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파란 눈의 구원자
요정 중대장은 자신의 귀를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예민한 오감은 요정의 선천적 재능이다.
그녀는 청각에 의지해 오른쪽으로 두 걸음 움직였다.
쉭.
그 위치는 장창을 찌르는 적병의 앞이었다. 그녀의 위치는 아군의 선두였다.
요정 중대장은 적군의 창대를 위로 올려쳤다.
창대를 올려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든 검이 바람을 타고 흐르는 풀잎처럼 앞으로 나아가 적군의 목에 구멍을 내고 돌아왔다.
푹! 뽁!
구멍이 난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녀는 손에 든 검을 바닥으로 털었다. 검에 묻은 피가 바닥에 투두둑 흩뿌려졌다.
그녀는 계속 움직였다. 제자리에 있으면 쿼렐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요정 중대장이 달리며 잎새를 닮은 검을 휘둘렀다.
티딩.
쿼렐 두 대가 칼날에 걸려 튕겨 나갔다.
그녀가 손에 든 검은 ‘나이들’이란 검이었다.
보통의 검보다 짧고 뾰족하며 유선형의 잎새를 닮은 요정족 특유의 장비였다.
손잡이를 쏙 뽑으면 나룻배 또는 잎의 모양이 떠오르는 칼날이 특징인 검이었다.
요정족 특유의 검술은 유검, 정검, 쾌검 세 가지 형태가 섞인 형태였고.
나이들은 거기에 특화된 무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중대장이 보인 게 그 검술이었다.
장창을 쳐 내고 흘려 내며 빛살처럼 찌르는 기술을 받아 낼 병사는 없었다.
‘안 좋은데?’
상대를 격살하면서도 요정 중대장의 암울함을 느꼈다.
주술이란 게 본래 이 정도로 위험했나?
예전에 광전사의 주(呪)라는 걸 단 전사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제 상처를 돌보지 않고 돌격하는 광전사는 위험했고 과격했으나, 한시적이었고 전장 전체를 아우를 만한 종류는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주술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 안개가 꼈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게 주술이라니?
다행히 대비하고 있었기에 반응은 제대로 했다.
처음 안개가 꼈을 때, 요정 중대장은 부대를 원진 형태로 만들어 진형을 좁혔다. 때마침 터진 ‘엎드려’란 소리와 ‘방패’란 외침을 그대로 수행했다.
그녀가 외치니, 소대장 몇이 미친 듯이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여 버텼다.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공황 상태에 빠지기 충분했다.
전황이 암울한 건 당연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제 할 일을 했다.
진형을 이탈해 홀로 적군의 선두를 베고 찌른 거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군이 금세 전멸할 판이었다.
그나마 1중대는 버티겠지만.
‘감자 싹 같은 새끼.’
요정 중대장은 속으로 대대장을 욕했다.
감자 싹에는 독이 있다. 요정은 식물에 빗대는 표현을 즐겨 하는 경향이 있었다.
감자에 싹이 나면 도려내고 먹어야 한다. 그대로 먹으면 몸에 독이 쌓였다.
현 대대장이 딱 그런 감자 싹 같은 새끼였다.
이 정도 상황이면 지휘부에서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대대장의 명령이 없었다.
호각도, 외침도, 아무 지시도 없다.
제 뒷배만 믿고 방만하게 부대를 이끌더니.
주술이니 대비하라고 수없이 얘기했는데, 제대로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 왕국도 곰팡이 가득 핀 복숭아와 같았다. 썩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최전방에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을 대대장으로 파견한단 말인가.
‘운이 따라 줘도.’
백 명 중에 열 명이나 살아남을까?
안개는 아군의 눈을 가렸다. 그건 치명적이었다.
그리 암울한 미래를 점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의 안개가 확 걷혔다.
“음?”
요정 중대장은 나이들이란 검을 든 채로 발을 멈췄다.
그녀는 당황했다. 안개는 생길 때만큼이나 없어지는 것도 빨랐다.
그리고 그녀보다 적군은 더 당황했다.
“어?”
코앞에서 긴 창을 들고 있던 적병이 창을 찌를 생각도 못 하고 손을 멈췄다.
요정 중대장의 당황은 짧았다. 그녀는 안개가 있을 때도 잘 싸웠다. 그녀는 그대로 나이들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그어진 나이들은 적의 목울대를 정확히 갈랐다.
“끅!”
적군 하나가 또 쓰러졌다.
중대장은 지금이 승부의 기점이라 판단했다.
왜 안개가 걷혔는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전원 반전! 반격한다!”
그녀의 외침은 곳곳에서 호응을 얻었다.
“돌격! 돌격! 도올격!”
“죽여! 죽여라아아아아!”
“이 개새들아!”
“다 때려 죽인다아아!”
기세가 변하니. 전장의 흐름이 변한다. 요정 중대장은 나이들을 회수하고 제자리를 지켰다.
곧 그녀의 중대가 그 옆을 지나쳤다.
“중대장님!”
1소대장이 외친다.
“다 갈아 버려.”
중대장이 답했다. 1소대장은 기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아아아!”
