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6화 (46/170)

46. 수없이 실전을 거듭한 (2)

전신 곳곳에 자상과 관통상을 입어서 치료사가 다녀갔다고 들었다.

“다행히 영구적인 장애는 없을 거라네요. 운도 좋지요. 우리 분대장.”

왕눈이가 웃으며 말했다.

“꼭 내가 다쳤으면 하는 말투 같다.”

“아니, 걱정하는 겁니다. 걱정. 영광인 줄 아세요. 제가 남자 걱정하는 건 분대장이 처음이니까.”

“오냐.”

곧 철수하리라 생각했는데, 아군은 아직도 아즈펜 공국과 대치 중이었다.

전투가 더 있으려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엔크리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몸으로 전장에 다시 서는 건 무리였다.

구경만 하는 거라면 모를까.

왕눈이가 사과를 놓고 가서 그걸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자니, 곧 렘이 들어왔다.

분대 전원이 자리를 비워서 막사에 사람이 없었다.

렘은 엔크리드 옆에 앉더니,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 위에 턱을 얹었다.

그렇게 입술을 반듯하게 다문 채로 렘이 엔크리드를 빤히 바라봤다.

“고백할 생각이라면 거절을 먼저 하지.”

“나 여자 좋아하는 거 모르슈? 난 분대장과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물에 빠지면 여자를 구할 거요. 물론 그 여자가 예쁘다는 전제하에.”

“괜찮아. 나 헤엄 잘 쳐. 안 구해 줘도 알아서 잘 살아.”

“그럼 나중에 나 구해 주슈. 생각해 보니, 내가 헤엄을 잘 못 치네.”

그럼 이 새끼 무슨 생각으로 물에 빠지는 여자를 구한다고 한 걸까.

엔크리드는 참 렘답다고 생각했다.

“응. 돌을 던져 주마.”

평소와 같은 농담 따먹기였다. 그러다 렘이 입을 멈추고 빤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회색 눈동자가 떨림 없이 엔크리드를 직시했다. 그 눈에서 전에 없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할 말 있냐?”

“주술인 거 어떻게 알았수?”

음? 엔크리드는 이 질문을 여기서 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정찰 임무 중에 봤으니까.”

“그거만 보고 주술이란 걸 짐작했단 거유? 깃대가 목표인 걸 알고 달리는 것 같던데?”

맞다. 그게 목표였다.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반복한 오늘을 통해서 알았다고 할 순 없었다.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거짓과 변명으로 둘러대려고 하는데, 빤히 자신을 보는 회색 눈동자가 마음에 틱틱 걸렸다.

솔직히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무조건 거짓으로 넘겨야 할까.

어설픈 거짓말은 금세 알아챌 것이다. 그런 직감이 왔다. 엔크리드는 렘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을 섞어서 말했다.

“예전에 개척민 출신과 같이 지낸 적이 있다.”

진실이었다. 렘이 개척민 출신이었으니까.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들은 게 있어.”

이 또한 진실이었다. 렘이 주술에 관해 말해 줬으니까.

“그래서 궁리하고 추측했지.”

이건 꼭 진실이라 할 수 없지만, 어떻게 보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궁리하고 추측하는 대신 오늘을 반복하고 몸으로 굴러 알아냈으니까.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몸으로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엔크리드는 그렇게 믿고 말했다.

“깃대가 주술의 매개인 것 같더라고. 안개가 끼기 전에 적 대형이 이상한 걸 봤고 뭐, 그다음에는 돌격했지.”

“흐음.”

거짓에 진실을 섞으면 왜 사람들은 잘 속는가.

그건 말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기 때문이었다. 진심이기에 감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상대의 말에서 거짓의 표식을 찾아내기 어렵다.

엔크리드는 말할 수 없는 것 빼고는 전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렘은 그 말을 믿었다.

완전히 믿지 않았다고 해도 따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거였수? 보자마자 알아낸 게 신기했수다.”

“주술이면 뭐?”

“그런 거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알려 줄라고 그랬수다.”

“그래?”

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엔크리드는 전투가 있던 날 렘이 자리를 비웠다는 걸 떠올렸다.

분명 돌격을 같이 했으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뒤로 쭉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부대로 복귀했다.

“전장에서 어디 갔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별거 아니유. 그 깃대를 세운 놈이 누군지 통 궁금해서 잠깐 보고 왔수다.”

“……보고 왔다고?”

“도끼로 얘기도 나누고 왔수다.”

렘이 씨익 웃으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엔크리드는 깃대를 쓰러뜨렸던 때를 떠올렸다.

주술사 놈이 딸랑딸랑 방울 따위를 흔들다가 금세 보이지 않았었다.

그때는 깃발을 망가뜨리기 바빠서 신경도 쓰지 못했는데.

그 뒤 홀로 뒤로 내빼다가 렘의 도끼에 걸린 듯했다.

엔크리드는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렘이 돌발 행동을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전 전투에서는 매의 발톱인가 하는 놈을 잡겠다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그걸 아는 소대장은 깔끔하게 사고뭉치 분대를 전력에서 제외했다.

