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8화 (48/170)

48. 끝이 보인다면, 기어서라도 넘을 수 있었다.

소규모 국지전에 이 정도 수준의 무력이 투입된 건 처음이었다.

상대가 주술을 준비했듯이.

이쪽에서 준비한 패는 스콰이어였다.

그 스콰이어가 전장에 미친 여파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전진하는 것으로 화살 비를 피한 준기사가 검을 뽑아 그었다.

휭.

허공에 은빛 선이 그어진 순간 전면을 막은 병사 셋의 목이 덜렁 잘렸다.

스콰이어는 휘두른 검을 당겨서 회수하곤 위에서 밑으로 끊어쳤다.

검은 벼락처럼 떨어졌다가 곧바로 위로 솟았다.

보병용 단창을 들고 있던 병사의 머리통이 그 궤도에 걸렸다.

빡!

베는 게 아니라 부쉈다. 검을 끊어친 충격으로 병사의 머리통을 빠갠 검이 이번에는 나비처럼 날았다.

날아든 나비의 날갯짓은 곧바로 공포를 머금은 장송곡이 되었다.

곳곳 빈틈에 찌르기가 된 검의 날갯짓이 적군의 숨통을 앗아 갔다.

그러자 병사 둘이 크고 두툼한 나무 방패를 들고 진로를 막았다.

전신을 가리고 막아서자, 나비의 날갯짓이 방패에 막혔다.

검이 퍽퍽하고 방패를 때리자, 방패 겉면에 움푹 파인 자국이 남았다.

“조여!”

적군 병사가 외쳤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한들 사신의 손길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붉은 망토의 주인은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잡고 가로로 휘둘렀다.

꽝! 카가각!

검이 방패를 후린다. 쇠테 부분은 잘리지 않고 휘어져 방패의 역할을 해냈으나, 그걸 쥔 병사의 손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끄아악!”

방패를 쥔 손목이 비틀려 부러졌다. 손목뼈가 피부를 뚫고 나왔다.

방패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자, 검이 횡으로 병사의 몸통을 갈랐다.

상체가 잘려 내장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주변 병사의 눈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이런 시발.”

아즈펜 공국 병사 중 하나가 울먹이며 욕설을 뱉었다. 망토의 주인이 그걸 들었는지 코를 씰룩이더니 곧바로 땅을 박찼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무섭지만, 이 작자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발이었다.

땅을 박찼다 싶으면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나타나 병사의 목을 자르고 몸에 구멍을 냈다.

그 앞을 막으려고 방패를 들이밀어도, 갑옷을 지니고 막아서도, 전부 무의미해 보였다.

“쏴 버려!”

지휘관 중 하나가 외쳤다.

과감한 판단이었다.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서른 명의 쇠뇌병이 쿼렐을 쐈다.

근거리 사격을 전부 피할 순 없다. 지휘관은 확신했고.

망토의 주인은 그 확신을 깨부쉈다.

꽝!

그는 쿼렐이 자신에게 닿기 전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버렸다. 쿼렐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위로 뜬 건 떨어지기 마련이다.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망토의 주인은 아즈펜 공국 지휘관의 열 걸음 앞으로 떨어졌다.

적진의 심장부였다.

“……막아!”

아즈펜 공국 최고 지휘관의 외침이 애처로웠다.

그레이 독 부대가 남아 있다면 모를까.

그들은 패전의 책임과 미치 휴리어의 부상,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이미 물러난 뒤였다.

“후우우.”

긴 숨을 내뱉은 망토의 주인이 검을 다시 휘둘렀다. 위에서 밑으로, 아래에서 위로.

쌔액!

칼날이 휘어지며 채찍처럼 지휘관의 호위병을 휘갈겼다.

뻑! 빠가가각!

몸에 두른 두꺼운 가죽 갑옷이 통째로 잘렸다. 철제 투구를 쓴 호위병은 검면에 머리통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뻥!

한 대 맞고 옆으로 구른 호위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겉으로 보면 무사하나, 두개골 안쪽이 충격으로 부서져 죽은 거였다.

호위를 해치운 스콰이어는 그대로 지휘관의 목에 구멍을 냈다.

푹.

스콰이어는 그대로 적진 한복판에서 홀로 적군의 지휘관을 죽이고, 돌아서 복귀했다.

복귀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뻥 하고 적군을 발로 걷어차더니, 그대로 땅을 몇 번 박차고 내달렸다.

멀리서 보면 붉은 줄이 전장 한복판에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엔크리드와 일행은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렘은 망토의 주인, 스콰이어를 보며 좀 친다고 생각했다.

‘놀 줄 아네.’

적진 한복판을 휘저을 줄 아는 놈이다.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힘의 우위를 명확히 보여 줌으로써 공포심을 심었다.

그걸 통해 적진을 마음대로 유린했다.

특히 상대가 준비한 쇠뇌병의 기습을 피한 게 인상적이었다.

‘나였으면 쇠뇌병 무리로 먼저 뛰어들 텐데.’