전장의 공기가 달궈진다. 아군 곳곳에 서려 있던 침울한 공기가 단숨에 날아갔다.
요정 중대장은 그제야 왜 갑자기 안개가 사라졌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설마?’
그 분대장이?
아무 이유도 없지만, 그가 했을 것 같았다. 순수한 감이었다. 요정의 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 * *
아즈펜 왕국의 독립 중대, 그레이 독의 대장은 뒤로 돌아 퇴로를 막고 있었다.
정확히 안개가 걷히는 지점이었다.
나오는 적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 되는 일이었다.
패닉에 빠져 도주하는 적이니, 이보다 쉬울 순 없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걷혔다.
“이건 뭐냐? 왜 안개가 걷혀?”
“대장님, 적군이 반전합니다.”
그린 펄 평야에는 딱히 눈을 가리는 언덕이 없다. 그들의 눈에 나우릴리아 왕국군이 돌아서는 게 보였다.
중대장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주술사가 개짓거리를 했든, 아니면 주술이 개판이었든, 문제가 생겼고.
이대로라면 아군이 준비한 전략이 완전히 무너진다.
“뒤를 친다! 돌파하지 말고 옆으로 깎으면서 간다! 따라와!”
중대장이 내달렸다. 그들은 그대로 나우릴리아 왕국군의 뒤를 쳤다.
뒤를 침으로 전면에 있는 아군의 후퇴를 도울 작정이었다.
“어떤, 씹.”
그레이 독의 중대장은 이 안개를 걷은 게 어떤 놈이든, 반드시 응징하리라 마음먹었다.
* * *
엔크리드는 자신의 계산이 많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오른쪽 어깨 뒤, 등판에 꽂힌 쿼렐은 오른손으로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고.
상대는 미치 휴리어보다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났다.
한 점의 집중을 발휘하려 해도 뒤에서 갑자기 창을 찔러 오는 놈들이 있었다.
아니, 뒤를 노리는 창병만 있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쇠뇌병 다섯이 따라오며 계속 자신을 겨눴다.
그 탓에 허벅지에도 쿼렐이 꽂혔다.
‘이 다리로 뛰기는 글렀고.’
금이 간 검은 어느새 부러져 반쪽이 됐다.
상대는 강격을 구사하는 중검술을 구사했다.
허벅지와 등판에 흐른 피와 적군의 피가 뒤섞여 엔크리드는 피범벅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반쪽짜리 검을 들고 버티는 걸 보며, 콧수염 남자는 내심 감탄했다.
적군이고, 말을 얄밉게 하며, 주술을 망가뜨린 놈이지만.
패기만큼은 놀랍지 않나.
지금도 전혀 포기한 기색이 아니었다.
“뭘 믿고 그러는 거지?”
콧수염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뒤쪽에 자리 잡은 쇠뇌병을 시야에 담고 답했다.
“뭐가.”
“왜 아직도 포기를 안 하냐고 묻는 거다.”
그 말에 엔크리드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후우, 나 분대장이거든.”
“그래서?”
“내 분대에 렘과 라그나란 친구가 있어.”
“으음?”
“그 둘은 왜 분대원인지도 모를 만큼 잘 싸운다.”
“그 둘이 널 구하러 온다는 거냐?”
“그런 시나리오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근처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안 보인다. 슬슬 보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안 온 거면, 안 온다고 봐야 했다.
그게 맞았다.
같은 시각 렘은 적군 하나를 궤멸 상태로 몰아넣고 돌파한 뒤, 키다리 풀밭을 관통하는 중이었다.
라그나는 안개 때문에 더 나아가지 않고 달려드는 적만 상대했다.
안개가 걷힌 뒤에는 아군에 합류했고.
둘은 제 분대장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콧수염은 검을 들고 한 걸음 다가갔다. 엔크리드는 다친 오른발을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해도 눈빛이 너무 살아 있는데?
여전히 엔크리드의 눈은 무언가를 노렸다. 저 다리로? 어딜 도망가려고?
엔크리드는 콧수염을 보며 참 빈틈없는 새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오늘’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죽고 다시 반복하면 그만이다. 그도 안다. 너무도 잘 안다.
하지만 아직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오늘을 의미 없이 보냈다면 지금의 엔크리드가 있을 수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엔크리드는 반항할 터였다.
오늘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였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악하는 게 그였다.
“적군이라는 게 아깝다.”
콧수염이 말하며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더 물러날 수 없었다.
뒤에 창을 든 적병이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앞을 본다. 콧수염이 양손으로 그립을 쥔 채 검을 들었다.
보통의 검보다 더 긴 바스타드소드의 검신이 안개가 걷혀 들어온 햇살을 반사했다.
‘오른쪽? 왼쪽?’
어디로 피할까?
어디로 피해도 치명상은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얌전히 죽는 건 싫다.
‘피할 수 없다면.’
엔크리드는 반으로 부러진 검을 꽉 쥐었다. 좌우가 안 되고 후퇴도 안 된다면 전진뿐이다.
검이 떨어지는 찰나, 앞으로 내달린다. 그리 마음먹은 순간이다.
퉁!
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쿼렐 하나가 날아와서 왼쪽 어깨에 박혔다.
