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미치 휴리어
아즈펜 공국은 세 개의 가문이 주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그중 무력을 상징하는 가문이 휴리어 가문이었다.
휴리어는 남아든 여아든, 아이가 태어나면 전부 무예를 배웠다.
그렇게 재능을 가늠하고 그중 될 것 같은 아이들만 모아 가르쳤다.
재능이란 건 편파적이고 행운의 여신이 치는 장난은 언제나 예상할 수 없기에.
그 편파적이라는 재능을 모으기 위해, 휴리어는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모았다.
미치 휴리어도 그중 하나였다.
방계 가문에서 태어났고 본래 쓰는 성도 달랐지만, 지금은 휴리어 가문의 사람이 된 거다.
미치 휴리어는 어릴 때부터 재능이 특출났다.
열다섯에 이미 성인 병사 두엇은 상대했고.
다음 해가 됐을 때, 일반 병사 수준은 훌쩍 뛰어넘었다.
열여덟 때, 소위 말하는 마을 하나를 대표할 만한 검사를 일대일로 꺾으며 실력을 증명했다.
고작 스물둘에 도시 하나에 이름을 날릴 만한 이들과 대련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으니.
그와 검을 견줄 만한 이들은 손에 꼽았다.
그중 동년배는 흔치 않았다.
그런 환경은 그에게 오만을 선물했다.
‘몇 번 해 보면 되는 걸, 굳이?’
왜 허벅지가 부어터질 때까지 훈련해야 하나.
왜 손바닥이 찢어질 때까지 검을 휘둘러야 하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재에 만족했다. 처음 검을 잡을 때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능 하나만으로 그레이 독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런 미치에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따당!
내려치는 검을 아래에서 위로 걷어 낸다.
잠시 방심하고 있자니, 칼날이 어깨를 스쳤다. 미치는 검을 찌르며 발로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진 이들에게 곧잘 써먹던 수법이었다.
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다리를 노리는 발차기를 막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막히더라도 최소한 빈틈은 생기는데.
상대는 이 패턴이 익숙하다는 듯 찌르기는 어깨를 틀어 피했고 한쪽 발을 들어 발차기도 막았다.
그러면서 균형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본기가 탄탄한 놈이었다.
‘분명 이런 수준이 아니었는데.’
미치는 조금 전 놈과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대뜸 가까이 다가온 놈은 툭 하고 말을 내뱉었었다.
“안녕, 만나서 반갑다. 본 김에 목숨 걸고 한판 붙어 볼까?”
아는 얼굴이었다. 분명 그 새끼였다.
야습을 감행했던 적군 병사.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퍼졌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의문을 길게 가질 틈이 없었다.
상대가 먼저 검을 길게 쭉 뻗었다.
땅!
미치는 막으며 생각했다.
또 양동 작전일 수 있다고.
그래서 이 새끼는 자신이 막을 테니, 뒤쪽을 지키라고 했다.
깃대가 무너지면 작전에 큰 차질을 빚는다. 그걸 위해 자신이 여기 있는 것 아닌가.
그레이 독을 이끄는 중대장이 적군의 퇴로를 잡고 휘몰아치는 역할이라면, 자신은 이곳을 지키는 역할이다.
발차기를 막은 적병이 자신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떨어뜨렸다.
미치는 상대의 검과 십자 모양을 만들며 검을 막고 흘렸다.
티리리리링.
칼날이 교차하며 서로를 비스듬히 스쳤다. 마지막 순간 힘을 줘 서로를 밀친 둘이다.
둘 사이로 다섯 걸음이 넘는 간격이 생겼다. 재차 공격하기 전에 미치가 입을 열었다.
“실력을 숨겼었나?”
“어쩌다 보니.”
“이름이 뭐냐?”
“엔크리드.”
꼭 만나고 싶었던 놈이었다. 자신이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 놈이 손수 와 줬다.
미치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래, 엔크리드. 이름은 기억해 주마.”
“기억 안 해도 돼. 까먹으면 또 알려 줄게.”
“미친 새끼, 넌 여기서 죽는다.”
미치는 왼쪽 어깨 위로 검을 들었다.
몇 번 부딪쳐 보니,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본 실력을 보일 차례다.
길어야 다섯 번, 그사이 미치는 엔크리드란 놈의 목을 벨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다섯 번의 검격이 흘러갔다.
미치의 미간이 좁혀졌다. 인상을 썼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예 상대가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상대는 가까스로 자신을 쫓아오는 느낌이다.
