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깃발은 나부끼고 병사는 칼춤을 춘다 (2)
“눈, 발, 손.”
라그나는 말했다.
“눈으로 시작해 발을 움직여 손으로 끝내는 겁니다. 검은.”
그 말대로 했다.
눈으로 봄으로써 상대의 동작을 예측, 발로 움직여 위치를 잡고 검은 마무리를 위해 움직일 뿐.
훙.
다음 실전에서 그걸 몸소 실천했다.
보고 피하는 게 아니라 예측하고 피했으니, 상대의 공격선은 엔크리드를 향하지 못했고 엔크리드의 공격선은 적에게 닿았다.
검을 내지르는 건 확인 작업일 뿐이었다.
푹!
검이 목울대를 뚫었다. 그대로 검을 옆으로 빼내자, 근육과 신경, 혈관이 잘리며 피가 꿀렁꿀렁 쏟아졌다.
엔크리드는 적병을 죽이자마자 바닥을 굴러 옆에 서 있던 다른 병사의 정강이를 폼멜로 찍었다.
우직!
따로 보호대도 차지 않았으니, 뼈가 부러지는 건 당연했다.
“끄억!”
쓰러지는 놈이 버둥거렸다. 엔크리드는 옆에 굴러떨어진 쿼렐을 뽑아 놈의 심장에 꽂았다.
갑옷 때문에 화살이 반만 박혔다. 그걸 일어나며 발바닥으로 콱 눌렀다.
푹- 소리를 내며 쿼렐이 자루 끝까지 박혔다.
죽은 놈을 한 손으로 들어 옆으로 기울였다.
퍼퍼벅 하고 쿼렐이 시체에 박혔다.
여기서 엔크리드는 작은 실수를 범했다.
픽 하고 쿼렐 하나가 허벅지를 스쳤다. 기동성이 떨어지면 적군 사이에서 날뛰기 어렵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서른둘.
하루 사이 둘을 더 죽였다.
그것도 중간에 실수가 있었는데도.
‘눈, 발, 손.’
눈으로 보고 발로 움직여 손으로 끝낸다. 실전으로 몇 번 더 익히면 좋을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그러며 반복한 오늘을 통해 적의 움직임도 얼추 파악했다.
‘깃대를 지킨다.’
그러면서 한쪽 방향으로 뱅뱅 돈다. 하루를 정면으로 돌격했다면 다음 날은 그 좌측으로 내달렸다.
한 번도 깃대를 꺾은 적은 없었지만,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긴 했다.
엔크리드는 갈증을 느꼈다.
자신한테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혼자서는 안 되는 건가?’
그렇다면 렘이나 라그나를 동반하면 되는 일인데, 오기가 생겼다.
제대로 된 검술을 배웠고 익혔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고 싶었다. 조바심을 내는 건 아니었으나, 나아갈 때라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해 보고.’
이게 만약 오기를 부리는 것에 지난다면 그 뒤에 달리 판단하면 된다. 엔크리드에게는 오늘을 반복해서 얻은 기회가 있었다.
“씨, 너 뭐냐?”
몇 번의 전투 끝에 적의 소대장을 마주했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놈인데, 수염을 쥐새끼처럼 길렀다.
“뭐겠냐.”
엔크리드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대담하게 나올 순 없었다. 아즈펜 공국의 쥐 수염은 침을 꿀떡 삼키곤 창을 내질렀다.
“재수 없는 놈.”
* * *
죽고 깨어난 뒤, 다시 훈련이었다.
“정중환쾌유.”
눈, 발, 손이라는 개념이 익숙해지자 라그나는 다음으로 나갔다.
기본기만 익숙해지려고 했던 게 어느새 검술의 역사와 개념까지 왔다.
“운 좋게도 분대장이 배운 게 저랑 뿌리가 같습니다.”
당연했다. 라그나가 가르쳤으니까.
“교관 중에서 특별히 괜찮은 사람 걸 따라 했는데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엔크리드는 되지도 않은 말을 뱉었으나, 라그나는 믿을 도리밖에 없었다.
아니면 말이 되지 않으니.
하루 만에 실력이 늘어난 건 그렇다 칠 수 있었다. 기본기를 홀로 계속 단련했으되 쓰는 방법을 몰랐다면 이럴 수도 있으니.
물론 이 또한 몹시 특이한 일이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북방식 중검술의 기초가 몸에 자리 잡은 것도 같은 개념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따져서 뭐 하겠나.
분대장은 자신의 과거를 따진 적이 없다. 그럼 자신도 그렇게 해야 했다.
“압니까? 정중환쾌유.”
라그나의 말에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중환쾌유.
정검, 중검, 환검, 쾌검, 유검을 말한다.
풀어 말하면.
바르고 정교한 검.
무겁고 세찬 검.
홀려 흔드는 검.
빠르고 또 빠른 검.
부드러워 흘리는 검.
500년 전, 불세출의 천재가 태어났다.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아이로, 그는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천재는 9살 때부터 농가를 습격한 도적 나부랭이를 부지깽이 하나로 죽였으니까.
