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깃발은 나부끼고 병사는 칼춤을 춘다 (1)
“검 꼭 배워야 합니까?”
라그나는 말했었다. 독설이었다.
그만큼 몸이 안 따라 준다는 말이었는데,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 둔함 몸에 우직한 노력만을 보태며 살았다.
다만, 그래도 그동안 수없이 많은 교관을 만나고 검술을 익히고 홀로 궁리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의 사고는 유연했고 더불어 응용력이 뛰어났다.
처음 익히는 게 어렵지, 익히고 난 뒤 실전에 돌입하면 달랐다. 사실상 하나의 재능은 타고난 법이다.
유연함과 응용력, 그게 엔크리드가 가진 재능이다.
‘상황에 맞게, 필요에 맞게, 뭐든지 그렇게 쓰면 돼.’
나우릴리아 왕국 기준으로 치면 잘해야 중급 이상.
용병 업계로 쳐도 중급.
어디를 가도 중간쯤 되는 실력, 그게 지금 엔크리드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과 별개로 실전에서의 전투력은 탁월했다.
본래 미천한 재능으로 살아온 삶이었기에.
엔크리드는 자신이 가진 걸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병사의 창날이 날아온다.
예민해진 귀가 붕 하는 파공성을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 정확하진 않지만, 방향은 잡아챘다. 상대의 동작도 머릿속에 그렸다.
‘옆으로 도는 발.’
엔크리드는 스텝을 밟았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가져다줬다. 왼발 뒤꿈치에 힘을 주고 오른발은 뒤로 빼며 몸을 돌린다.
그 한 수에 팽하고 창날이 눈앞을 스쳐 갔다.
안개에서 갑자기 창날만 날아오는 판인데도 엔크리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수십 번은 자신을 찔러 죽인 창이었다.
첫 번째 창질만 이백 번 넘게 피했다.
엔크리드는 검을 뽑는 대신 창대 중간을 잡고 당겼다.
훅- 하고 끌려온 적병이 놀라 입을 연다.
“어?”
적병이 머리가 안개를 뚫고 나오고 엔크리드는 그 머리를 잡아 비틀었다.
우드득.
병사의 목이 부러졌다. 목이 부러진 사람은 살 수 없다.
목이 부러진 적병이 바닥으로 허물어지고 엔크리드는 죽은 적병의 창을 들었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퍼지기 전 적의 진형을 떠올렸다.
전부 뭉쳐 있었다.
‘아무 데나 던져도 누구 하나는 맞는 거지.’
왼발로 땅을 찍으며 힘껏 내던졌다.
창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선 퍽 하고 어딘가에 박혔다.
“꺽!”
단말마가 들렸다.
“뭐야?”
“미친!”
적병의 당황하는 소리도.
창을 던지고 귀를 기울이던 엔크리드가 몸을 바짝 숙여 앞으로 달렸다.
안개를 뚫고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발밑으로 짓쳐들어오는 사람을 보긴 어려울 것이다.
투두두둥!
쿼렐과 화살이 머리 위를 날았다.
“으악!”
“끅”
“시발, 화살이다!”
뒤편에서 아군의 비명과 욕설이 터졌다. 솜털이 쭈뼛 설 법도 하지만, 괜찮다. 이미 수차례 해 본 일이었다.
오히려 긴장감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엔크리드는 거리를 좁히며 롱소드를 뽑았다.
청각으로 거리감을 가늠했는데 정확했다.
스릉!
검을 뽑아 양손에 쥐고 그대로 상단 수평 베기를 변형해 검을 휘둘렀다.
본래 상단 수평 베기는 가드로 상대의 검을 막고 뒷날로 베는 기술이다.
엔크리드는 멋대로 그걸 바꿨다.
자세는 비슷했다.
바닥과 수평이 되게 정수리 위로 검을 들고 그립을 바꾼다.
엄지를 세운 섬 그립이다.
