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스콰이어 또는 견습 기사
요정 중대장은 전투 이후 주술의 매개가 깃발임을 알았다.
그럼 이 깃발은 부순 건 누구인가?
그렇게 전장의 상황을 역추적하니, 답이 나왔다.
‘사고뭉치 분대장.’
그게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다.
대대장은 신경도 쓰지 못한 일이었다. 주술의 매개를 누가 부쉈는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는 멍청한 주술사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기실 대륙의 많은 주술사 중에는 사이비가 많기에 그 말이 합당하게 들리긴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대대장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 터였다.
무려 직속상관 이상의 위인이 부대에 왔으니까.
“뭐가 말입니까?”
너였냐는 질문에 답이 돌아왔다.
“주술, 깃대, 매개.”
짧은 단어 세 개로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엔크리드는 누가 묻지 않아서 그렇지, 꼭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어떻게?”
짧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이렇게 창을 들어서 훅 던졌습니다.”
“미끼가 다섯이었다.”
깃대는 총 여섯 개, 진짜는 하나였다.
“찍었습니다.”
“깃대가 매개인 건?”
“정찰 나가서 본 게 있었고, 주술에 관해 사전에 아는 것도 좀 있었습니다.”
대답에 막힘이 없다. 요정의 날카로운 직감은 상대가 거짓을 말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다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 꼭 요정의 직감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뭐랄까.
자신이 했지만, 그걸 자세히 말하기는 꺼리는 것 같았다.
요정 중대장은 엔크리드의 파란 눈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거 물어보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 얼굴도 볼 김에.”
그러곤 잠깐 말을 삼킨 중대장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우린 인연인 것 같군.”
중대장이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이었다. 황당해서 굳은 엔크리드의 옆구리를 렘이 찔렀다.
“비법이 뭐요?”
“뭐?”
“요정을 꼬신 비법 말해 보슈. 내 경청하겠수.”
“대단하군요.”
라그나도 한마디 보탰다.
“그런 거 아닌 것 같은데.”
엔크리드의 외모는 왕눈이가 인정하는 바이다. 따로 가꾸지 않아도 도시에 있다 보면 여자가 꼬일 때도 있었다.
숫총각이 아닌 건 당연한 거고.
엔크리드는 남녀 간의 오가는 시그널을 착각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도, 맹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 오간 대화는 절대 아니었다. 시그널 따윈 없었다.
오히려 뒤가 찝찝한 기분만 남았을 뿐이지.
하물며 직속상관의 상관이다.
“따로 만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아, 알았수다. 그때 맞수? 의무 막사에 있을 때? 그때밖에 없는데!”
“아니라고, 이 미친놈아.”
렘은 그 후로 네 시간을 같은 소재로 떠들었고.
라그나는 중간에 낮잠을 자러 갔다.
나중에 들어온 작센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엔크리드의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게 했고.
나중에 들어온 왕눈이는 뭐라고 떠들려다가 렘이 한 말에 엔크리드 곁에 바짝 붙어 말했다.
“그러니까 전쟁터에서 구르지 말고 저랑 귀부인 살롱이나 하자니까요.”
“안 해. 미친놈아.”
왕눈이는 크로나를 잔뜩 모아서 제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란다.
귀부인 살롱, 그러니까 곱상한 남자들이 귀부인과 노닥거리는 것이 목적인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란다.
가게를 차려 술도 팔고 안주도 판다는데.
목적이 분명하니, 술과 안주를 몇 배 값을 받고 팔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올 거라고, 같이 하자고 했었다.
렘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가 얻어터질 뻔한 뒤로는 잘 꺼내지 않던 제안이 오랜만에 나왔다.
“나한테는 말하지 마라. 도끼로 쪼갠다. 네 머리.”
렘이 뒤에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안 해요.”
왕눈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만 야만인인 척하네.”
왕눈이가 조용히 툴툴거렸다. 크게 말할 용기는 없어 보였다.
아니, 이 정도면 용기가 출중한 거다. 지금 중얼거린 말을 렘이 못 들었을 리 없으니.
렘이 눈을 부라리려 하자, 왕눈이가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이 얘기하려고 부리나케 온 건데, 분대장 얘기에 깜빡할 뻔했잖아요.”
깜빡하긴.
렘이 뭐라고 대거리하기 전에 후다닥 말한 거지.
엔크리드는 알면서 속아 줬다.
중대장과 자신의 러브 스토리만 아니면 그 어떤 얘기도 지금보다는 가치가 있을 테니까.
“온대요.”
“누가?”
“아, 왔대요.”
왕눈이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엔크리드도 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사단 스콰이어가요.”
