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5화 (45/170)

45. 수없이 실전을 거듭한 (1)

“덤벼!”

벤젠스 소대장이 외치며 검을 내리쳤다. 콧수염은 땅과 수평으로 검을 들고 중단을 벴다.

벤젠스 소대장의 검과 콧수염의 검이 만났다.

까-앙!

검이 부딪친 순간, 콧수염은 발을 앞으로 내딛고는 무게를 실어 상대를 밀어냈다.

벤젠스는 검을 휘두르는 데만 집중했다가 속절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억!”

균형을 잃은 탓에, 밀린 걸 넘어 아예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구른 자리로 흙먼지가 일었다.

다리 사이에 머리를 넣은 자세로 벤젠스의 몸이 엔크리드 바로 옆에서 멈췄다.

벤젠스 소대장과 엔크리드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휘잉 하고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왔다.

벤젠스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엔크리드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구하러 왔다면서요.”

벤젠스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저 새끼, 왜 저렇게 세냐?”

엔크리드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니, 구하러 왔다면서, 왜 한 방에 나가떨어지냐고.

몸을 한 번 더 굴려 일어난 벤젠스 소대장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씹, 이 새끼.”

그는 상대를 노려보다가 외쳤다.

“쏴!”

벤젠스의 소대는 궁병이 반이었다.

“마구 쏴!”

그의 명령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막아라!”

“방패를 들어!”

콧수염 뒤를 바짝 쫓아오던 적병 몇이 튀어나오더니, 방패를 들이댔다.

퍼버벅!

화살이 방패에 막혔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방패 위로 고개를 내민 콧수염이 무서운 눈으로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그러곤 부하의 방패 하나를 빼앗았다.

이런 미친.

엔크리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벌떡 일어났다. 쿼렐이 꽂힌 다리와 등판에서 불에 덴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신음을 흘린 틈도 없었다.

크릉.

옆에서 표범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사이 콧수염이 든 방패가 훌쩍 가까워졌다.

“미친 새끼가!”

벤젠스가 놀라 외쳤다. 엔크리드는 통증을 견디며 벤젠스의 허리춤에 꽂힌 숏소드를 뽑았다.

챙.

그 사이 콧수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뒤로 뛸 엄두는 나지 않았다.

훙.

벤젠스가 상대의 검과 사선을 만들며 검을 후려쳤다. 힘으로 돌진을 막을 심산이었다.

콧수염을 검을 부딪치는 척하더니, 손목을 젖혀 검을 뒤로 빼, 벤젠스의 검을 흘려보냈다.

붕.

벤젠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뒤로 표범이 팍 하고 땅을 찼다. 콧수염은 일반 병사와 달랐다.

방패를 비스듬히 밑으로 내리더니, 달려들던 표범의 진로를 막고 밖으로 쳐 냈다.

“캉!”

울음을 토해 낸 표범이 옆으로 날아갔다. 이 모든 동작이 달려든 뒤 고작 몇 초 이내 일어난 일이었다.

숏소드를 쥔 엔크리드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곧 심상에서 상대와 나만 남겼다.

한 점의 집중이다.

부상과 안도, 감정의 변화가 고도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

순간적으로 시간이 늘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엔크리드의 눈에 콧수염의 핏발 선 눈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손도 보였다.

콧수염은 그립의 끝, 폼멜 바로 위를 잡았다. 리치를 길게 해서 단숨에 베어 낼 심산이었다.

그는 그 상태 그대로 검으로 호를 그렸다. 위에서 밑으로.

언제 검을 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검이 내려온다. 칼날이 들이친다. 그게 마치 단두대의 칼날 같았다.

콧수염의 칼날이 이제 됐다고 오늘을 다시 반복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그게 싫었다.

호흡을 삼킨다. 숨을 내쉴 틈은 없다. 아프다고 징징거릴 틈은 더 없다.

익힌 건 중검술, 하지만 지금은 라그나에게 배운 기본기로 헤쳐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배우고, 익히고, 보고, 따라 한 수십 개의 검술 중 지금 쓸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수없이 당하며 연구하고 또 연구했기에.

언제나 보고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기에.

그의 몸이 본능에 따라 검을 들었다. 숏소드는 충격에 약하다. 힘으로 막으면 검째로 부서질 터였다.

콧수염은 승리를 확신했다.

눈앞의 얄미운 놈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

훙. 티잉, 치이이이잉. 팍!

결론만 말하자면 콧수염의 일격은 실패했다.