그 자세 그대로 검으로 원을 그렸다.
바짝 낮춘 자세 때문에 상단 수평 베기가 하단 수평 베기가 됐다.
말도 안 되는 자세였기에 검에 힘이 제대로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의외의 일격이었다.
적군이 반응하지 못했다.
부우웅!
퍽! 퍼벅!
휘두른 칼날에서 저항감이 느껴졌다.
“악!”
“뭐야!”
“바닥이다!”
어이쿠, 빨리도 보시네, 안개를 뚫고 나아가 위로 솟으니 적병이 보였다.
그래 봐야 시야각은 고작 검이 닿는 범위까지 정도였지만, 그나마 이게 어딘가.
적이 보이고 적이 든 무기가 보이고 자신이 쥔 검이 보이니.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정강이가 크게 베인 놈이 셋이었다. 세 놈이 피를 줄줄 흘리며 절뚝거렸다. 전부 쇠뇌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중 하나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쇠뇌를 겨눴다.
엔크리드는 지나치는 스텝을 밟았다.
왼발을 대각선 앞으로 뻗어 나아가며 오른발이 뒤따랐다.
순식간에 그의 위치가 변했다.
퓽 하고 날아간 쿼렐은 그가 있던 자리를 꿰뚫었다.
엔크리드는 쿼렐을 피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피한 것과 동시에 정수리 베기를 시도했다.
위에서 밑으로 묵직한 롱소드가 떨어졌다.
쇠뇌를 들고 있던 적병이 반사적으로 숏소드를 뽑더니, 롱소드와 십자 모양을 만들며 막으려 했다.
엔크리드는 그걸 힘으로 찍어 눌렀다.
쩡! 꾸드득!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숏소드의 반대편 날이 가죽 투구를 누르고 적병의 머리에 파고들었다.
베는 게 아니라 때려 부수는 것 같았다.
뿌그륵.
피거품과 함께 머리통이 깨진 놈이 뒤로 넘어갔다. 안으로 움푹 파인 가죽 투구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 적병의 얼굴 앞에 빨간 커튼을 쳤다.
“끄, 끄.”
머리통이 깨진 적병은 말을 잇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더니, 눈이 흐려졌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검을 회수, 뒤로 한 걸음 빼며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로 보병용 단창이 휙 하고 날아왔다.
창날이 왼쪽 옆구리를 스쳤다. 천 갑옷이 조금 뜯어졌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피한 다음에 검을 내지른다.
빨리 휘두르는 게 아니라 천천히.
창을 휘두른 놈이 반사적으로 단창을 당겨 창대로 칼날을 막았다.
퉁.
검과 창대가 만났다.
그 상태 그대로 검이 창대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진하는 걸음과 더불어 바인드 후, 따라 베기.
드드드드드드!
창대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퍽!
검의 종착점은 적병의 가슴이었다. 순식간에 창대를 타고 내려간 칼날이 적병의 가슴을 헤집었다.
살이 파이고 뼈가 깨진다. 검을 뽑자, 팍 하고 피가 쏟아졌다.
핏줄기가 엔크리드의 가슴팍을 적셨다.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 그대로 검을 회수하며 일어났다.
툭 하고 무릎을 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까지 배운 건 기본기였다. 안 좋은 버릇을 버리고 새로이 쌓는 시간, 냉정하게 보자면 이제 겨우 이전 수준에 다다른 거였다.
다만, 발렌 식 용병검을 중심으로 한 검과 검술의 기본기를 단련한 지금은 가진 게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숫제 사자의 등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엔크리드의 유연한 사고는 실력 이상의 성과를 내보이게 했다.
남은 병사 사이로 피에 젖은 검이 움직인다. 엔크리드는 말없이 칼춤을 췄다.
* * *
깃발 부대가 여섯.
아즈펜 공국의 지휘관은 생각했다.