“……붉은 망토 기사단?”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네.”
현재 엔크리드와 이들이 몸담은 사단의 이름이 사이프러스다.
그건 곧 붉은 망토 기사단에 소속된 한 기사의 이름이기도 했다.
보통 군대 이름에 기사의 이름을 붙이고, 그 기사는 기사단에 속한다.
물론 기사라 불릴 만한 이들이 많지는 않다.
기사는 대륙에서도 흔하지 않은 재능의 소유자들이니까.
그래서 왕국의 기사단에는 기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후일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
기사를 따라다니는 종자이자, 제자인 스콰이어, 또는 견습 기사.
견습 기간이 끝난 뒤 기사에게 인정받으면, 그들은 곧 준기사가 된다. 그렇게 기사단에 종군하게 되는 구조였다.
보통 스콰이어는 기사와 별개로 전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런 이가 지금 전장에 왔다는 건.
‘곧 준기사가 될 몸.’
기사란 무엇인가.
한 음유시인이 말하길.
“기사란 사람을 일반 사람과 동일하게 보는 건 아주 많이 잘못된 생각이죠. 네, 맞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어떤 범주를 벗어난 이들이죠. 그게 아니라면 프록과 같은 이들과 어떻게 맞붙겠습니까?”
기사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라 한다.
그럼 준기사란 무엇인가.
기사가 되기 전,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말한다.
준기사는 전투와 싸움의 전문가다. 기사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이들이라면, 준기사란 인간의 한계에 맞닿아 있는 이들이다.
곧 준기사가 되어 기사단에 종군하게 될 스콰이어.
보고 싶었다. 그들의 실력이 궁금했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기사는 명예만 갖춘 직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시대의 기사는 무력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의 일부가 이곳에 왔다.
“보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인데.”
렘이 엔크리드를 보고 말했다.
“왜 아니겠어.”
“벌써 출진 준비 끝났다고 하던데요.”
왕눈이가 말했다.
“혼자 왔다고 하디?”
렘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왕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혼자면 충분하다고 했대요.”
엔크리드는 그 말에 아군이 왜 회군을 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아즈펜이 주술을 준비했다면.’
이쪽은 무력을 비장의 카드로 삼았다.
나우릴리아도 아즈펜도.
매년 지루한 국지전을 반복하는 곳에 변수를 둔 거다.
‘이거로 평야 일부를 집어삼키겠다는 의도일까.’
만약 주술이 제대로 먹혔다면 준기사든 뭐든 와 봤자 할 일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술은 막혔고, 역으로 아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하루나 이틀만 빨리 스콰이어가 왔다면 그대로 몰아칠 작정이었을 거다.
‘좀 늦긴 했지.’
이 정도면 적군도 정비가 끝났다.
“출진 준비를 해라! 당장 전군 움직인다!”
엔크리드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어지던 상념을 접었다.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그러다 불쑥 천막 안으로 소대장이 얼굴만 들이밀었다.
“야, 들었냐, 어, 들었겠네.”
소대장이 묻다가 크라이스를 보고 혼자 답했다.
“전부 출진이다. 이번 기회에 그린 펄 평야의 진지를 저 앞까지 당겨 버린단다.”
“작전을 그렇게 대놓고 떠드는 겁니까?”
엔크리드가 소대장을 보고 물었다.
“숨길 것도 없는 거지. 이제 곧바로 나간다니까? 너도 가게?”
“구경은 하고 싶네요.”
엔크리드가 아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부상이 다 나은 건 아니다. 본래라면 전장에 나가는 건 삼가야 하지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크라이스가 손을 들고 말했다. 언제나 후방에서 제 목숨 잘 챙기는 놈이다.
엔크리드가 그 곁에 있으면 될 것이다.
소대장은 엔크리드를 가족처럼 아끼진 않는다. 나이도 꽤 많아서 부담스러울 때도 많다.
하물며 사고뭉치 분대를 통솔하는 분대장이다 보니, 부딪칠 때도 많았다.
그래도 엔크리드가 죽는 건 마음에 걸렸다. 매일 검을 휘두르고 그 어떤 순간도 쉬이 흘려보내지 않아, 주변의 빈축을 사기도 하는 노력가.
그런 사람이 시체가 되는 걸 보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알아서 몸 잘 사려.”
소대장이 말하고 나섰다.
“구경 가고 싶으면 가야지.”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가 주섬주섬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
작센은 검을 차고 쓰로잉 나이프를 몇 자루 챙겼다. 평소에는 잘 챙기지도 않던 장비다.
“옆에 있겠습니다.”
작센이 말했다.
“내 옆에?”