엔크리드의 어깨만 벴을 뿐이었다.

깊게 베여 피가 울컥 솟아났지만, 죽진 않았다. 죽이지 못했다.

“너.”

콧수염은 재차 공격하는 대신 놀란 토끼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불신감이 가득 찼다.

“어디서 배운 거냐!”

콧수염이 외쳤다. 엔크리드는 솔직하게 답했다.

“싸우다가 배웠다.”

미치 휴리어는 엔크리드 앞에 수없이 유검, 흘리는 기술을 보여 줬다.

그의 흘리는 기술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그게 위험한 순간에 부지불식 튀어나왔다.

콧수염의 검이 내려치는 순간, 숏소드로 받아 내며 옆으로 흘려 흩어 낸 거다.

칼날 중간을 들이밀어 힘을 받아 내고 그립을 느슨하게 풀며 흘린다.

힘의 배분, 타이밍, 어느 하나 잘못됐다면 이렇게 될 수 없었을 터였다. 고작 어깨만 베이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답한 엔크리드도 내심 놀랐다.

‘이게 되네.’

수없이 보고 당하고 연구했지만, 실제로 쓴 건 처음이다.

아니, 고된 훈련 없이 처음 쓴 기술이 성공했다.

그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재능이 없는 엔크리드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 겪는 일에 엔크리드는 심장이 뛰었다. 상대의 검을 흘리는 유검식의 기술은 어지간한 단련으로는 흉내도 못 내는 기술이었음에.

“이 새끼가!”

콧수염의 뒤에서 허공에 검을 휘둘렀던 벤젠스가 반전해 외치며 달려들었다.

콧수염은 몸을 돌려 벤젠스의 검을 쳐 내고 방패로 다시 전면을 가렸다.

퍽!

화살 하나가 방패에 꽂혔다.

솜씨 좋은 궁병 하나가 그를 노리고 쐈는데 그걸 막은 거다.

챙! 챙!

콧수염은 제자리에서 벤젠스와 검을 두어 번 더 나눴다.

그는 불길이 이는 눈으로 엔크리드를 노려봤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숏소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다시 돌격해서 죽이긴 글렀다.

오히려 여기서 발이 묶였다간 다 죽게 생겼기에, 콧수염은 몸을 돌렸다.

“퇴각한다!”

그가 외치고 물러났다. 물러나며 끝내 엔크리드를 향해 말했다.

“너, 잊지 않겠다.”

엔크리드는 진심을 담아 답해 줬다.

“잊어도 되는데.”

진짜였다. 굳이 자신을 기억해서 뭐 하겠다고.

벤젠스의 소대는 더 깊이 쫓지 않았다. 선봉에 섰다고 해도 지금은 아군보다 훌쩍 앞선 채였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역공으로 벤젠스의 소대가 전멸될 수도 있었다.

“야, 너 어깨!”

벤젠스는 콧수염이 물러날 때까지 노려보다가 돌아와선 엔크리드를 살폈다.

어깨에서 피가 죽죽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막고 흘렸으나, 완벽할 순 없었다.

그래도 엔크리드는 웃었다.

‘이게 되네.’

속으로 아까 처음 기술이 성공했을 때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상대의 검을 흘렸는지 되새기는데,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희열이 차올랐다. 이런 적이 처음이었으므로.

“야이, 미친놈아, 웃을 때냐?”

벤젠스가 다가와 어깨를 천으로 칭칭 감았다.

“붕대 없어! 당장 뒤로 빠진다. 3소대 뒤로!”

벤젠스는 자신의 소대를 뒤로 물렸다.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중대장은 적의 후미를 쫓되, 너무 깊게는 가지 말라고 했다.

주술에 한번 크게 데여서, 이쪽도 정비가 필요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벤젠스가 부축하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자신을 붙든 벤젠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표범도 데려가야 합니다.”

서로 목숨을 구했다. 이제 와서 버리고 갈 순 없는 거다.

“미친 자식아, 네 몸 걱정이나 해라.”

그리 말하면서도 벤젠스는 나가떨어진 표범까지 챙겼다.

어딜 다쳤나 싶어 보는데, 표범의 잇새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등 뒤에 축축하게 흐르는 게 뭔가 했더니.’

잇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놓치지 않은 거다. 엔크리드는 표범을 품에 안았다.

무겁진 않았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그런 힘을 냈을까.

낑.

표범이 품에서 신음을 흘렸다.