‘혹시 주술이라는 걸 알아채도, 저 여섯 개 중 뭘 쓰러뜨려야 하는지는 알아채지도 못할 테니.’
승리다. 이제는 어떤 승리를 가져갈 것인가 대해 고민할 차례였다.
“퇴로 끊어.”
독립 유군으로 놔둔 그레이 독 부대가 움직였다.
나우릴리아 왕국군의 뒤쪽이다.
이제 안개에 화들짝 놀란 놈들이 도망가려면 그레이 독 부대를 만날 것이다. 지휘관은 명령하고 자신의 작전에 오류가 없는지 되새겼다.
없었다.
프록 장군이 와서 이번 일이 실패하면 안 된다고 다시금 확인하고 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장군급 인사가 이쪽 전장까지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지휘관이 재차 명령했다.
“다 죽여라.”
이번 전투로 아즈펜과 나우릴리아는 처지가 달라질 것이니.
그의 명령이 떨어지는 사이, 제1 깃발 부대에서 엔크리드는 칼춤을 추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나우릴리아의 대대장은 끔찍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선수를 뺏겼다.’
적이 준비한 게 있다면 이쪽도 준비한 게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병력을 다 잃으면 준비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퇴각해! 퇴각!”
여기저기서 퇴각하란 소리가 울렸다.
대대장은 침착하지 못했다.
“끄억!”
뒤로 물러나는 아군 뒤에서도 쿼렐이 날아들었다.
‘빌어먹을 쇠뇌 부대들!’
대대장은 아찔함을 느꼈다.
용케도 저만한 숫자의 쇠뇌를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정찰대의 보고에서 이미 답이 나왔었다.
‘키다리 풀밭!’
지금 한가하게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대대장의 뇌가 현실에서 도피했다.
“정신 차려! 뭉쳐라!”
그나마 실력 있는 중대장 둘이 부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적군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뒤를 물러온 부대는 그레이 독.
아즈펜 공군이 자랑하는 독립 중대였다.
대대장은 당했다는 걸 인지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했다.
“몰살의 안개입니다! 아즈펜 공군에서 주술사를 부렸습니다!”
개 같은 새끼들.
“안개를 걷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부관 중 답을 하는 이가 드물었다.
“아는 놈 데려와!”
앞은 안 보이고, 앞뒤로 적군이 아군을 두들기고 있다.
이대로라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아니, 전멸할 것이다.
곧 부관이 답을 가져왔다.
“주술의 매개를 부숴야 합니다!”
매개? 깃대다.
“깃대를 향해 돌진해!”
대대장이 외쳤다.
“……깃대가 어느 방향인지 모릅니다.”
부관이 절망적인 말을 토해냈다.
처음 보였던 적군은 톱니바퀴처럼 자리를 바꿨다. 뱅뱅 돌았다. 그래서 적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대대장은 전멸이란 두 글자를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대대장이 끙끙 앓는 사이, 4중대를 책임지는 요정 중대장은 적이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게 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반전이 없으면 다 죽겠는데.’
그녀는 전장에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바람이 불어오지 않았다.
전투는 대패했다.
요정 중대장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도주하는 그녀의 뒤로 안개가 걷혔다. 전멸이었다. 살아남은 아군이 오십도 되지 않을 터였다.
* * *
챙!
엔크리드는 잘 싸웠다. 정말 엄청나게 잘 싸웠고, 또한 만족스러웠다.
아군은 전멸에 가까웠지만, 그 혼자서 대략 스물에 가까운 병사를 눕혔다.
검을 쥔 손에 피가 흐른다.
조금 전 전투에서 팔뚝을 베인 탓이다.
‘힘이 안 들어가.’
이제까지 기본기 훈련에만 시간을 투자했다.
라그나는 완성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몸에 붙은 나쁜 버릇을 없애기 전까지는 대련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곤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전장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하네요.”