남은 분대만 소대 전력으로 친 거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은 있었다.

이번에는 엔크리드가 먼저 진형을 이탈했다는 거다.

그게 특이한 일이었다.

“여, 괜찮냐?”

그 소대장이 막사를 찾았다.

“병문안 온 겁니까? 우리 복귀 안 합니까?”

엔크리드가 대뜸 물었다. 소대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위에서 아직 명령 안 떨어졌다. 전원 대기야.”

곧 겨울이다. 전투가 이어지기 힘든 계절이다. 그렇다고 이쪽 진지를 완전히 비워 놓지는 않겠지만, 이번 전장에서 이쪽 대대가 크게 힘을 썼으니, 교대는 해 줄 것이다.

그러니 아직 복귀 명령이 안 떨어진 게 이상한 일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

“네.”

엔크리드의 이탈, 소대장은 그때 당시에는 이게 큰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드디어 엔크리드가 미쳤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이후 엎드리란 외침과 방패를 들란 외침에 간신히 살아남고.

안개 속에서 이제 죽었나 싶은 순간에 갑자기 안개가 걷히고.

반전해 적군과 싸웠다.

나중에 들어 보니, 안개가 주술이었고 주술은 매개가 있는데, 그 매개가 망가지거나 주술사가 죽지 않으면 주술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전부 중대장의 입을 통해서 들은 거다.

“누가 그랬을까?”

중대장이 녹색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었다.

소대장은 그때 엔크리드의 이름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 분대가 무슨 짓을 했다고 판단했다.

왜, 그, 안개가 끼기 전에 엔크리드가 뛰쳐나가지 않았나.

그리고 그 외침도 엔크리드의 목소리 같았으니까.

소대장이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주술이라고 하더라고, 그 안개가.”

“아, 네, 그렇죠. 제가 보고했습니다.”

맞다. 정찰 임무로 파견 나온 엔크리드가 보고한 내용이다.

“음. 그랬지.”

소대장은 잠시 엔크리드를 보다가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건네고 일어섰다.

‘말도 안 되지.’

그는 엔크리드의 실력을 안다. 최하급은 아니다. 잘 쳐 줘야 어디 마을 자경단장이나 할까.

휘하 분대원 중에는 무서운 놈들이 많지만, 엔크리드는 아니다.

주술의 매개는 적군이 바보 천치에다가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적진 안쪽 깊숙한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 누군가 거기까지 잠입했어야 한다는 건데.

‘그 자욱한 안개를 뚫고?’

쿼렐과 화살 비를 맞으며?

사고뭉치 분대장이?

어림도 없지.

혹시나 해서 렘이 했나 물어보니 아니란다.

라그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 어느새 곁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럼 나머지 분대원인가 싶지만, 그들도 뒤쪽 소대 진형의 일부로 싸웠다.

‘혹시 본대에서 지원이 나왔나?’

소대장은 그리 생각하며 막사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훅 떨어진 기온 탓에 추위가 찾아왔다.

“진짜 회군 안 하나.”

그도 도시의 공기가 그리웠다. 집과 아내, 딸아이가 보고 싶었다.

화롯불에 감자를 구워 먹고, 푹 자고 싶었다.

* * *

이틀을 누워 있자 엔크리드는 일어나 움직일 만했다.

“무리하지 마시죠?”

왕눈이가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았다.

“그 맹수는 갔죠?”

왕눈이가 물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게. 안 보이네.”

“분대장 잘 따르는 것 같던데.”

“넌 무서워하지 않았냐?”

“전 무섭죠. 맹수잖아요. 맹수.”

“아직 새끼 같던데?”

“엔리라고 정찰 같이 다닌 사냥꾼 알죠? 분대장이랑 같이 나갔다고 하던데.”

대뜸 왕눈이가 물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왕눈이 놈, 발 참 넓다고.

어떻게 엔리까지 아는 걸까.

“그 친구가 평원 사냥꾼 출신이란 말입니다.”

그건 엔크리드가 더 잘 안다. 직접 배운 것도 많고.

“엔리가 말하길, 그린 펄 초원에 맹수가 많이 사는데 그중에서 으뜸가는 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지 아십니까?”

“뭔데?”

“푸른 눈의 흑표범, 청안표랍니다. 레이크 팬서라고도 부른다고 하고요.”

왕눈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 이야기가 못내 흥미를 돋운 듯했다.

“눈이 마치 호수와 같아서 레이크 팬서라고 하기도 하는데, 하여간 얘들이 가젤이나 누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보통 땅에 있는 무슨 기운을 삼키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영물이랍니다. 그 발톱 하나만 해도 만 크로나가 넘는다고 하던데.”

크로나는 제국이 만든 화폐 단위다.

동화 한 닢을 1크로나로 치는데.

동화 백 닢이 은화 한 닢이고, 다시 은화 백 닢이 금화 한 닢이니.

만 크로나면 금화 한 닢의 가치였다.

발톱 하나에 금화 한 닢이라.

엔크리드의 봉급보다 높았다.