그런데 제 버릇을 전부 아는 것처럼 막고 버티고 검을 내쳤다.
미치는 속도를 더 높였다. 속임수도 섞었다. 그래도 끝이 나지 않았다.
몇 번 검을 더 섞다 보니, 점점 상대만 보였다.
검과 상대, 칼날과 나, 나와 칼날.
미치 휴리어는 마치 검을 처음 잡았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 검을 처음 잡았을 때, 하늘 아래 오롯이 검과 자신만이 남았던 그 감각.
검을 휘두르면 상대가 그대로 베일 것 같았다. 찌르며 찔릴 것 같았다. 당겨 때리며 얻어맞을 것 같았다.
미치는 그렇게 했다.
내려치고, 휘어서 치고, 뻗었고, 찔렀으며, 돌려서 쳤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했다.
* * *
엔크리드는 집중 상태를 끌어냈다. 그 상태 그대로 미치와 검을 나눴다.
수없이 반복한 오늘 덕분에 상대 버릇이 눈에 훤했다.
발을 막고 검을 막는다.
그러다 일순간 적의 검이 변했다.
전보다 더 매서웠고 날카로웠다.
찌르고 휘어지며, 베면서 칼날이 돈다.
땅! 깡! 뜨드드드등!
힘껏 부딪치니 칼날이 불똥을 튕긴다. 몇 번의 검격이 어깨를 스치고 옆구리를 벴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핏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적어도 세 번은 지나쳤다.
그 순간 엔크리드의 몰입도 더 깊어졌다.
더 깊게.
엔크리드는 일부러 더 자신을 몰아 상태로 몰아갔다.
주변을 잊는다. 자신과 검만이 남는 세계로 간다.
한 점의 집중이 온전히 발동했다.
그의 눈에는 미치 휴리어의 검만 보였고.
미치 휴리어의 눈에는 엔크리드의 검만 보였다.
둘은 미친 사람처럼 싸웠다.
서로의 목숨을 내걸었다.
지켜보는 사람조차 아찔한 공격이 오갔다.
피빅.
서로의 목을 베다 실패하자, 둘 다 목에서 피를 흘렸다.
미치는 집중 상태 그대로 자신의 필살 패턴을 썼다.
왼발을 뒤로 빼고 오른발은 앞으로 빼, 익숙한 간격이 아니라 새로운 간격을 만들고.
검 끝을 궁둥이 뒤로 늘어뜨렸다.
“흡.”
짧게 호흡을 들이켜자,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정검과 유검.
둘 다 받아 내는 검술에 가깝다.
미치는 반전으로 후려치는 기술을 익혔다.
밑에서 위로 큰 원을 그리는 차륜 베기라는 기술이었다.
자세를 바꿔 검신을 몸으로 가림으로써 공격의 시작점을 숨겨 상대가 막을 수 없는 일격을 만들었다.
그전에 발 위치를 조절해 간격을 바꾼 것도 오롯이 이 한 번의 차륜 베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차륜 베기를 준비할 때, 엔크리드는 깊은 몰아의 상태를 경험했다. 그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이 검술만은 아니었다.
‘보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졌다.
한 점의 집중에 돌입한 그의 청각이 무섭게 예민해졌다.
발을 떼는 소리, 검을 뒤로 빼며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까지.
귀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가 정보로 취합되어 머릿속에 상을 만든다.
차륜 베기에 죽은 것만 열 번이 넘었다.
지금 상대가 휘두르는 기술에 수없이 당했던 경험이 존재하기에, 엔크리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더없이 선명했다.
숨긴 검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느껴졌으며 상대의 호흡도 들렸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차륜 베기의 타이밍을 읽었다.
훙.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찌른다. 곧 아래에서 위로 휘어지듯 칼날이 솟구쳤다.
몰아의 상태에 빠진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검을 내리쳤다.
정확히 차륜 베기를 막아 내는 궤도였다.
깡!
아래에서 올라오는 검과 위에서 내려치는 검이 만났다.
어찌나 둘 다 힘을 썼는지, 쩍 하고 엔크리드의 검에 금이 갔다.
검이 맞닿는 순간, 미치는 자신의 일격이 막혔다는 것에 놀라 집중 상태가 반쯤 풀렸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아니었다.
반쯤 금이 간 엔크리드의 검이 상대가 든 칼날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치이이이잉!
칼날과 칼날이 마찰하며 기묘한 소음을 토해 냈다.