상대는 확실히 배운 태가 났다. 전투와 전쟁의 전문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는 쇠뇌병을 먼저 처리하는 대신 놔뒀고.

그들이 자신을 노렸을 때, 아껴 둔 다릿심을 보였다. 땅을 박차고 허공을 넘어 적 지휘관을 덮쳤다.

한 마리 비호와 같았다. 날개 달린 호랑이를 보는 듯했다.

라그나는 상대 수준을 가늠하고 자신과 비교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먼저 간 상대다.

‘저 정도면.’

얼마 안 있어서 당도할 수 있다. 굳이 지름길로 가지 않아도 뼈를 깎는 수련을 하지 않아도.

렘이 상대의 전략을 봤다면, 라그나는 상대가 지닌 능력의 수준을 가늠했다.

‘검술이 날카롭군.’

쾌검을 기반으로 한 중검이다. 얼핏 보면 정검을 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부 눈속임이었다.

쾌검과 중검.

두 개를 섞어 쓴다. 훌륭한 검술 선생이 있는 게 분명했다.

보통 두 개의 검식을 섞어 배우면 기본기가 어설프기 마련인데.

붉은 망토의 스콰이어에게는 그런 어설픔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스콰이어라니까.’

수준을 가늠한 라그나는 의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미 길이 보이고 목적지가 빤히 보인다. 먼저 간 사람을 본다고 해서 호승심이 끓어오를 일은 없다.

그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일만 남았을 뿐.

그저 훈련이, 단련이 지루하기에 괴로울 뿐이다. 감정이 메마른 상태로 검을 단련하는 일만 남기에 그렇다. 재능이 너무도 출중해서 생기는 문제였다.

작센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했고, 빈틈을 찾았다.

‘적어도, 다섯 번.’

적군은 망토의 주인을 해할 수 있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였다.

지휘관이 멍청한 탓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격이란 점에서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센 자신이었다면 저런 상황이 되기 전에 끝냈을 것이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상대의 움직임을 눈에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곁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일에 능숙한 형제님이시군요.”

참으로 잘 싸운다는 말이었다.

“뒤로 안 빠져도 되겠네요.”

왕눈이는 혀를 내둘렀다. 고작 한 명이 전장의 흐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가 약속된 것 같았다.

그리고 엔크리드는.

‘이게 기사.’

격동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쳐 전신이 떨릴 지경이었다. 피부 솜털이 곤두섰고 오한이 들었다.

동시에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눈은 스콰이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 대륙에서 스콰이어, 준기사는 기사단의 주 전력이다.

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기사의 바로 전 단계다.

살육 기계가 지금 전장의 판도를 휘저었다. 적군의 지휘관을 죽였다. 그리고 유유히 돌아왔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망토의 주인은 수인도 아니고 프록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힘을 보일 수 있는 걸까.

홀로 천을 벨 수 있는 무력의 상징, 그게 기사다.

어떤 게 그걸 가능케 하는가.

무엇이 저자를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게 했는가.

엔크리드는 몰랐다. 몰랐기에 상대의 움직임에 더 감탄했는지도 몰랐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뭔가 팡 하고 터지는 걸 느꼈다.

“때로는 보면서도 배울 수 있다.”

대도시의 검술 교관이 한 말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흥분이 가라앉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한 점의 집중이 절로 발동했다.

초인적인 집중력이 발휘되자, 상대가 내딛는 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휘두른 검의 의도가 보였다.

‘중검식.’

힘의 중검.

근력을 길러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건, 곧 빠르게 검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상대는 중검의 묘리를 쾌검에 섞었다. 엔크리드의 눈에도 그게 보였다.

‘발을 뺐어.’

뒤로 슬쩍 발을 빼 제 공격선의 범위를 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작이다.

‘아니야. 정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했다.’

라그나에게 배운 북방식 중검은 공격선을 중심으로 기초를 쌓았다.

스콰이어의 방식은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중앙 대륙식 기본기에 입각한 검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기점으로 원을 그렸고, 그 원 안의 상대를 도륙했다.

걸리면 베고, 다가오면 찌른다.

얼핏 보면 발을 써서 상대를 유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범위를 지키고.’

발은 필요할 때만 끊어서 쓴다. 몇 번의 검격이 인상적이어서 그렇지, 대부분 공격은 찌르기가 많았다.

보고 또 본다. 눈에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해 머릿속에서 정리한다.

‘중검식이라고 해서 꼭 힘으로 내리찍어야 할까?’

미치 휴리어가 보인 비장의 한 수는 정검과 유검이 아닌 중검식의 한 수와 같았다.

뭐가 막든 베어 버리는 차륜 베기.

그는 왜 그걸 비기로 삼았을까.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아니다. 검의 방식을 다섯 개로 나눴다고 해서 전부 다른 검술이라 할 수는 없었다.

다섯 개의 검술 방식에는 전부 교집합이 있다.

중검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내리치고 힘으로 끊어 내는 게 정답은 아니다.

눈알이 구른다. 뇌가 회전한다. 움찔거리며 엔크리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보니까 좋수? 음?”

