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49화 (49/170)

49. 광기와 열기, 욕심과 욕망

“이겼다.”

“이 씹, 이겼다아!”

“개 같은 아즈펜 새끼들아아!”

승리는 환호를.

환호는 열기를.

열기는 광기를.

맞물리며 불러온 뜨거운 기운이 전장 전체를 후렸다.

전장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릴 때는 언제인가.

도망간 적의 뒤꽁무니를 쫓을 때다. 나우릴리아는 아즈펜의 꼬리를 세차게 깨물어 뜯었다.

“우어어어!”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보다 승리의 기쁨이 먼저 아군을 휩쓸었다.

광기가 엿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고작 며칠 전에 전멸할 뻔했다. 아직 안개가 가져다준 죽음의 공포가 가슴 속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후, 공포를 안고 선 전장에서 아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했음에.

“붉은 망토 기사단 만세!”

“나우릴리아 만세!”

스콰이어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이름 모를 스콰이어 대신 기사단의 이름이 드높아졌다.

“붉은 망토 기사단 만세!”

그 환호, 그 열기, 그 광기.

전장의 선두에서 이 모든 환호를 받는 자가 그 중심에 있었다.

파라락.

상징과도 같은 붉은 망토를 휘날린 스콰이어가 한 손을 들어 환호에 답했다.

“우어어!”

승리의 열기에 취한 병사 중에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다들 환호를 내지른다. 광기에 취한다. 그걸 본 엔크리드가 조용히 읊조렸다.

“나도.”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이지만, 그 안에는 그의 오랜 꿈이 들어 있었다.

광기와 열기가 전염되어 엔크리드의 심장도 뛰게 했다.

전투의 끝, 전장의 마지막 날 밤.

죽은 사람 숫자도 꽤 됐지만, 엔크리드는 고양감을 느꼈다.

손가락 세 개가 없는 대도시의 검술 교관이 한 말이 떠올랐다.

“재능도 없는데 칼밥 먹는 놈? 둘 중 하나지. 전장을 즐기는 놈이거나 살인을 즐기는 놈이지. 아, 셋 중 하나겠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놈도 있지.”

‘난 전장을 즐기는 쪽인 것 같은데.’

환호가 부럽다. 그 앞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걸 넘어, 전장을 헤집고 싶었다.

무예를 갈고닦은 이유가 오롯이 검에 취해서만은 아니었다.

엔크리드는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한 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한 게 전부였다.

결론적으로 깃발을 찢어 주술 매개를 깨는 것으로 공적을 쌓긴 했으나.

‘그 또한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으니.’

불쑥 치솟은 고양감은 엔크리드가 꿈으로 가리고, 재능이 없기에 잊었던 욕심과 욕망을 함께 불렀다.

‘기사.’

되겠다. 되고야 말겠다.

다시 한번 다짐하는 순간이다.

“더럽게 시끄럽네.”

아무 생각 없이 전장을 떠도는 렘이 귀를 후비며 말했다.

전장도 살인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고양감 따윈 없어 보였다.

그 옆에선 라그나가 하품을 했다.

“흐아, 이제 끝난 거 아닌가? 오늘 밤에 회군하면 안 되나.”

잘도 오늘 밤에 하겠다. 이 새끼도 생각 없는 쪽이겠지.

작센은 검날을 가죽으로 닦고 있었다. 벌써 검을 손질하고 있다.

말하거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작센도 뭘 즐기는 쪽일까?

모르겠다. 워낙 자신을 잘 숨기는 쪽 아닌가.

“와 씨, 전투가 그냥 뚝딱 끝나 버렸네. 이거 이야기나 노래로 만들면 팔리려나?”

“노래도 만들 줄 압니까? 형제님?”

“아니요. 다른 음유시인 시켜야죠.”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노래를 만들면 사기입니다.”

“사기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네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우딘.”

전장조차 팔아먹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왕눈이와 속을 알 수 없는 신실한 분대원의 대화였다.

엔크리드가 주술의 매개를 찢던 날, 신실한 분대원의 전신은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빨갛게 젖었다고 들었다.

무지막지하게 싸웠다는 소리다.

그도 조용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무지막지한 무력을 갖췄다.

전장에 서는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엔크리드는 자신의 자리에 제 분대원을 넣었다.

‘렘이었다면.’

깃발을 뚫고 찢는 거로 끝내지 않았을 거다.

라그나였어도 작센이었어도 신실한 분대원이었어도.

전부 자신보다는 더 잘 싸웠으리라.

‘다음에는 더.’

전장의 고양감이 심장을 옥죄니, 그 반작용으로 엔크리드의 가슴에는 욕망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밤, 지휘부에서 술과 음식을 풀었다.

염장한 토끼고기와 사슴고기 따위가 나왔고 커다란 참나무통에 담긴 독주가 나왔다.

“술이다, 술!”

