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34화 (34/170)

34.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내가 아는 정찰이랑 분대장이 아는 정찰이 다른 거유?”

렘이 손안의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뭐가?”

“반쯤 뒈지다 말고 돌아온 것 같아서.”

“옆구리 좀 긁힌 게 다다.”

“그게 긁힌 거면, 베이면 바로 뒈지는 거요?”

렘이 말하고 낄낄 웃었다.

이 새끼는 변한 게 없다.

하긴 며칠이나 못 봤다고 변했겠나.

엔크리드에게는 몇 달의 시간이지만, 이들에게는 고작 일주일도 안 지났을 뿐이니.

“뒈질 뻔하긴 했지.”

엔크리드는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실제로는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순 없지 않나.

“좀 보죠.”

작센이 다가와 옆구리 상처를 들췄다. 엔크리드는 몸을 돌려 보기 편하게 상의를 들어 올렸다.

“네가 본다고 아냐?”

렘이 툴툴거렸지만, 작센은 상큼하게 무시하고 엔크리드의 상처를 살폈다.

“별거 아니야.”

엔크리드가 말했다.

“뼈는 안 상했지만, 가벼운 상처라고 얕보다가는 고생합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

“연고는 발랐어.”

“다행이군요.”

작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 나가서 교전이 있었나 보네요?”

왕눈이가 엔크리드의 꾀죄죄한 몰골을 보며 말했다.

머리는 기름이 졌고, 전투 후에 쉬지도 않고 도보 행군을 이어 온 탓에 눈 밑이 퀭했다.

임무 내내 제대로 씻는 건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부족했으니, 몰골이 꾀죄죄한 건 당연했다.

‘교전 정도인가, 아예 적진 안을 한번 들쑤시고 왔지.’

솔직히 다 말할 필요는 없기에 그냥 그렇다는 시늉으로 고개만 끄덕여 줬다.

오자마자 렘과 라그나의 전투를 보는 바람에 땀을 또 흠뻑 흘려 몸이 노곤했다.

그러니 지금은.

“먹을 거 없냐? 물도.”

먹고 쉴 때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검을 휘둘러 보고 싶으나, 지금 몸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키다리 풀밭에 모인 적을 봤을 때, 이 전투가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것 같다.

고로 또 전장에 나서야 할 것 같으니, 몸 상태를 끌어올려 놔야 했다.

“씻고 오슈. 왕가의 만찬으로 차려 드리지.”

렘이 웃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 개울로 향했다.

괜히 보병 진지를 이곳에 둔 게 아니다. 뒤쪽으로 개울이 흘러 식수를 구하기도, 몸을 씻기도 쉬웠다.

물에 손을 넣으니, 훅하고 찬 기운이 올라왔다.

‘추워지는군.’

기온이 떨어질 시기이긴 했다.

엔크리드는 얼굴을 대강 헹구며 주섬주섬 입은 걸 벗고 몸에 묻은 피와 기름, 땀과 때를 씻어 냈다.

‘그놈.’

씻다 보니 이번에 겪은 일이 절로 머릿속을 채웠다.

키다리 풀밭, 매복, 깃대를 지나서 마지막 검과 횃불을 들고 있던 놈까지.

‘다시 만날 것 같은데.’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할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다.

‘이게 그 벽인가.’

눈 없는 뱃사공이 말하지 않았던가.

벽이 끝없이 자신의 앞을 막을 것이라고.

걱정은 되지 않는다. 막으면 넘어서면 그뿐.

솔직히 말하면 은근히 기대도 됐다.

그 자식과 승부를 겨루지 않고 돌아온 게 못내 아쉬울 지경이었으니까.

물론 승부를 내는 순간, 죽는 건 자신이겠지만, 그래도 피하고 싶진 않았다.

한번 붙어 보고 싶었다.

그 자식을 보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호승심이 생겼다.

가끔 보다 보면 이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와 반대로 싸워 이기고 싶은 상대 말이다.

그리 몸을 단장하고 돌아가니, 온기가 도는 수프와 빵, 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기 꼬치구이까지 있었다.

이 정도를 왕가의 만찬이라 할 순 없지만, 전장에서 보기 드문 성찬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토끼?”

엔크리드의 물음에 렘이 에헴 하고 나서서 말했다.

“내 친히 준비했수다.”

“아니, 렘이 아니라 제가 구한 거잖아요.”

그러자 왕눈이가 눈을 흘겼다.

“그래. 고맙다.”

엔크리드는 앉은 자리에서 게눈 감춘 듯 음식을 먹어 치웠다.

“항상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분대장은 참 잘 드슈.”

