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0화 (40/170)

40. 깃발은 나부끼고 병사는 칼춤을 춘다 (3)

매일 라그나에게 한 점의 집중을 배운 뒤 실전으로 달려든다.

그게 엔크리드가 반복하는 오늘이었다.

수없는 반복.

죽음을 거듭하면서도 한 점의 집중이란 기술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조바심 내지 말자.’

엔크리드는 생각을 전환했다. 일단 깃대부터 부러뜨려 보자고.

다시금 전투가 시작될 때.

엔크리드는 어떻게 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궁리했다.

궁리하고 고민하는 건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다시금 안개가 낀다. 죽음의 안개다. 그래서 이 주술의 이름도 몰살의 안개였다.

물론 엔크리드는 주술의 이름 따윈 몰랐다.

다만, 이대로 당할 수 없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

안개가 끼고 렘이 뭐라 외치기도 전에 엔크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부 엎드려!”

당황한 참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소대장까지 고개를 수그렸다.

“방-패!”

엔크리드가 재차 외치자, 반사적으로 아군이 방패를 든다. 왼손이 허전해 엔크리드도 방패를 하나 들고 왔다.

자세를 낮춰 달리며 비스듬히 사선으로 방패를 들자, 타다닥! 하고 쿼렐과 화살 몇 개가 방패 위로 박혔다.

기름 먹인 방패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진즉에 방패를 들고 올 걸 그랬다.’

여기를 내달리다가 쿼렐이나 화살을 맞고 싸움을 시작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피하면서 접근하는 루트도 익숙해지긴 했다.

생각하며 앞으로 달려든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았다. 안개의 영향을 벗어나려면 적군과 바짝 붙어야 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달리던 엔크리드가 갑자기 땅을 박차며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훙! 훙!

엔크리드가 있던 자리로 창날이 지나쳤다. 이미 외운 패턴이었다.

죽음의 위기를 일부러 만들어서는 한 점의 집중을 발휘할 수 없다.

발악해야 한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을 피한 뒤, 다시 달려 적군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제야 안개 너머 적이 보였다. 머리가 둥근 가죽 투구 안쪽으로 몹시 당황한 얼굴이 드러났다.

엔크리드는 놀란 적병의 발목을 걷어찼다.

“엇!”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진 놈의 머리를 방패 모서리로 후려쳤다.

뻑!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이걸 맞고 살아남는다면 그것도 운이리라.

넘어진 놈을 지나치며 롱소드를 뽑았다.

뽑는 것과 동시에 크게 휘두르자, 가까이 붙으려 했던 적병 서넛이 당황한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머릿속으로 루트를 그렸다.

반복한 오늘만 근 300일이 넘는다.

눈 감고도 길을 알 수 있었다.

깃대의 위치도, 적병의 포진도.

적병 처지에서 보자면 엔크리드의 움직임이 귀신 같아 보일 터였다.

* * *

아즈펜 공국의 병사, 론은 안개가 끼자마자 내달린 나우릴리아 병사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왼쪽에서 불쑥 튀어나와 아군을 서넛을 썰더니, 갑자기 픽 하고 사라진다. 정말 그래 보였다.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실상은 갑자기 자세를 낮춘 것뿐이지만.

“끄억!”

“밑이다! 밑이야!”

론은 자신의 주변을 감싼 안개가 주술이나 마법으로 만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이 안개는 아군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짙게 뭉친 안개 부분은 시야를 방해하긴 했다.

가령 발밑 같은 곳 말이다.

그러니까 가슴 위로는 잘 보이는데 바닥은 잘 안 보인다. 적은 마치 그걸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죽여!”

“이 씹!”

여기저기서 소란이 인다. 적병은 몸이 열 개라도 되는 듯 움직였다.

론은 긴장했다. 언제든 주변에 나타나면 단숨에 머리통을 후려칠 생각이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꺽!”

“으억!”

“여기다!”

놈은 여전히 바닥에 깔린 안개를 제집처럼 거닐었다.

론은 침을 꼴딱 삼켰다. 당장이라도 코앞에 칼날이 날아올 것 같았다. 오줌이 마려웠다. 그런데 한참이나 적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긴장감이 극에 달할 무렵.

“깃대를 꺽!”

뒤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론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소대장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모습과 그 옆에서 몸을 일으키는 적병이 보였다.

바닥에 깔린 안개를 헤치고 일어나는 모습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해골 병사 같았다.

‘혼자였나?’

안개를 헤치고 이 난리를 친 게 혼자라고?

놈은 양손으로 검을 쥐고 깃대를 후려쳤다.

빡!

묵직한 한 방에 깃대 중간이 부러졌다. 깃발이 옆으로 기울어 떨어진다.

조금 전까지 바람에 파라락 소리를 내던 깃발이 소리와 움직임을 잃었다.

펑.

떨어진 깃발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흙먼지 사이로, 적병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보였다.

론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다 다시 적군이 움직였다.

“죽여, 죽이라고!”

누군가 죽어 가며 적병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훌륭했다. 목숨을 도외시한, 아즈펜의 정예병다운 행위였다.