미치가 반사적으로 검을 위로 쳐들었다. 본래라면 검이 위로 들렸어야 하나, 엔크리드는 힘으로 그걸 눌렀다.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보다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게 유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매일 단련을 거듭했기에 근력도 엔크리드가 더 뛰어났다.
힘 대 힘으로 겨루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엔크리드는 검날을 내리누르다 왼발을 앞으로 뻗으며 더 힘을 주었고, 검을 밑으로 튕겨 내듯 밀쳤다.
키-잉!
미치의 검이 밑으로 튕겨 나가고.
엔크리드는 그 상태에서 왼발을 내밀며 허리를 틀었다. 손에 쥔 검이 점이 되어 앞으로 뻗어 나갔다.
검 끝이 푹 하고 미치의 가슴을 찔렀다.
갑옷을 입긴 했으나, 검에 실린 힘이 워낙에 강했다.
미치는 가슴이 뚫렸다.
하지만 관통하지는 못했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검을 뒤로 뺐다.
쑥 하고 피가 묻은 검날이 뒤로 빠져나왔다.
“후우, 후.”
엔크리드는 검을 회수한 뒤, 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순간 전력을 다했다. 팔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다.
미치의 가슴에서 피가 꿀렁 하고 흘렀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다리에 힘을 주고 멈췄다.
미치의 동공이 풀리나 싶었지만 곧 눈을 부릅뜨며 힘을 줬다.
“카운터를 노렸어야 해.”
미치가 말했다.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적은 양은 아니었다. 흐르는 피가 금세 옷을 적셨다.
“받아 내고 흘려서 빈틈을 만들었다면 내가 유리한 싸움이었어. 인정하지?”
“승패는 결과로 말하는 거 아니냐?”
엔크리드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내가 너무 억울해서. 아닌가. 그래, 단련을 쉬지 말았어야 해. 마지막에는 순수하게 힘에 밀렸으니까.”
미치의 눈빛이 흐려진다. 놔둬도 죽을 터였다. 흐르는 피가 더 많아졌다.
엔크리드는 검을 들어 앞으로 두 걸음 나갔다.
“막앗!”
이대로 검을 찌르려는데 누군가가 외치며 달려들었다.
붕 하고 묵직한 소음이 들림과 동시에 엔크리드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 상반신을 반쯤 가렸다.
따당!
검 위로 묵직한 충격이 들어왔다.
엔크리드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상대를 바라봤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가 미치의 앞을 막아섰다.
“미치를 지켜라!”
남자가 외쳤다. 엔크리드는 주변을 둘러봤다. 병사 서넛이 더 나타나선 똑같이 미치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곤 기절한 미치의 가슴에 가루약을 뿌렸다.
가슴에서 흐르는 피가 금세 멎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서!”
콧수염이 눈을 부라렸다.
화가 잔뜩 나 보였다. 그의 눈이 미치를 힐끔 훑었다.
저 친구가 중요한 사람이었나.
엔크리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를 관찰했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니 호흡이 가빠 보였다.
그런데 자세에는 빈틈이 없다.
콧수염은 깃대를 확인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미치가 이길 거라 생각했다. 엔크리드의 실력이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엔크리드는 미치를 이겼다고 해서 흥분하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이곳은 전장이고 지금은 전투 중이다.
낭만 가득한 일대일 결투나 대련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엔크리드는 자신이 할 일을 명확히 인지했다.
“주술의 매개는 클수록 형편없다고 하던데 맞아?”
미치 휴리어를 병사 둘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걸 보며 엔크리드가 말했다.
앞을 가로막은 콧수염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놈, 아는 게 있구나.”
많지.
엔크리드는 발끝으로 땅을 찍고는 단숨에 위로 걷어찼다.
푸왁 하고 흙먼지와 짧은 잡초 따위가 위로 솟으며 콧수염 남자의 얼굴을 덮었다.
급히 손을 들어 막은 남자가 외쳤다.
“잡아! 깃대 쪽으로 가게 두지 마!”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가렸다 싶은 순간, 내달렸다.
퓨뷰븅!
뒤에서 쿼렐이 날아왔다. 왼쪽으로 급히 몸을 틀었는데도 한 발이 오른쪽 어깨 뒤쪽에 맞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
엔크리드는 깃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앞을 가로막은 적병이 단창 따위를 들었다.