렘이 농을 걸었다. 작센은 고개를 저었다.
“넌 노린내가 나서 같은 막사를 쓰는 것도 힘들다.”
상대를 살살 긁는 건 렘이 잘하지만, 한 방에 불쾌감을 치솟게 하는 건 작센도 잘했다.
“분대장, 난 아즈펜보다 저 새끼 머리를 먼저 쪼개고 싶은 것 같수. 어떻게 생각하슈?”
“참아. 구경이나 가자. 스콰이어가 얼마나 잘 싸울지 궁금하지도 않냐?”
“겁나게 잘 싸우겠지, 뭐.”
렘이 답하고 제 도끼를 챙겼다.
엔크리드가 절뚝거리며 출진하려고 대열을 맞추자, 벤젠스가 다가왔다.
“죽고 싶어 환장한 거냐?”
전투가 끝난 뒤, 고맙다고 말을 전했더니 툴툴대며 막사까지 찾아왔었다.
그러더니 빚은 갚았다고, 이제 됐다고, 속 편하다고, 혼자 신나게 떠들었다.
무슨 빚이냐고 물으니.
“그때 의무 막사 화재, 벌써 잊었냐?”
“그럴 리가. 잊었겠습니까?”
잊었었다. 하도 오늘을 반복하다 보니 생긴 부작용이다.
그래도 완전히 잊을 순 없는 일이었다.
크랑, 암살자, 그리고 불.
불은 엔크리드가 지른 거였다. 벤젠스는 불에 타 죽을 뻔한 걸 구한 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암살자의 손에서 구한 거였다.
‘구한 건 구한 거니까.’
빚은 빚이었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니까.
그 덕분에 자신을 보고 냅다 달려와서 구하지 않았나.
여긴 왜 왔냐고 전장에서 눈을 부라리는 벤젠스를 보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여길 왜 나와?”
“구경하고 싶어서요.”
“뭘?”
“스콰이어가 왔다면서요.”
“아, 야, 너무 나서지 마라. 두 번은 안 구해.”
벤젠스는 그렇게 말하고 본인의 대형으로 돌아갔다.
“저 새끼는 왜 갑자기 친한 척이유? 전에 툭하면 시비 걸던 놈 아니었수?”
옆에서 렘이 물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다. 벤젠스는 엔크리드를 참 싫어했었다. 그게 언제 일인지.
“저 새끼 아니고 소대장이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사람 괜찮더라.”
“너무 무르게 사람 대하지 마슈. 나중에 뒤통수 맞고 아프다고 꺽꺽대면 늦은 거유.”
“너나 잘해.”
부대 정렬과 이동이 순식간에 끝났다. 도열이 깔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형도 넓게 펴진 방사형인 채로 행군이 시작됐다.
행군의 선두에 누군가 덩그러니 나선 게 보였다.
붉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린다.
선두에 선 이가 망토를 두른 채로 터벅터벅 걷는 게 보였다.
겉만 봐서는 스콰이어, 준기사의 대단함이 엿보이지 않았다.
“흠, 걸음을 보니까 좀 치겠수다.”
렘이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좀이 아니다. 자세가 잡혀 있어. 상대 쪽에 그, 프록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재미없는 싸움이 되겠다.”
라그나도 말하고.
작센도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그의 눈이 붉은 망토의 뒤를 훑는 것처럼 보였다.
엔크리드 옆에 있던 왕눈이는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후방으로 빠지죠. 이제 빠져야 해요. 아니면 휩쓸립니다.”
왕눈이는 빠져야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망토가 파라락 휘날렸다. 망토가 바람을 타고 뒤로 펄럭인다. 망토의 주인이 앞으로 내달렸다.
엔크리드는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보는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앞에서 달리는 사람의 뒤로 잔상이 남았다.
사람이 얼마나 빨리 달리면 저렇게 되는 걸까?
“다리에 의지를 담았나 본데.”
라그나가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엔크리드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나, 지금은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귀를 닫고 집중할 시간이었다.
망토의 주인이 달리는 걸 보고 놀란 적군이 화살을 쐈다.
이전처럼 쇠뇌병을 따로 배치하진 않았는지, 머리 위로 화살이 뭉쳐 날아왔다.
최소 백 명 이상의 궁수가 시위를 당겼다가 놓은 듯했다.
망토 기사의 위로 화살 비가 쏟아졌고.
스콰이어는 검을 들어 휘두르는 대신, 가속했다.
뻥!
땅이, 흙이 분수처럼 치솟고 망토의 주인은 어느새 적군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화살의 피격 범위를 달리는 것만으로 벗어난 거였다.
확실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