“잘 먹어야 힘을 내니까.”

“분대장은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독특한 인간이우.”

먹는 데 옆에서 구경한다 싶더니, 렘이 팔짱을 낀 채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뱉었다.

여긴 사고뭉치 분대고, 그중에서도 아군 폭행이 취미인 놈한테 독특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다니.

“너한테만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

그 말에 렘이 또 낄낄 웃었다.

그 뒤 분대원은 다 제각각 흩어졌다.

작센은 볼일이 있다며 나갔고, 크라이스는 장사할 시간이라고 나갔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한쪽에서 기도를 시작했고 렘은 낄낄 웃으며 막사 밖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지나는 다른 병사를 보며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라그나는 물끄러미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자꾸 느껴졌다.

“왜?”

시선이 신경 쓰여 엔크리드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냥 봤습니다.”

반쯤 비스듬히 누운 채로 라그나가 답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갸웃하자, 라그나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몸을 돌렸다.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더 묻진 않았다.

이제까지 사고뭉치 분대를 이끈 경험으로 알았다. 지금은 물어도 대답이 안 나올 것이다.

이런 경우 기다리면 나중에 다시 말을 꺼내곤 했다.

말을 안 꺼내면 뭐, 그냥 넘어가는 거고.

임무에 돌아온 뒤였으니, 불침번도 식사 당번도 다 열외였다.

엔크리드는 잘 먹고 푹 잤다.

작센의 연고는 효력이 좋았다. 옆구리 상처가 금세 아물었다.

이 정도면 이틀만 쉬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누워 쉰다고 해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낸 건 아니었다.

‘열이면 열, 다 질 것 같긴 하지만.’

엔크리드는 앉은 채로 머릿속에서 연신 검을 휘둘렀다.

첫 상대는 렘, 다음은 라그나, 그 뒤에는 적지에서 만난 적.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한적한 해안 도시에서 검을 가르치던 늙은 검사는 말했었다.

“눈먼 칼에 죽고 싶지 않으면 너한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행운의 여신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비는 것이고.”

하나는 운에 맡기라는 거였고.

“두 번째는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거다.”

목숨 반 개쯤 걸고 싸웠는데 살아남았다면 그 싸움은 재산이 될 거라 했던가.

해안 도시의 늙은 검사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럼 그 목숨 반 개를 걸고 싸워 살아남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궁리다. 생각이다. 고민이다.

끝없이 방법을 생각하라 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적을 마주했다면 그때는 첫 번째 방법에 모든 걸 기대야 할 거라고.

그렇게 되기 싫으면 평소에 궁리하라 했다.

‘괜찮은 선생이었어.’

그때의 엔크리드에게 딱 맞는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 조언은 지금도 빛을 발했다.

엔크리드는 궁리하고 생각했다.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소한 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발악이 발렌 식 용병검이었다.

누군가는 조악한 속임수라 말하는 그 검술이 바로 엔크리드가 가진 핵심 기술이기도 했다.

속임숨, 박치기를 포함한 삼검류, 단검이나 돌을 던지기 위한 발검술 등.

실제로 당하고 나면 얼토당토않고 허무한 기술이지만, 처음 접하는 상대나 어설픈 실력의 상대에게는 잘 먹혔다.

머릿속의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렀다.

찌르기의 자세를 잡고 돌을 던지고.

검을 뽑는 척하다가 쓰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렘은 도끼를 휘둘러 다 쳐 냈고, 라그나는 발을 놀려 다 피했다.

그리고 검과 횃불을 든 상대는 돌이 날아오는 걸 무시하고 달려와선 검을 찔러 자신의 심장을 쪼갰다.

실제로는 상상한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엔크리드가 가진 심상에서는 그렇게 움직였다.

‘다시.’

수없이 궁리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하루를 꼬박 보내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 때는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고된 임무를 마친 뒤였다. 피로가 쌓인 참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크라이스가 아침 배식을 받아 왔다. 멀건 수프와 소금기가 가득한 마른 육포, 푸석푸석한 빵이었다.

“네가 당번이냐?”

“네, 아주 푹 자던데요?”

“피곤했으니까”

크라이스는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말해 봐요.”

크라이스, 왕눈이는 전장의 정보통이다.

엔크리드는 말하려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꼭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금세 알려질 일이었고, 딱히 기밀이라고 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너무 세세하게 말해 줄 순 없어서 키다리 풀밭에 적이 매복해 있다는 말만 남겼다.

자세히 설명하자니, 대답이 궁하기도 했고.