코뿔소처럼 돌진하면서 콧김을 뿜던 엔크리드는 다섯 걸음을 앞두고 발로 땅을 쿵 찍으며 오른쪽으로 휘어지듯 뛰었다.
뒤에서 엔크리드를 노리고 쏜 쿼렐이 단창을 든 적병에게 날아갔다.
“악! 내 눈!”
재수 없는 적병이 눈에 쿼렐을 맞았다. 팔이나 몸통에 맞은 이들도 셋이 넘었다.
“쏘지 마라! 쏘지 마!”
쇠뇌병 사이에 있던 지휘관이 외쳤다. 엔크리드는 몰아의 상태는 아니지만, 반 집중 상태를 유지 중이었다.
한 점의 집중과 칼날의 감각이 겹친다. 그는 소리를 듣고 머릿속으로 적군의 위치와 상황을 파악했다.
그대로 뒤로 몸을 반전, 검을 든 채로 쇠뇌병 사이로 뛰어들었다.
“엇!”
놀란 병사 정수리 위로 칼날을 내리치자, 퍽 하고 머리통이 깨졌다.
끊어치듯 검을 휘둘렀기에 반작용으로 검이 위로 들렸다.
그대로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검을 휘둘렀다.
후웅!
놀란 적병 무리가 물러났다.
“그레이 독! 쫓아라!”
그러자 뒤를 쫓던 콧수염이 말했다. 엔크리드는 쇠뇌병 사이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그 반대편으로 뛰었다.
푹!
뛰어나가며 검으로 적병 목을 하나 찌르고.
바닥에 떨어진 쿼렐을 하나 주워 옆으로 던졌다.
팽 하고 날아간 쿼렐이 허무하게 적병의 갑옷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맞은 병사가 쇠뇌 대신 숏소드를 뽑아 달려들었으나, 쿼렐을 던지자마자 이어 던진 쓰로잉 나이프가 그의 이마에 꽂혔다.
쿼렐을 막고 방심한 탓이었다.
“후우!”
호흡을 짧게 끊어 내쉬며 엔크리드는 적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둘이었다.
하나는 깃대를 부수는 거고.
둘은 제발 아군 지휘관이 멍청한 짓을 관두고 뒤를 봐주는 것이었다.
“이 개자식이!”
콧수염 남자가 콧김을 뿜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이리저리 뛰다가 결국 깃대 근처까지 온 참이었다.
그는 손에 든 쓰로잉 나이프를 몽땅 던졌다.
피비비비빙!
날아간 나이프는 다섯 개.
쓰로잉 나이프 다섯 개가 전부 펄럭이는 깃발을 맞췄다.
두툼한 천의 깃발인지라, 구멍이 쉬이 뚫리진 않았다.
엔크리드가 나이프를 던지자 적병이 화들짝 놀랐다.
“이런 씹!”
화를 내는 적병이 늘었다.
“막아! 막으라고!”
깃대 바로 밑에서 주술사로 추정되는 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들 놀라 나이프에 깃발이 뚫리나 시선을 돌렸을 때, 엔크리드는 바닥을 굴렀다.
상대가 쿼렐이나 활을 쏜 것도 아니고 위협이 없는데도 갑자기 한 앞구르기다.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발이 멈춘 덕분에 콧수염 병사가 거리를 좁혔다.
잡았다, 이 새끼.
콧수염 병사가 확신했을 때.
엔크리드는 바닥에 떨어진 단창을 쥐고 일어나는 중이었다.
“막아!”
“안 돼!”
콧수염이 외쳤다. 주술사도 외쳤다.
엔크리드는 몸으로 답했다. 왼발로 땅을 찍고 전신 탄력을 이용해 단창을 던졌다.
팡 하고 날아간 단창이 깃발을 때렸다.
북!
깃발이 찢어졌다. 구멍이 생겼다.
주술의 매개는 손상당하면 엉망이 된다. 그럼 꼭 깃대를 넘어뜨릴 필요는 없었다.
깃발만 찢어도 되는 거니까.
꼭 저 앞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엔크리드는 주변에 안개가 걷히는 걸 보고 숨을 푹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과도 같았다.
“이 미친 새끼, 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냐?”
그걸 본 콧수염 남자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엔크리드는 검을 들어, 몸의 중심선에 맞춰 수비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확률은 반반이다. 살아날 확률이 반, 죽을 확률이 반.
보통 사람에게는 끔찍한 확률이지만.
엔크리드에게는 아니었다.
실패해도 다시 하면 그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