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1화 (41/170)

41. 한 점의 집중

따다다당.

눈을 찌르고 그대로 어깨를 벤다. 어깨를 벤 뒤 검을 내려 허벅지 어림을 긋고 칼날을 힘껏 밀어친다.

엔크리드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의 몸짓, 손짓, 발의 움직임을 눈에 담은 후 다음을 예측했다.

그리고 예측한 검격에 맞춰 수세를 취해 전부 막았다.

둘 사이로 불똥이 튀었다. 불똥이 안개 일부를 지웠다.

그 사이로 빛나는 두 눈.

‘어깨.’

상대의 공격선이 다시금 자신의 어깨를 향한다. 엔크리드는 반보 앞으로 빼놨던 왼발을 뒤로 물렸다.

순간적으로 왼쪽 어깨가 젖혀지고 상대의 검이 무섭게 쏘아졌다.

왼발을 오른발 뒤로 돌리며 오른발 엄지를 축으로 옆으로 회전, 옆으로 도는 걸음이다.

팽 하고 칼날이 어깨 어림을 스쳤다.

엔크리드는 기회라 생각하고 변형된 중단 자세, 비스듬히 검 끝을 내린 자세에서 검을 올려쳤다.

보통 검을 들었을 때, 상대를 향하는 쪽이 앞날, 자신 쪽을 향한 곳을 뒷날이라고 하는데, 검을 내린 상태에서 올리면 뒷날 치기가 되는 거였다.

엔크리드가 쥔 검의 뒷날이 상대의 턱을 노렸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피할 걸 예상했다.

‘피해도 빈틈이 생겨.’

그럼 다음 공격선을 이쪽 의도대로 뿌릴 수 있다.

무수히 쌓은 실전으로 얻은 한 수다. 스텝 한 번과 이어진 공격으로 승기를 가져올 심산이었다.

“건방진 새끼가!”

상대는 화를 내며 어깨를 찌른 검을 그대로 횡으로 휘둘렀다.

그 동작에 엔크리드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피해야 했다. 당연히 위로 올려치던 검도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따-당!

엔크리드는 오히려 검을 바짝 몸쪽으로 끌어당긴 뒤, 재빨리 머리 위로 들어 다음 공격을 막아야 했다.

상대는 검을 횡으로 휘두르는 척만 하고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정수리 베기였다.

그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내자, 검과 검이 딱 붙는 형태로 둘 다 멈추게 됐다.

“스텝 하나로 날 잡으려고 해?”

상대가 위에서 검을 짓누르며 성질을 부렸다.

“왜, 그러면 안 되냐?”

엔크리드도 툭 말을 뱉었다. 미치 휴리어라고 자신을 밝힌 병사는 눈과 표정으로 화를 냈다. 얼굴로 화를 내는 재주가 아주 뛰어났다.

“곱게 죽고 싶지 않구나. 너.”

“아닌데, 늙어 죽는 게 소원인데.”

속을 박박 긁는 거로 치면 엔크리드도 렘 못지않았다. 아니, 렘보다 더 입을 잘 놀렸다.

미치의 이마 위로 두꺼운 혈관이 툭 붉어졌다.

“오냐, 사지를 다 잘라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오물통에 쑤셔 넣어 주마.”

“아닌데, 난 사지 멀쩡하게 증손주 옆에서 늙어 죽을 건데?”

“이 새끼가!”

뻑!

미치가 발을 들어 앞으로 찼고, 엔크리드는 그걸 발로 걷어 냈다. 그걸 기점으로 둘 사이가 두 걸음 넘게 벌어졌다.

엔크리드는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검을 휘두르려 했고, 미치는 반대로 발을 사용해 앞으로 돌진했다.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미치의 몸이 긴 잔상을 남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검의 진로를 수정해 밑으로 내리쳤다.

칭!

둘의 검이 다시 만났다. 칼날이 엇갈리며 쇠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엔크리드는 힘으로 밀어내려고 했는데 검이 딱 붙은 것처럼 따라왔다.

미치는 검을 붙이더니, 순식간에 손목을 위로 틀었다. 그 동작 하나로 검 끝은 엔크리드의 머리 쪽으로 들며 바닥과 수평이 되며 검을 위로 치켜드는 자세가 됐다.

순간적으로 상대는 손잡이에 가까운 칼날, 그러니까 검의 강한 부분으로 엔크리드의 검 끝을 감았다.

그대로 미치가 검을 앞으로 쭉 밀어 넣었다.

씩씩거리며 화를 쏟아 내면서도 미치의 검술은 정확했다.

티디디딩.

검날과 검날이 만나며 소음을 토해 냈다.

그대로 있으면 목구멍에 구멍이 날 판이었다.

엔크리드도 상대 동작과 똑같이 손목을 비틀어 검을 들어 올렸다.

팅!

그러자 둘 사이로 다시금 불똥이 튀었다. 순간적으로 미치가 검을 튕겨 낸 거였다.

호흡을 고를 겨를도 없이 다음 검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먼저 시작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밑으로.

사선 베기다. 그동안 수없이 훈련하고 단련했다. 실전에서 구르고 굴러 갈고닦은 솜씨가 빛을 발했다.