자기가 말해 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장 한복판에서 나쁜 버릇을 없애기 위해 싸우지 말라니.
그럼 얌전히 죽으라는 건가.
하지만 엔크리드는 할 수 있었다.
얌전히 목숨을 내놓고 죽는 것으로 그는 실전을 배제했다.
그리고 오늘에야 처음으로 실전에서 실력을 선보인 거고.
‘달라.’
이제까지는 발렌 식 용병검이든 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중심에 선 게 검술이 됐을 뿐.
‘더 배우고 싶다.’
배움의 욕망이 더 치솟는다. 고작 기본기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홀로 2개 분대의 병력을 죽인 엔크리드를 두고 적군은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 안쪽에서 버티다 보니 엔크리드의 시야가 더 열렸다.
주술로 만든 안개가 더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앞으로 적군이 반원을 그리며 선 게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전부 쇠뇌가 들려 있었다.
“사나이답게 일대일로 겨루자.”
기본기를 통해 얻은 실력을 한 번이라도 더 시험해 보고자 말하니.
“미친 새끼.”
적의 분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말했다.
투두두둥!
쇠뇌가 현을 튕긴다. 쿼렐이 전신에 박혔다.
눈에 박힌 쿼렐이 끔찍한 통증을 가져왔다.
‘괴롭다.’
하지만 또한 기쁘다.
죽어 가는 동안 엔크리드는 반복된 오늘에서 할 일을 떠올렸다.
라그나는 계속 기본을 강조했다.
“단련하고 또 단련하고 목숨 걸고 계속 싸우다 보면 음, 언젠가는 몸에 붙긴 할 겁니다.”
대단히 무책임한 말이긴 했으나, 의미는 있었다.
엔크리드는 실전이 더 필요했다.
죽음이란 두 글자가 전신에 내려앉는다.
마지막 숨이 나오기 전, 적병 하나가 엔크리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독한 새끼.”
그때까지도 엔크리드는 검을 꽉 쥔 채였다. 그가 흘린 피가 바닥에 고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령 죽는다고 해도 검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게 첫 번째입니다.”
무수히 많은 교관이 말했고 라그나도 말했으며 렘도 같은 말을 했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했다.
“퉤!”
동료를 수없이 잃은 적병 하나가 엔크리드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거로 끝이었다.
* * *
아침이 밝는다.
다시 새로운 오늘이 시작됐고.
엔크리드는 어제의 싸움에서 얻은 걸 곱씹었다.
‘실전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그는 라그나를 다시 붙들어 배웠고.
“기본기는 얼추 갖춰졌는데 평생 혼자 수련만 한 사람 같네요. 근데 어디서 배운 거죠? 검술의 기초?”
그 말이 맞다. 자신도 느낀 바다. 지금 필요한 건 실전이었다.
“여기저기서.”
“……여기저기서? 씁, 그래요, 그렇다고 치고. 대련으로 몸에 익은 걸 언제든 나오게 하는 게 좋긴 하겠네요. 그리고 선생이 누군지 모르지만, 잘 가르쳐 놨네요.”
그 선생이 너다.
라그나는 자기도 모르게 제 얼굴에 금칠을 했다.
엔크리드는 그러냐고 대꾸하곤 대련에 힘썼다.
그 또한 어찌나 즐겁던지.
다시금 반복된 전투에서 엔크리드는 홀로 서른 명의 병사를 벴다.
오롯이 실력으로만 벤 건 아니었다. 쿼렐과 화살이 날아드는 중이었으니까.
그걸 요리조리 피하며 이뤄 낸 일이다.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실전을 늘릴 수 있었다.
몇 번의 오늘을 다시 반복했다. 그리고 또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기본기라 이름 붙은 것들이 몸에 착하고 완벽히 달라붙었다.
“기초적인 부분에서는 내가 손댈 게 없습니다.”
결국, 라그나가 이리 말하게 될 정도로 엔크리드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