고작 9살에 성인 도적, 검 좀 쓴다는 놈을 죽였다. 그것도 열둘이나.
“이게 검술이군요.”
9살 아이는 조숙했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탓이라 했다.
도적이 검을 휘두른 걸 보고 아이는 검술의 원리를 깨달았다.
이후, 어린아이가 부지깽이 하나로 도적 열둘을 죽였다는 걸 들은 한 귀족이 아이를 찾아갔다.
그는 그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이의 이름에 오니악이란 성이 붙었다.
리오네시스 오니악.
천재는 그렇게 이름을 얻었다.
리오네시스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만한 불운도 타고난 몸이었다.
그는 10살 때쯤부터 사지에 힘이 빠지는 병에 걸렸다.
대륙의 어떤 마법사와 의사와 치료사도 손댈 수 없는 불치의 병이었다.
열둘이 되기 전 전신이 마비되는 병이었다.
병에 걸렸음에도 오니악 가문은 리오네시스를 내치지 않았다.
불운의 천재는 그대로 잊힐 뻔했다.
하지만 스물이 된 리오네시스는 전신이 마비된 채로 대륙 검술의 한 획을 긋는다.
그는 이제까지 나온 모든 검술을 총망라해 다섯 개로 나눠 집대성했다.
그게 바로 정중환쾌유다.
정검, 중검, 환검, 쾌검, 유검.
몸을 쓸 수 없음에도 검술의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또한, 이게 바로 오니악을 제국 최고의 가문으로 바꾼 역사의 시작이었다.
리오네시스가 만든 검술 유파는 대대로 이어졌고, 이제는 정론이 되어 굳어졌다.
지금은 북방식 중검, 중앙식 정검과 유검, 서방식 쾌검, 남방식 환검, 동방식 기검(技劍)으로 나눠 말하곤 했다.
대륙은 크게 다섯 개로 나뉘는데, 그 대륙마다 무기술의 발전이 달랐다.
“북방식 중검을 쓰기 위해 제가 개발한 기술이 있습니다. 짐승의 내장보다 더 쓸 만할 겁니다.”
여전한 햇볕과 바람이 부는 오늘이었다. 이날 엔크리드는 라그나에게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렘에게 야수의 심장을.
작센에게 칼날의 감각을.
그리고 라그나는 한 점의 집중이라는 걸 가르쳤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변 모든 것을 잊고 상대를 눈에 담아서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눈에 담지 말고 집중하는 겁니다.”
설명이 개판이었다.
“중검의 기초는 기본기에 그 실체가 있습니다. 막아도 부수는 검, 알고도 못 피하는 검, 일격에 전력을 쏟아붓는 검이라는 별칭이 있죠. 그렇게 하면 됩니다. 집중해서.”
그게 집중해서 된다면 안 되는 놈은 뭐란 말인가.
“요령은 조금 가르쳐 주죠.”
말과 함께 라그나의 검이 빛살이 됐다. 검을 바꾼 뒤, 아직 손에 익지도 않았을 텐데, 검날이 보이지도 않았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팔조차도 안 보였다. 그저 번쩍하는 순간, 뭔가 목 옆을 지나쳤다.
픽.
칼날이 목 가죽을 스쳤다.
얼마나 검이 빨랐는지, 목 가죽이 베인 뒤에야 깨달았다.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주르륵하고 피가 흘렀다.
“너 이 새끼 분대장 괴롭히냐?”
렘이 어느새 나타나 눈을 부라렸다.
엔크리드가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죽을 뻔했네.’
그만큼 위험한 일격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살가죽을 베어 냈으니.
“죽는 그 순간에 인간은 수십 배 더 집중한다고 했다. 도와주는 거다.”
“이런 미친놈이, 죽은 다음에야 그런 기술을 익혀서 뭐 하게? 네가 분대장을 모르나 본데, 야수의 심장을 익히는 것도 어어어어어어엄청 오래 걸렸다. 응?”
이상한 걸 강조하는데? 어어어엄이 너무 길지 않나?
엔크리드가 뭐라 말을 하려 하니, 라그나가 콧방귀를 꼈다.
“선생이 나빴으니까.”
“응? 뭐라고 대가리에 도끼를 꽂고 싶다고?”
렘이 한쪽 손을 들어 귀 뒤에 대며 말했다.
“난 무식한 야만인이 아니다. 내 교육 방식은 합리적이야.”
합리적이라니, 엔크리드는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렘이나 라그나나 그에게는 오십보백보였다.
“근데, 너 극지 민족이면 너도 야만족 아니냐?”
라그나의 피부는 희고 눈은 붉다. 극지 민족, 북방 민족의 특징이다.
“서부 야만인이랑 같은 선상에 두지 마라. 불쾌하다. 몹시.”
“……그래, 그냥 뒈져라. 죽고 나면 내가 손수 북쪽까지 가서 묻어 줄게.”
놔두면 또 한바탕할 것 같았다. 엔크리드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끼어들어 말했음에도 라그나는 엔크리드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분대장이 북방의 소만큼이나 둔한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기본기를 이만큼 갖춘 건 몰랐지.”