유려한 선이 그어진다. 그어진 선이 미치의 몸으로 떨어졌다.

스텝, 타이밍, 자세, 검격.

무엇하나 어긋나지 않는 교본과도 같은 베기였다.

미치는 엔크리드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받아 냈다.

엔크리드는 그 순간 검을 베는 게 아니라 부드러운 솜뭉치를 베는 것 같았다.

미치의 검은 부드럽게 휘어지며 엔크리드의 검을 흘리더니 역방향으로 꺾이며 뒷날이 엔크리드의 머리로 떨어졌다.

미치는 손목을 돌려 검으로 작은 원을 그려 냈다.

“습!”

부족한 호흡을 바짝 들이켠 엔크리드가 막을 엄두도 못 내고 옆으로 몸을 틀었다.

훙.

미치의 검이 엔크리드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벴다.

피했으나,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대로 떨어진 칼날이 엔크리드의 오른쪽 팔뚝을 벴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주르륵 흘렀다.

더는 말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복부.’

배를 노리고 찔러 오는 검을 쳐 내야 했고, 다음은 허벅지를 노리고 사선으로 내려치는 검을 피해야 했다.

피하고 막고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두른다. 상단 수평 베기로 상대를 떨어뜨려 보려 했지만, 적은 집요했다.

물러나는 대신 검을 위로 올려친 뒤, 계속 거리를 좁혔다.

검과 검이 대화를 나누는 거리.

엔크리드는 수세에 몰렸다. 막고 피하는 것에 급급했다.

‘상단, 사선, 찌르기.’

기본기를 몸에 붙이고 실전에서 다져 만든 모든 걸 쏟아 낸다. 찌르고, 베고, 당기고, 붙이고, 틈이 보이면 발도 썼다.

미치는 그 모든 공격을 읽어 내고 막을 건 막고 피할 건 피했다.

그러면서 하나둘 엔크리드의 몸에 상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팔뚝, 그다음은 어깨, 허벅지, 자잘한 상처가 늘어 갔다.

엔크리드는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피했다.

그중 투구를 날리고 이마를 찢은 공격은 운이 좋아 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전한 수세였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격렬한 움직임 탓에 사방으로 튀었다.

‘다음은 어깨.’

숨 쉴 틈도 없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저 막고 피하고 때려 내는 과정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간간이 반격은 가했다. 서너 번은 베여야 한 번 벨 정도지만, 그래도 공격은 이어갈 수 있었기에 엔크리드는 집중했다.

그야말로 호흡 한 번 잘못 놀리면 죽을 것 같았다.

그건 미치도 마찬가지였다.

진지를 습격한 미친 새끼를 처음 봤을 때는 분명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몇 번 검을 나눠 보지 않았어도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미치는 그걸 눈치챘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고작 며칠 만에 이전과 같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차라리 쌍둥이라고 하는 게 믿음이 갈 정도다.

‘쌍둥이인가?’

잡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검이 자신의 빈틈을 노렸다.

미치는 조금 전 볼을 훑은 찌르기에 잘못하면 목에 구멍이 날 뻔했다는 걸 알았다.

‘이 새끼가.’

미치는 집중했다. 주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딴 잡다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롯이 상대를 죽이는 일에 정신을 모았다.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피하고 막는다. 막고 피한다. 그 와중에 틈이 보이는데, 몇 개의 틈은 보여도 파고들 엄두도 나지 않았으나.

검을 밀어 넣을 틈이 있을 때 주저하면 곧바로 검은 강의 뱃사공이 마련해 둔 나룻배에 탈 판이었다.

죽어도 오늘을 다시 반복함에도.

엔크리드는 그 어떤 오늘도 허투루 보낼 생각이 없기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오늘을 반복하는 게 의미가 있었다.

‘가슴, 아니 배.’

속임수가 섞인 찌르기를 피하고.

독수리라도 된 것처럼 위에서 훅 떨어지는 칼날의 선을 막고 흘린다.

흘리는 기술은 제대로 배우지 않아 어설펐다. 흘린다기보다는 막는 행위에 가까웠다.

엔크리드가 쓰는 중검식은 기본적으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묘미가 있었다.

반대로 미치는 정검식과 유검식을 섞어 썼다.

정검식은 정해진 검로로 상대를 몰아붙인 뒤, 카운터를 쓰는 게 정석이었고.

유검식은 상대의 공격을 흘려 빈틈을 만들어 내는 검이었다.

티딩.

검과 검이 만나 후끈한 열기를 뿜어냈다.

엔크리드는 전심전력, 신경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눈만 깜빡여도 그대로 질 싸움이었다.

그리고 검을 나누는 지금, 엔크리드의 머릿속에는 깃대도, 승패도, 검술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검을 휘두르는 것만 남았다.

주변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나만 남았다.

검과 나, 나와 검.

상대의 검, 검과 상대.

다시 검을 든 나와, 검은 든 상대.

이후에는 자신도 잊고 상대도 잊었다.

망아(忘我), 자신을 잊으니.

오롯이 검만 남았다.