검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 병사 하나가 쇠뇌를 쐈다.
엔크리드는 짧은 신음을 흘려 통증을 이겨 내고 말했다.
“음, 치사하게.”
“칭찬 고맙군.”
검을 든 채로 콧수염이 말했다. 웃음기는 없었다.
눈앞의 적병을 죽인다고 해도 전쟁은 패색이 짙어질 테니.
병사 하나의 목숨과 전장의 승패.
어떤 게 더 가치 있는지는 지나가는 여덟 살 꼬마 애도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살려 보내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으니.
훅.
검을 내리친다. 중검, 강격이다.
엔크리드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내리치는 검을 끝까지 바라봤다.
야수의 심장이 대담함을 줬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몸이 정상이라면 어떻게 막아야 할까?’
그는 끝내, 마지막까지도 검을 다루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검이 그의 이마를 내리치기 직전.
“으악!”
뒤에서 병사의 비명이 들렸고.
비명이 들린 것과 동시에 콧수염의 검을 검은 그림자가 때렸다.
땅!
엔크리드는 그림자가 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다만, 검이나 화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이나 화살이라면 부딪쳤다고 허공에서 몸을 홱 돌리며 바닥에 내려서진 않을 테니까.
“……에?”
엔크리드는 그림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파란 눈, 검은 비단과도 같은 털.
흑표범이었다.
순간,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래라면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이나, 하도 오늘을 반복한 덕에 멀어진 기억.
잊힐 법한 기억.
그럼에도 잊히지 않은 기억.
검은 털과 푸른 눈을 보니 선뜻 떠오른 기억.
키다리 풀밭에서 만났던 그 짐승이었다.
“너?”
“크릉.”
흑표범은 그때보다 자랐는지, 몸집이 조금 더 커졌다.
놈은 그대로 콧수염을 노려보다가 카아아아아악! 하고 사나운 울음을 토해 냈다.
“이건, 또 뭐냐?”
콧수염은 황당한지 눈썹이 위로 솟았다. 그러다 다시 분노를 표출했다. 거기에 맞춰 쇠뇌병 둘이 표범을 겨누고 쿼렐을 쐈다.
“어, 야!”
놀라서 엔크리드가 외쳤고.
표범은 제자리에서 유연하게 허리를 틀곤 통 하고 몇 번 땅을 차더니 쿼렐을 다 피했다.
그 후 팍 하고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콧수염이 반사적으로 검을 내리찍었다.
표범은 콧수염 근처도 가지 않았다. 검은 비단이 쭉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빨랐다. 표범의 목적지는 쇠뇌병이었다.
“꺽!”
표범의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발을 휘둘러 그대로 쇠뇌병의 발목 뒤쪽 아킬레스건을 긋자 피가 튀었다.
가죽 부츠 따위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챙!
표범이 덤비자, 병사가 숏소드를 뽑았다.
표범은 그 뒤, 더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 줬다. 병사를 노리는 게 아니라 쇠뇌를 발로 걷어찼다.
앞발로 땅을 차 뛰더니, 뒤쪽 발톱으로 쇠뇌의 현을 끊는다. 그대로 뒷발로 쇠뇌를 디뎌 박찬 다음 쇠뇌를 향해 날았다.
날아가서 한 일도 마찬가지다. 앞발을 휘둘러 쇠뇌의 현을 끊었다.
‘노린 건가?’
하나면 우연인데, 남은 쇠뇌 다섯의 현을 전부 자른 거라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물 따위가.”
콧수염은 이제 얼굴이 벌게졌다. 제대로 화가 났다. 표범은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잽싸게 바닥을 차더니 엔크리드 곁으로 돌아와선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크릉!”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물고서 콧김을 뿜어낸 표범이 달리기 시작했다.
힘이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었다.
다리가 끌리고 몸이 끌리긴 했지만, 엔크리드가 달리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등이 배기고 실시간으로 팔다리에 생채기가 생겼다.
그리 끌려가는데 목덜미에서 뜨끈한 뭔가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지만, 그럴 겨를도 없었다.
“쫓아!”
콧수염이 외쳤다.
이렇게 해도 여길 빠져나가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도망가.”
엔크리드가 말했다. 당연하게도 표범은 답하지 않았다.
목덜미에선 뜨끈한 액체가 계속 흐르고 콧수염은 뒤를 쫓고.
엔크리드는 표범에게 목덜미를 물린 채, 바닥을 긁으며 도주 중이다.
그래도 이런 도주는 끝이 보인다. 표범의 한계는 명확하다.
콧수염은 절대로 그냥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핏발 선 눈에 의지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도망가라니까.”
다시 한번 표범한테 말하는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생겼다.
“구하러 왔다.”
“에?”
예상치도 못한 원군이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아군이었다.
안면이 있으며, 한때 놀려 먹기 바빴던 소대장.
“벤젠스 소대장님?”
“그래. 내가 왔다.”
그가 검을 들고 엔크리드의 앞을 막았다.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아군 병사가 그 뒤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어느새 앞을 치고 나온 소대 하나가 여기까지 온 거였다.
엔크리드가, 아니 표범이 시간을 끈 게 헛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