“뭐 이 새끼야, 말 돌리지 말고 대가리나 대. 도끼를 꽂아 줄라니까.”
“미친 야만인 새끼.”
북방의 소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한다. 둔하디둔한 인간을 말할 때 쓰는 비유다. 엔크리드는 둘이 합세해 자신을 향해 자꾸 둔하다고 했지만, 억울할 건 없었다.
“요령 가르쳐 준다며.”
엔크리드는 말로 라그나를 붙들고 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이 필요 없었다. 바라만 보면 됐다.
렘은 씩씩거리다가 엔크리드가 빤히 자신을 보자, 킁 하고 코를 풀고 외치듯 말했다.
“모이라고 했수다!”
그러곤 몸을 돌려 성큼성큼 진지 쪽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야겠군요.”
그걸 본 라그나가 말했다. 뽑았던 검을 챙기려 하자 엔크리드가 손목을 붙잡았다.
“요령은?”
배움의 갈증은 엔크리드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하물며 지금 새로운 뭔가를 알려 주는 참 아니었던가.
한 점의 집중이라 했다.
컨센트레이트 원, 라그나가 예전부터 내려오던 비기를 개량한 기술이라 했고.
욕심이 났다.
“쉽진 않을 겁니다.”
기본기도 쉽지 않았다. 자세를 새로 하는 것도, 스텝을 배우는 것도, 가진 걸 버리는 것도, 베고 찌르는 걸 새로 익히는 것도.
그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럼에도 즐거웠다.
희열이 뒤따랐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즐거움이 전신을 채웠다. 기사를 꿈꾼다 했지만, 그저 검을 좋아했기에 이렇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검을 쥐고 휘두를 때 엔크리드는 세상만사를 잊을 정도로 즐거웠으니.
손목을 붙들고 있자, 라그나가 덤덤히 말했다.
“죽을 위기에 처하면 됩니다. 죽을 것 같으면 사람의 신경은 곤두서게 됩니다. 그 곤두서는 느낌을 수없이 반복하면 됩니다.”
야수의 심장을 배울 때와 요령은 비슷했다.
다만, 야수의 심장은 죽음 앞에도 대담하길 원했으나, 라그나가 말한 한 점의 집중이란 기술은 그 반대였다.
죽기 싫어 발악해야 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람의 신경을 바늘처럼 곤두서게 할 테니.
‘실전과 병행하자.’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고 움직였다.
“요령만 배운다고 되진 않을 겁니다.”
“익히면 어떤 느낌인지 말해 줘.”
“주변 모든 것이 지워지고 원하는 대로 검이 나아가는 느낌이 듭니다.”
라그나는 순순히 말했다. 엔크리드가 라그나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처음 보는 진지함이 엿보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라그나는 변덕쟁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나선 적은 처음이었다.
숨겨진 열정, 눈 속 깊은 곳에서 불꽃을 태우며 라그나가 말했다.
“갈 시간입니다.”
엔크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안개가 꼈다.
“주술? 이런 개새가.”
렘이 화를 내고.
“자세 낮추고!”
라그나가 내 달리는 엔크리드에게 외쳤다.
이전에는 말리기 바빴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라면 어쭙잖은 병사에게 당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거다.
엔크리드는 내달리며 다시금 눈, 발, 손의 순서로 적병을 상대했다.
‘쿼렐 부대부터.’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몇 번의 오늘을 반복하며 적군의 대형이 눈에 익었다는 거다.
아, 정확하게 말하면 눈에 익은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외워 버린 거지.
첫 번째 적병이 창을 내지르기도 전에 바짝 붙은 채로 단검을 위로 쑤셨다.
푹 하고 턱과 입천장을 뚫은 단검을 버리고 죽은 적병을 어깨로 밀쳤다.
“어!”
“억!”
뒤로 밀린 적병이 당황한다. 그 틈에 단검 두 개를 던졌다.
날아간 단검이 적병 둘의 목을 뀄다.
기가 막힌 솜씨였다.
그대로 롱소드를 뽑아 사선 베기.
딱!
보병용 창대가 그걸 막는다. 막히는 걸 예상했기에 창대를 때린 반탄력으로 검을 회수해 반대쪽에 있던 적병의 목을 그었다.
서걱!
잘 갈린 칼날이 적병의 목을 잘랐다.
다시금 싸움이다. 또다시 전투였다. 반복된 오늘이었다.
또 싸우고 또 죽는다.
그러며 엔크리드는 발악했다. 요령을 듣는 순간 파악했다.
대담하게 맞서는 게 아니라 안 죽으려고 발악해야 했다.
그게 중요했다. 결국, 죽음을 피할 순 없으리라.
그래도 괜찮았다. 어쨌든 원하는 걸 얻을 테니까.
물론 그 와중에 할 일도 해야 할 것이다.
‘깃대.’
주술의 매개가 되는 깃대를 공격하는 것.
실전에 목표를 덧씌운다. 엔크리드는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반복된 오늘을 통해 엔크리드는 적병의 움직임을 미리 알았다.
안개를 믿은 적병은 한 명의 습격에도 당황했다.
엔크리드는 그걸 십분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