“이런 젠장. 매복까지 했으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단 건데, 근데 거기에 매복하는 게 의미가 있나?”

왕눈이는 전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면서 가끔 정곡을 찔렀다.

‘의미 없지.’

기실 정찰대의 루트가 거기로 잡히지 않았다면 걸리지도 않고 넘어갔을 것이고.

자신에게 오늘을 반복하는 재주가 없었다면 정찰대가 전멸하는 정도로 넘어갔을 일이다.

매복이란 공격을 대비한 전술이다.

그런데 아군은 키다리 풀밭을 향해 진격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의미는 없다.

왕눈이가 말한 게 그거였다.

“아직은 모르지.”

모른다. 그게 정답이었다.

윗선에서 뭔가 꾸미는 게 있겠거니 했다.

다만, 뭔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 깃대, 그걸 지키던 놈까지.

부대 배치만 봐도 접근하는 적을 말살할 의지가 충만하게 느껴졌으니까.

보통이라면 그렇게까지 부대를 운용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결론, 적은 뭔가를 준비했다는 거다.

“씁, 이번에는 이대로 끝날 줄 알았더니.”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명령이 내려올걸?”

시답잖은 얘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게 들렸다.

“이동이다. 4중대 이동한다!”

4소대장의 목소리였다.

“다리를 다친 건 아니지?”

밖에서 외치던 그가 엔크리드의 천막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엄청나게 고생했다며?”

“어디서 들었습니까?”

“소문이 파다해. 무슨 행운의 여신이 숨겨 둔 자식이라고.”

이번 일을 전부 운이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제 아빠는 누구고요?”

“알 게 뭐냐.”

엔크리드의 농담에 소대장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피곤하겠지만, 부대 이동이다. 진지에서 동쪽으로 간다니까 움직이자고.”

그 말에 엔크리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쪽이면 키다리 풀밭 쪽이다.

매복하는 걸 알고 있으니, 풀밭에 진입하진 않을 것이고.

“싸움이 있을 것 같은데, 공기가 달라졌수다.”

렘이 어느새 옆에 착 달라붙어 말했다.

“그러냐?”

“실력 늘었다고 나대면 골로 가니까 조심하슈.”

이건 걱정하는 걸까, 저주하는 걸까.

4중대뿐 아니라 보병대대 전체의 이동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전투에서 끌고 나온 보병 병력의 대부분이 움직였다.

소대 하나의 병력이 대략 마흔이니까.

얼추 보병 육백의 이동이다.

착착-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보병대가 이동하고.

당일은 전투가 없었다.

이동해서 다시 간이 진지를 꾸렸다.

불을 피우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지휘관이 머리에 화살촉이 꽂히지 않고서야 키다리 풀밭으로의 돌격 명령 따위를 내리진 않을 테니, 아마도 이쪽 부근에 부대를 이동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거로 보였다.

그리 하루를 보내고 나자, 옆구리 상처가 거의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음날, 각자 분대에서 알아서 식사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분대원 여섯이 모여 냄비 하나에 스튜를 끓였다.

“오는 길에 도마뱀을 잡았습니다.”

작센이 스튜에 피를 뺀 도마뱀 고기를 넣었다.

“어쩐 일로 기특한 짓을 하는구나.”

그걸 보고 렘이 심히 기뻐했다.

물론 작센은 대거리하지 않았다.

렘이 그걸 보고 또 자기 말을 씹는다고 으르렁거렸으나, 작센은 그 또한 무시했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한쪽은 떠들고 한쪽은 무시하는 게 어째 합이 맞는 것 같았다.

군대는 이동하고 먹고 쉬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그리고 그리 이동하며 먹는 내내 엔크리드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빤히 자신을 보는 눈이 있었다.

라그나였다.

“얼굴 닳겠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라그나가 시선을 돌린다.

“아닙니다.”

뭔가 말할 게 있어 보이는 건 확실해 보였다.

당장 전투가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가 살벌해졌지만, 다시 하루가 더 지나갔고.

엔크리드는 남는 시간에 심상으로 훈련한 것들을 몸으로 구현해 봤다.

어떤 건 생각한 것보다 쉽게 됐고, 어떤 건 어려웠다.

아침부터 그렇게 검을 쥐고 한쪽 구석에서 휘두르고 있자니, 라그나가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주변에 말 못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라그나도 말재주가 있는 쪽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말하는 쪽이지.

그러니 듣는 쪽에서 잘 들어줘야 했다.

그런 면에서 엔크리드는 적임이었다. 라그나가 한 말을 대강은 알아들었으니까.

긁적.

엔크리드가 손가락으로 제 이마 위를 긁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