“가자!”

그 뒤 벤젠스가 엔크리드를 부축해 전장을 이탈했다.

중간부터 엔크리드는 비몽사몽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다.

검은 강의 뱃사공이 허공에 나타나 물었다.

“야,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과다 출혈로 헛것이 보였다.

대답할 힘이 없어 빤히 보니, 그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잖아.”

“반복되잖아. 수없이, 계속.”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어차피 다시 시작될 오늘, 대충 살면 어때서.”

“안주해, 멈춰, 갈고닦아서 다시 오늘을 맞이해. 죽으면 더 완벽한 오늘을 시작할 수 있잖아.”

“아,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래? 아니, 그거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정신을 반쯤 놓으면 어때, 누가 본다고, 누가 안다고. 그 오늘은 오롯이 너만을 위한 오늘인데.”

엔크리드는 입을 열 기운이 없었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반쯤은 끌려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답했다.

왜 안주해야 하는가.

반복된다고, 다시 기회가 있다고 어째서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가.

그럼 수없이 반복한다고 해도 계속 제자리인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면 오늘에 갇힐 것이다.

그럼 내일이 없다.

내일이 없다면 꿈도 없다. 꿈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난 멈추기 싫어.’

힘겹게 내딛는 걸음이 다른 이에 비해 반의반밖에 안 된다 하여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기사가 될 수 없다고 해도, 기사가 되기 위해 발악하고 싶었다.

툭.

걸을 힘이 없어 늘어졌더니,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죽지 마라.”

귀 바로 옆에서 벤젠스가 중얼거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느샌가 검은 강의 뱃사공은 사라졌다.

엔크리드는 새삼 이게 어떤 저주인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아니었다.

언제나 내일을 향해 걷고자 했다.

실패한 내일이, 완벽한 오늘보다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안주하면 끝나.’

이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이유다. 수없이 오늘을 반복하다 보면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없다.

생각의 끝에 엔크리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게 최선이었나?’

모른다. 완벽한 오늘이 어떤 오늘인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엔크리드가 보낸 ‘오늘’은 반은 운이 따라 주기도 한 오늘이었다.

그 운이 다시 시작하는 오늘에서 찾아오리란 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언제나 그러하듯 내일을 향해 걸어가면 그만이다.

품 안에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흐려진 눈으로 밑을 보니 흑표범이 자신을 바라봤다.

호수 같은 푸른 눈이 보인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정신을 잃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시 오늘을 반복하겠지.

내일로 가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하진 않을 것이다.

다시 반복해, 또다시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므로.

어둠이 찾아와 엔크리드를 감싼다. 그는 어둠의 세계에 초대된 방랑자가 되어 정신을 잃었다.

* * *

“내가 잘못 골랐을까?”

검은 강의 뱃사공이 보였다.

엔크리드는 그의 혼잣말을 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반들반들한 검은 거울 같은 낯이 보였다.

“두고 보자고.”

그의 한마디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막사 천장이 보였다.

“어우, 살았수? 이번에는 정말 뒈지는 줄 알았수다.”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깨, 등, 다리, 옆구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머리도 어질어질했다.

“마지막 어깨를 베인 게 컸수다. 어떤 놈이 했는지 모르지만, 야무지게 베었수.”

렘이 계속 떠들었다. 정신이 반쯤 나갔다가 돌아온 엔크리드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곧 옆구리에서 온기가 느껴진다는 걸 깨닫곤 손을 내렸다.

어깨 어림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에 부들부들한 털이 만져졌다.

“크르릉.”

손길이 기분 좋은지 흑표범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오늘을 넘겼구나.’

“기절하는 거 버릇 들겠수다.”

“누군 졸도하고 싶어서 졸도하냐? 목말라.”

“그랬수?”

엔크리드의 눈에 렘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뒤에 선 왕눈이도.

왕눈이가 물을 가져다줬다. 몇 모금 마시니 마른 대지에 물을 주듯, 목구멍이 금세 촉촉해졌다.

“이야, 우리 분대장 명 질기다니까요. 봐요, 살았네.”

물을 마시는 걸 보고 왕눈이가 말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작센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저 뒤쪽으로 종교에 심취한 분대원이 기도를 올린다.

“주여, 기도를 들어주심에 감사 기도를 올리나이다.”

라그나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괜찮습니까?”

“죽을 정도는 아니야.”

살았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을 지나 내일을 맞이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수수하게 웃다가 다시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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