아군이 그 위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왼쪽 옆구리에 창 두 개를 꽂고 허벅지에 쿼렐 다섯 개가 박힌 적병은 피를 줄줄 흘리며 물었다.

“왜 안개가 안 걷히지? 주술의 매개가 맞는데.”

죽은 소대장 대신, 분대장이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놈아, 왜 깃대가 여섯 개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분대장은 말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죽을 놈이다. 이걸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다섯 개는 속임수고 하나만 진짜였구나.”

“미친 자식.”

“한 점의 집중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하긴 이제까지 쉬운 게 없었지.”

“뭐라는 거냐?”

“후, 집중, 집중, 집중.”

“정신 나간 새끼가.”

팍!

적병은 묻고 답을 듣더니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렸고, 그걸 보던 론은 참지 못하고 창대를 휘둘렀다.

머리통이 터지며 피가 튀었다.

맞은 놈이 바닥에서 사지를 꿈틀거리며 피를 뿜어냈다.

“끄르륵.”

피거품을 문 놈을 외면한 론은 몸을 돌렸다.

이 한 놈 때문에 깃발 부대 하나가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판이었다.

아즈펜 공국의 대승이었다. 이 안개가 있는 한, 질 수가 없다.

* * *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전신을 채운다. 엔크리드는 고통을 잊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야수의 심장을 어떻게 배웠더라?’

‘칼날의 감각’은 암살자의 도움이 컸다. ‘야수의 심장’은 전장에서 죽기 직전까지 구르는 데 도움을 받았고.

하지만 ‘한 점의 집중’은 쉬이 되지 않았다.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이 방해를 하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몇 번 만에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됐다면 엔크리드는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었을 거다.

답답할 법도 했지만, 엔크리드는 여상했다. 초조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안 되면 될 때까지.’

마음이 다부지고 단단하기에 그는 절망과 좌절을 몰랐다.

죽음이 다시 찾아오고 아침에 눈을 뜬다. 햇볕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 점의 집중이라고 하는 겁니다. 배울 겁니까?”

라그나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처럼 계속 가르쳤고,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또 배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북방식 중검, 그러니까 이번에 라그나를 통해 중검의 기본기를 닦으며 배운 게 있었다. 작은 깨달음이었다.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거다.

‘죽음의 공포가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고?’

아무리 해 봐도 몸에 맞지 않는 옷 같기에 물었다.

“넌 어떻게 배웠는데.”

“전 그냥 됐습니다.”

라그나가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서 더 얄미워 보였다. 왜 지금 친절해지는데.

차라리 독설을 뱉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았다.

“그냥?”

“네, 주변을 잊고 집중해 금세 검과 하나가 됐죠.”

자랑하는 투가 아니었다. 말투가 덤덤했다.

“그랬냐?”

“네, 그랬죠.”

라그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엔크리드에게는 잡히지 않는 별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나 시기심이 솟아오르진 않는다. 이 정도로 마음이 무너질 거였다면 기사라는 꿈은 꾸지도 못했을 테니.

같은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라그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라며 검을 눈앞에서 멈췄다.

속도만 보자면 렘보다 빠른 것 같았다.

둘의 싸울 때 보면 렘이 더 빨라 보였는데.

엔크리드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둘의 대련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정작 자신이 상대해 보니 라그나가 더 빠른 것 같았다.

“뭐하슈? 모이라는데. 넌 뭐하냐? 분대장을 짚단 삼아 연습하냐? 나한테 전에 깨진 게 많이 억울했구나?”

“누가 깨져? 네 머리통이?”

이 둘은 왜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걸까.

“그만 가자.”

다시금 전장이다. 엔크리드는 죽음을 통해 배운 게 많았다. 그중 하나는 여섯 개의 깃대 중 다섯 개가 거짓이란 거다.

‘잘 찍어야 한다는 거네.’

자신의 운을 시험할 때였다. 이번에는 안개가 일어나기도 전에 부쩍 다가온 적군을 향해 먼저 뛰어나갔다.

“……분대장?”

뒤에서 라그나의 황당한 물음이 들렸다. 누가 봐도 황당한 짓이었을 거다.

“분대장 미쳤수!”

렘도 외쳤다. 다른 이들도 쟤 왜 저러냐고, 미쳤냐고 수군거릴 판이었다.

그 타이밍에 안개가 덮쳤다.

“엇!”

“안 보여!”

엔크리드는 달리며 외쳤다.

“엎드려어! 방-패!”

이전에 해 봐서 그대로 자신을 말을 따르리라 생각했는데, 전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아군 반응이 늦었다.

화살과 쿼렐이 날아 아군을 헤집었다. 단창을 든 적군이 다가와 찌를 때까지 아군 부대는 공황 상태였다.

‘왜?’

타이밍이 문제였다. 당황하고 나서 숨 한번 고를 시간은 줘야 했다. 이미 알고 있기에 한 실수였다.

괜찮다. 다음에 잘하면 되니까.