“그 발톱이 사람 멱을 따던데, 뽑을 수 있겠냐?”

“……아우, 전 욕심 없어요.”

왕눈이가 손사래를 쳤다.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이마에 땀이 났다. 아릿하게 통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도 죽다 보니 통증의 정도로 상처의 상태를 어림짐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리하면 덧납니다.”

작센이 그걸 지켜보다 말했다. 다들 어디 갔는지, 왕눈이와 작센만 남아 있었다.

“조절하는 중이다.”

대강 답하고 다시 몸을 움직이다 보니, 콧수염의 일격을 흘렸던 게 떠올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안 될까?

아니, 또 몇 번 해 보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렘과 라그나가 돌아왔다.

“좀 떨어져서 걸어라. 게으름 옮는다.”

렘이 툭툭 시비를 걸고.

“넌 왜 매일 죽고 싶어 안달인 거냐?”

라그나는 그 시비를 두 배로 받아쳤다. 싸움이 격화되기 전에 엔크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검술 쪽으로.”

둘의 시선이 돌아갔다.

“말하슈.”

“검술이라면 제가 답해 드려야죠.”

둘이 다시 서로를 노려보기에 엔크리드가 급히 설명을 이어 갔다.

어려운 얘기는 없었다. 적이 하는 걸 몇 번 봤는데 그게 몸에 배서 부지불식간에 나오더라.

그런 얘기였다. 느낀 바를 최대한 덤덤히 말하니.

“그런 거야 뭐, 하다 보면 되는 거 아니유?”

렘이 먼저 답하고.

“재밌는 경험이군요. 전 어릴 때부터 그래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분대장 같은 경우에는 음, 그렇죠. 신께서 축복을 내려준 겁니다. 행운의 여신이 발을 헛디뎌 금화를 쏟은 거죠.”

라그나가 이어 말했다.

둘 다 딱히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둘이 또 엔크리드를 사이에 두고 투덕거리더니, 자세한 설명이 튀어나왔다.

“싸우다 보면 시야가 트일 때도 있습니다. 보통은 수없이, 정말 수없이 실전을 거듭해야 그런 일이 한 번쯤 일어난다고 하죠. 한 점의 집중을 갖췄다면 그럴 확률은 더 높을 테고요.”

“야수의 심장이 좀 몸에 붙었잖수? 눈을 감지 않고 상대를 빤히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거유. 그런 기회가, 그러니까 눈앞에서 빤히 상대가 검을 쓰는 걸 볼 수 있었다면, 검을 쓰는 방식이나 힘의 배분이 보일 때도 있었을 거유. 그럼 몸이 알아서 반응할 때도 있는 거고,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기가 갖춰졌을 때 얘긴데.”

“기본기도 기본기지만, 거친 실전을 수백 번은 거쳐야 할 텐데.”

둘의 말을 들은 엔크리드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뿐인 오늘이.

엔크리드에게는 더없이 치열한 수백 번 넘는 오늘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렇게 포기하며 보낸 오늘이 아닌.

매 순간 발악하고 최선을 다해 보낸 오늘이다.

견디고 즐기며 보낸 숱한 시간이 그에게 행운을 준 것이다.

기실 행운이랄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베이고 찔리고 긁히고 죽으면서까지 이겨 내려고 연구한 대가지.

그 기반에는 당연하게도 대담함을 준 야수의 심장과 한 점의 집중이 있었다.

‘새삼 고맙네.’

고로 이 둘 덕분이었다. 하물며 라그나는 자신 검술의 기초를 다 뜯어고쳐 주지 않았나.

미치 휴리어와의 전투, 콧수염의 추적, 전장에서의 오늘.

복합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 한 가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검을 쥐고 싶다. 휘둘러 보고 싶다. 마지막 흘리기 기술이 얼마나 몸에 붙었는지 시현해 보고 싶다.

“대련하고 싶다.”

엔크리드가 중얼거리자, 렘과 라그나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중 렘은 말도 덧붙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넌 참 정상이 아니다, 미쳤냐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는데, 내가 볼 때 분대장은 나보다 더 미친 놈이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말 렘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툭하면 주변 병사를 괴롭히질 않나.

상관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고 하질 않나.

이런 미친놈이랑 동급, 아니 그보다 더 미친놈이라니.

“오늘은 그 말에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 몸으로 무슨 대련입니까?”

아니, 대련 좀 하고 싶다고 사람을 이렇게 몰아가는 건가.

엔크리드는 무척 억울했다.

“그 몸으로 대련은 무리다. 분대장.”

펄럭.

천막의 문 역할을 하는 덮개를 밀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요정 중대장이었다.

엔크리드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중대장이 성큼 다가왔다.

“너였나.”

군례를 표하기도 전에 중대장이 대뜸 물었다.

엔크리드는 예술가가 만든 조각같이 차갑고 날이 선 아름다운 요정을 보며 입을 열려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부터 묻혔다.

사실 렘이 아니라 이쪽에서 물어 오리라 예상했다.

어떻게 주술을 파훼했는가.

그건 지휘부 쪽에서 물을 질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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