렘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걸려다 멈췄다.

라그나는 스콰이어의 움직임에 더 흥미가 생기지 않았기에, 그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건들지 마.”

라그나가 속삭였다. 그는 한눈에 분대장의 상태를 알아봤다.

전장이든, 술집이든 또는 뒷골목이든, 연인의 품 안이든.

깨달음은 행운의 여신이 치는 장난처럼 찾아온다.

불현듯, 돌연히, 느닷없이, 갑자기,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와 뜬금없이 뇌를 흔드는 법이었다.

“옆을 지키지.”

작센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라그나가 우측에, 렘이 좌측에 섰다.

종교쟁이 분대원은 묵묵히 움직여 엔크리드의 뒤로 돌아갔다.

왕눈이는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속삭이며 물었다.

그 물음에 렘이 답했다.

“분대장이 제 껍데기를 깨려나 보지. 이럴 때가 되긴 했지. 그동안 혼자 밤낮으로 검을 휘두르더니만.”

렘은 분대장의 노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행운을 누릴 만했다.

물론, 이건 행운 따위가 아니었다.

수없이 실전을 거듭하고 구르고 검술의 기초를 다시 닦았기에 찾아온 당연한 과정이었다.

라그나는 스콰이어보다 지금 엔크리드의 모습을 보니, 의욕이 생겼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무엇이 분대장을 이렇게 만드는 걸까.

끝이 분명한, 한계가 명확함을 알면서도 어떻게 검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라그나게에는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 전장에 나서서 적지를 혼자 휘저은 상대보다 분대장이 그의 흥미를 더 자극했다.

기사단의 일원이 돌아온 직후, 아군 지휘관의 외침이 대기를 울렸다.

“돌겨어어억!”

곧 아군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기합과 외침이 뒤섞이고 보병대가 달리자, 땅이 두두두두 하고 울렸음에도.

엔크리드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아직 몰아의 상태였다.

사고뭉치 분대는 이전 전투의 활약으로 방관자의 입장이 될 수 있었기에.

멈춰 있는 그들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하고 싶어도 왕눈이를 제외한 넷이 뿜어내는 기세가 하도 살벌해 다가올 수조차 없었다.

저 앞에 스콰이어가 날뛰는 걸 봤음에도 가까이에서 사고뭉치 분대를 본 아군은 이들이 더 섬뜩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들을 놔두고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도 올해 겨울과 내년 봄은 많이 바쁠 것이다. 비축한 자원으로 겨울을 보내며 진지 구축도 다시 해야 할 테니.

나우릴리아와 아즈펜의 경계선이 새로 그어질 것이다.

아군이 돌진하는 사이, 엔크리드는 자신이 배운 기본기를 되새기는 중이었다.

교집합, 검술, 발렌 식 용병검, 북방식 중검.

모든 것이 자신이 배운 무기였다.

그 무기를 기본기란 틀에 가둘 필요는 없었다.

중검으로 받아넘기고 흘려도 된다.

바인드, 검을 붙이는 기술이 받아넘기기의 기초였다.

배울 때는 눈치도 못 챘다.

몰아의 상태, 때아니게 찾아온 깨달음이 엔크리드의 실력을 단숨에 올려 주진 않았다.

아니, 어느 정도 안목은 올려 줬으나, 그가 가진 재능은 보잘것없기에 그걸 단숨에 몸으로 체득할 수 없었다.

다만, 엔크리드는 자신이 가진 한계점을 명확히 알았다.

그건 곧 시간만 있다면 한계까지 단련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득히 높고 끝이 보이지 않던 절벽의 끝.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절벽의 가장 위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로막은 벽이 너무 높고 넓어 그 끝이 보이지 않으면 넘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끝이 보인다면, 아무리 멀고 높고 넓더라도.

걷지 못한다면 기어서라도 넘을 수 있었다.

엔크리드는 그걸 깨달았다.

“아아.”

그는 침을 흘릴 정도로 기뻤다. 실제로 그는 몰아의 상태에서 침을 흘리며 깨어났다.

“아니, 무슨 침까지 흘리슈?”

렘이 옆에서 핀잔을 줬다.

엔크리드는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주변에 아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 돌진했수. 피곤하면 막사에서 쉴 거이지, 서서 졸고 그러슈?”

“아.”

“아는 무슨, 돌아갑시다. 전투는 뭐, 손댈 것도 없겠구만.”

그 말 그대로였다.

망토의 기사는 본진으로 되돌아왔고.

전투는 끝났다. 적군은 퇴각을 넘어서 본국까지 도망갈 기세였다.

이제는 회군할 때였다. 도시로 돌아갈 때였다.

엔크리드는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몸을 돌렸다.

스콰이어의 무력을 본 그의 가슴에 다시금 불이 지펴졌다.

엔크리드의 목적지이자, 이상향이 눈앞에 있기에.

다시금 오래된 꿈이 고개를 든다.

‘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무력만 키워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최하급 병사로 머물 시간은 끝났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그리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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