다른 이들이야 자신에게 행운의 여신이 키스를 해 줬네, 동전을 자루째로 줬네 하지만.

엔크리드는 자신을 잘 알았다.

그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찍은 깃대였다.

이전과 같은 치열한 전투가 필요했다.

한 점의 집중은 여전히 몸에 붙지 않았지만.

새로 쌓은 기본기에 실전이 더해지자, 실력이 부쩍 는 듯했다.

‘아직 멀었지만.’

엔크리드의 기준은 렘과 라그나였다. 두 번째 깃대를 부수기까지는 세 번의 오늘이 필요했다.

그리 깃대를 부러뜨리자, 배에 단검이 꽂힌 소대장 놈이 피를 토하면서도 낄낄 비웃었다.

“속임수다!”

“알아.”

엔크리드는 허벅지에 화살 두 발이 꽂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개 남았다.”

“뭐라고?”

“집중, 집중.”

집중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걸까.

한 점의 집중은 어려웠다.

엔크리드는 옆에서 떠드는 적의 소대장을 무시한 채 집중력을 발휘했다.

대담하게 적의 창을 쳐 내고 받아 내며 검을 휘두른다.

전보다 몇 배는 익숙해진 올려 베기가 적의 턱을 갈랐다.

쩍 하고 갈라져 입부터 코까지 세로로 쪼개졌다.

옆에서 쿼렐이 날아왔다.

퍽 하고 옆구리에 박혔다. 갑옷 덕분에 죽진 않았지만, 미처 보지 못한 곳에 쇠뇌를 든 병사 다섯이 있었다.

깃대 근처에 있는 적병의 숫자는 대략 80명.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숫자다.

‘깃대를 공격하고 퇴로도 염두에 둬야겠다.’

생각을 거듭하고 궁리한다. 한 점의 집중을 위해, 깃대를 부수기 위해 죽음을 넘어선다.

세 번째 깃대에는 다섯 번의 오늘이.

네 번째 깃대에는 일곱 번의 오늘이 필요했다.

‘내가 만약 적의 지휘관이라면.’

가장 안전한 곳에 깃대를 숨길 것이다.

안개가 끼기 전, 두 번의 오늘을 소진해 적의 진형을 노려봤다.

그제야 보였다.

적이 감싼 하나의 깃발 부대가.

가장 안쪽이었다.

엔크리드는 실수 없이 아군에게 경고성을 발하고 달렸다.

다들 잘 엎드리고 방패도 잘 들었다.

“렘 따라와!”

그 뒤 렘을 대동했다.

“주수…… 뭐?”

“따라오라고!”

외치고 내달린다. 렘이 그 뒤를 따랐다.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유?”

엔크리드는 대답하는 대신 렘과 함께 앞을 가로막는 깃발 부대로 돌격했다.

“고작 둘이서!”

적병이 분노를 토해 냈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교묘하게 자리를 비켰다. 몸을 낮춰 안개에 몸을 숨기고 렘에게 적병을 떠넘기는 짓이었다.

“주술, 누구 짓이냐?”

렘은 차가운 불꽃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로 말하고 도끼를 휘둘렀다.

뒤를 돌아보니, 도끼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적병의 머리가 퉁 하고 날아가는 게 보였다.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가 곧 꾸르륵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대답은 다음 놈한테 듣는 거로.”

렘이 폭주했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머릿속에서 적군의 움직임을 그려 냈다.

가장 안쪽 깃발 부대와 조우하기 위해 필요한 오늘은 다섯 번이었다.

다섯 번이나 고생하고 나서야 그 부대 안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머리를 썼다. 정면으로 덤비는 게 아니라 옆에서 끼어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눈치를 봤다.

깃대에 몰래 다가갔다.

그러자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앞을 가로막은 자가 말했다.

뭐지 이 새끼는?

“신께서 보우하사, 소원을 들어주셨구나. 넌 꼭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막은 상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 만에 날 잊었다고?”

상대에게 며칠이지만, 엔크리드는 반복된 오늘 덕에 이 전장만 일 년째였다.

“미안하다. 자기소개 부탁한다.”

엔크리드는 정중히 말했고 상대의 이마에는 핏대가 솟았다.

“아즈펜 공국 소대장, 미치 휴리어다.”

엔크리드는 이름을 들어도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자, 미치가 눈을 부라렸다.

“이 개새끼가.”

몹시 흥분한 채로 검을 뽑는다. 챙하고 검을 뽑아 겨누는 걸 보니,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어디서 봤지?’

“잠깐.”

엔크리드는 손을 들어 상대를 멈추게 했다. 미치가 검 끝을 겨눈 채로 물었다.

“뭐냐?”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다. 누구냐, 너.”

“칼 맞다 보면 기억나겠지!”

놈이 달려들었다. 엔크리드도 맞서기 위해 롱소드를 뽑았다.

챙, 따-앙!

검과 검, 쇠붙이와 쇠붙이가 만나 공명을 일으키며 소리를 토해 냈다.

둘은 검을 붙였다가 뗐고 미치는 내심 놀랐다.

‘이 새끼?’

실력이 부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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