검을 휘두르고 베고 찌르고 막고 피하는 것만이 엔크리드의 안을 가득 채웠다.

끝없는 희열이 차오르며 반대로 갈망이 끓어오른다.

챙! 탕! 팅! 깡! 치르르르!

쇠붙이가 여러 가지 경로로 만나며 갖가지 소음을 토해 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영원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걸 알기에.

‘조금만 더.’

지금 순간이 더 이어지길 바란다.

엔크리드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오늘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쉽게 맞이할 순간이 아니라는 걸.

이전에도 한번 경험했었다.

검을 든 손에 한 줌의 저항감도 남지 않고 상대를 베었던 적이 있었다.

깨끗한 참격을 날렸던 경험.

그 경험을 다시 끌어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건 정말 쉽지 않았다. 그 뒤 지금까지도 성공해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잊고 검만이 남았기에 이게 영원하길 바라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었다.

땅!

위에서 밑으로 중검의 묘리를 담아 내려치는 걸 상대가 기가 막히게 흘렸다. 완벽하게 힘이 바깥쪽으로 향했고 동시에 엔크리드의 가슴에 빈틈이 생겼다.

푹!

상대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칼날이, 뜨거운 쇠꼬챙이가 되어 가슴을 꿰뚫었다.

“푸우우.”

가슴에 검이 박힌 채로 엔크리드는 팔을 멈췄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었다.

오롯이 집중해서 전력을 다했기에 근육에 부하가 걸렸다.

엔크리드는 떨리는 팔로 검을 늘어뜨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땀을 흠뻑 흘린 상대가 보였다.

“기억났다.”

엔크리드가 입가로 피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야?”

“맞지? 횃불 들었던 놈?”

칼침을 맞고 보니, 슬그머니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인상적이기도 했고.

“미치 휴리어다. 아즈펜 공국의 소대장이고.”

“엔크리드, 나우릴리아 왕국의 분대장이다.”

엔크리드도 피와 땀으로 전신이 젖었다. 이마에서 땀과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비라도 맞은 것처럼 전신이 흠뻑 젖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그 상태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엔크리드는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찔러 죽인 상대를 보는 데 악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싸우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

미치 휴리어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달라졌다.

어느새 화는 가라앉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만이 남았다.

“꿈이 깨졌군.”

꿈? 아.

“거짓말이었어. 칼잡이의 소원이 늙어 죽는 거겠냐?”

“그래, 그만 죽어라.”

미치가 말하고 검을 쑥 뽑았다.

불로 달군 꼬챙이가 가슴을 다시 헤집었다.

통증이 찾아와서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엔크리드는 통증을 견디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꾸르륵하고 목구멍에서부터 나온 피가 입 밖으로 흘렀다.

따로 피를 토할 것도 없이 피가 역류했다.

“뭡니까? 적군이 온 겁니까?”

어느새 둘 주변을 아즈펜 병사 무리가 둘러싼 채였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며 다가왔다.

‘보이지도 않았는데.’

엔크리드는 주변을 힐끗 봤다. 적군이 가득했다.

“그래. 몰래 여기까지 왔다. 뒤를 치는 게 특기인 놈인 것 같고.”

“아쉬워 보입니다. 소대장.”

“……아니다.”

미치는 말하며 엔크리드를 빤히 봤다. 솔직히 말하면 아쉬웠다. 이런 상대를 만나기는 쉽지 않으므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어떤 영역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레 아쉬움이 생겼다.

그런데 상대의 얼굴에는 그런 감정의 편린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고, 나무칼을 받아 든 일곱 살 먹은 아이처럼 신나 보이기도 했다.

“뭐냐 너.”

미치는 황당해 입을 열었으나, 엔크리드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죽어 가는 중이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지배했다.

‘라그나, 이 미친 자식아. 죽음의 공포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한 점의 집중을 끌어내기 위한 필요조건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의 집중력이 아니라.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며 긴 시간 어울려 능력과 감정, 모든 것을 촉진하고 고양할 상대가 필요한 거였다.

목숨을 걸고 싸우며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내야 버틸 수 있는 그런 상대.

한순간이라도 눈을 돌리면 그대로 끝이 나버리는 고양감이 가득한 싸움.

호적수가 필요한 거였다.

미치 휴리어는 그런 면에서 적격이었다. 그는 호적수라 할 만했다.

엔크리드는 죽어 가며 깨달았다.

아까의 감각과 경험이 바로 라그나가 말한 한 점의 집중이었다는 걸.

곧 자신이 그걸 해냈다는 것도.

그리고 다시 오늘을 반복하며 그 감각과 경험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도.

조금만 더 이어지길 바랐던 그 순간을 임의로 끌어내는 것.

그게 바로 한 점의 집중이었다.

쉽게 될까? 아닐 것이다. 하지만 될 때까지 할 것이다. 미치 휴리어의 존재가 그걸 가능케 할 터였다.

엔크리드는 그걸 깨달았다.

그러니 어찌 신이 나지 않을까.

다시금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임에 엔크리드는 웃으며 죽었다.

“미친 새끼였나.”

미치는 웃으며 죽는 엔크리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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