

안목이 있는 사람이 봤다면 깜짝 놀랄 수준의 공방이 오갔다.

엔크리드가 도착한 건 막 둘의 전투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였다.

* * *

“죽여 버려!”

흥분한 병사 하나가 외쳤다.

어느새 둘을 구경하는 이들이 잔뜩 모였다.

사고뭉치 분대가 왜 사고뭉치 분대인가.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부대에서는 왜 이런 사고뭉치 무리를 데리고 있는가.

당연하게도 실력 때문이었다.

그런 둘이 실력을 뽐내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구경거리가 아니겠나.

따-앙!

검과 도끼가 만나며 둘을 중심으로 흙먼지가 일었다.

쌔액!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카가각.

도끼날이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듯하더니 바닥을 긁었다.

자잘한 돌이 도끼날에 긁히며 튀었다.

라그나는 아래를 긋는 도끼를 피해 위에서 밑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훙.

눈을 뜨고 있음에도 검날의 궤적이 보이지 않았다.

위에 있던 검이 어느새 밑으로 떨어져 렘의 목을 그었다.

따-앙!

거기에서 다시 도끼와 검이 맞부딪쳤다.

둘이 쥔 무기를 중심으로 불똥이 튀었다.

“미친.”

4중대 2소대장이 중얼거렸다.

딱 봐도 자신보다 수준이 몇 배는 높아 보였다.

그 외에도 실력에 자신 있는 병사 몇이 혀를 내두른다.

곧 상급 병사 수준을 넘보던 이들도 몇 있었다.

그들은 전부 수준이 다름을 느꼈다.

물론 그중에서 둘의 실력을 가늠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도 저 정도는 하지.’

‘나라면 벌써 끝냈어.’

지금 보이는 게 둘의 전부라 착각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에서 뭐라 떠들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엔크리드의 눈은 오롯이 둘의 동작을 쫓기 바빴고.

머릿속에는 둘의 검과 도끼를 상대하느라 집중했다.

엔크리드의 코끝으로 땀방울이 흘렀다.

지켜보고 집중하는 것만으로 전신이 땀으로 푹 젖을 정도였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늘 수도 있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엔크리드는 이 순간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안 돼.’

사람에게는 각자 맞는 형태가 있다. 검을 배우는 것도, 몸을 단련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걸 갖고 있었다.

오늘이 반복되는 저주.

눈깔 없는 뱃사공이 말한 끝없이 나타나는 벽.

그렇다면 평범한 훈련이나 수련이 아니라 그에 맞는 새로운 방법을 택해야 할 터였다.

저 둘의 도끼와 검을 보며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그 방법이 떠올랐다.

흥분과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곧 찬물을 끼얹은 냄비처럼 금세 식었다.

둘의 대련 아닌 대련을 보는 순간, 엔크리드는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그는 아직도 저 둘의 실력을 끌어낸 적이 없었다고.

렘도 라그나도 자신과 대련하며 저런 걸 보여 준 적이 없었다.

힘과 속도를 떠나, 둘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렘이 웃고 있었다.

그게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라그나의 표정에도 생동감이 넘쳤다.

평소에는 쉬이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몇 번의 오늘을 반복했던가.

몇 번이나 죽음의 순간을 넘겼던가.

그럼에도 지금 당장 둘 중 누구와도 진지하게 겨룰 수 없다.

그게 자신의 위치였다.

그렇다고 낙담하진 않았다.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할 거였다면 시작도 못 했을 테니.

되려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가 생겼으니까.

‘저 표정.’

둘을 지켜보는 와중, 자신을 상대함에도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겠다는 각오가 선다. 엔크리드는 그게 못내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길이 보였고 그 길을 걸어갈 시간이 있기에.

더없이, 정말 더없이 즐거웠다.

티리리리링.

도끼와 검이 스치며 기묘한 소리를 토해 냈다.

그와 동시에 렘과 라그나가 거리를 벌렸다.

둘 다 땀을 꽤 흘렸다. 라그나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이 보였다.

후- 하고 숨을 토해 낸 렘이 히죽 웃었다.

“만날 잠만 처잔 놈치고는 쓸 만하네.”

라그나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약한 놈들만 괴롭히는 야만인 주제에 어디서 평가질이냐?”

날 선 말과 달리 둘은 검과 도끼를 거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둘 다 흥분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 정도 여력을 남겨 둔 대련이었다.

둘은 싸우면서 구경꾼 사이에 있는 익숙한 얼굴을 확인했다. 분대장이었다.

싸우면서도 여력을 남겨 둬 주변을 둘러봤다는 방증이었다.

“구경났어? 계속 볼 거면 나랑 놀아 주든가.”

렘이 불쑥 말하자 구경하던 무리가 금세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 사이로 꾀죄죄한 몰골의 엔크리드만 남았다.

“왔수?”

렘이 엔크리드를 반겼다. 라그나도 눈으로 아는 척을 해 왔다.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엔크리드도 무사히 복귀했고.

곧 부스스한 붉은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작센이 나왔고, 크라이스도 분대장을 보더니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분대장!”

“신이 보살피셨군요.”

종교쟁이 분대원도 아는 척을 해 왔다.

총원 여섯, 본래는 십인대가 되어야 할 분대의 전부다.

그 여섯의 하나가 되어 엔크리드는 복귀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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