렘과 라그나는 술이라면 환장했다.

“전 포도주만 마십니다.”

신실한 분대원은 독주를 거부했고, 작센은 애초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술보다는 여자가 낫습니다.”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놈이다. 이따위로 말하는데 여자가 꼬이는 이유는 뭘까.

‘역시 얼굴이 답인가.’

그러는 엔크리드도 아무 노력 없이 여자가 꼬이는 편이었다. 얼굴 덕택이었다.

거기에 단련된, 쫙쫙 갈라진 근육질 몸은 그야말로 여심을 후리는 흉기였다.

“싸구려 술이네요. 안 먹어요.”

왕눈이는 입이 고급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대대장이 막사에 들어왔다.

“444 분대장?”

엔크리드는 자신을 찾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열기도 한 김 식어 다들 자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엔크리드는 부상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대대장 얼굴을 못 알아보는 불상사는 없었다.

“부상자가 술을? 부상자 나부랭이가 술을? 다친 주제에 술?”

렘이 구박했고.

“삼가는 게 좋습니다. 몸부터 회복해야죠.”

작센도 말렸다.

라그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고.

왕눈이는 그런 엔크리드를 보고 낄낄 웃었다.

제대로 미친 분대원들이다.

대대장의 부름에 밖으로 나가니, 경례는 됐다며 술 냄새를 풍기는 대대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깃발이 주술의 매개였다고? 그리고 그걸 찢은 게 너고.”

이 전장의 절대적 공헌을 한, 주술 파훼자를 찾았다는 소리로 들렸다.

타닥타닥.

피워 둔 모닥불에 불똥이 남아 허공에 불티를 날렸다.

“네.”

엔크리드가 담담히 답했다.

“돌아가면 포상이 있을 거다. 잘했다.”

대대장이 엔크리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꽤 대단한 일이었다.

분대장이 된 이후로 대대장과 말을 나눠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만큼 엔크리드가 한 일이 대단했다.

전장의 판도를 바꿔 버렸으니.

다만, 그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지휘부만 알았다.

아마도 이 전투에서 주술을 이겨 낸 공은 지휘부가 채 갈 것이다.

그게 서운하진 않다.

대신 포상이 두둑할 것이니.

‘아쉽진 않아.’

본래라면 자신이 한 일이기에 그 공을 취해야 하나.

‘발악이었다.’

기사, 아니 고작 스콰이어를 보고 나니 생각이 많이 변했다.

이따위 작은 공적보다 얻은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이 좋구만.”

대대장이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간 후, 엔크리드가 다시 막사로 들어가려는데, 톡톡 하고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뭡니까?”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에메랄드를 닮은 눈이 보였다. 밤 중에 보니 유령처럼 섬뜩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인외의 미모.

요정 중대장이었다.

“깃발 찢은 포상을 어설프게 하진 않을 거다.”

할 말은 그게 전부였는지, 중대장은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그대로 돌아가나 싶더니, 뒤로 고개만 돌린 중대장이 입을 연다.

“경례는 안 하나?”

엔크리드가 뒤늦게 왼손으로 무기를 누르는 시늉을 하자, 요정 중대장이 됐다고 손을 휘저었다.

“됐다. 간다.”

저건 뭐 하는 요정인가.

중대장이 가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렘이 옆으로 누워 머리에 팔을 괴고 있었다.

“분대장 인기 생겼다고 나 버리면 안 되우.”

“취했냐?”

“안 취했는데.”

농담 짓거리였다. 밤이 깊었다. 엔크리드는 두 눈을 감았고 머릿속으로 스콰이어를 보고 느낀 걸 되새겼다.

몸이 나으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 * *

자고 일어난 나우릴리아 보병 대대는 보더 가드로 향했다.

나흘의 행군 끝에 그들은 요새 도시 보더 가드의 성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다른 지대보다 높은 분지에 길게 지어진 성벽과 세 개의 커다란 망루가 드높게 세워진 도시였다.

이곳이 바로 아즈펜 공국을 막아 내는 최후의 보루.

변방의 성곽, 보더 가드였다.

* * *

붉은 망토 기사단 스콰이어의 출현은 전장의 판도를 변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그린 펄 평야의 국지전이 소규모로 유지된 이유는, 여기에는 기사단 전력을 투입하지 않기로 한 불문율 때문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나우릴리아 왕국이 비장의 카드로 스콰이어를 출전시켰다.

나우릴리아가 불문율을 깼다.

전장에 나선 이가 아무리 스콰이어에서 준기사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선을 넘은 건 넘은 거였다.

“이런 개새끼들이?”

아즈펜 공왕은 버럭 화를 냈다. 눈이 뻘게지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

“우리도 내보내!”

보내란다고 바로 보낼 순 없었다.

겨울이었다.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며 두 국가 모두 국력 쇠퇴가 극심해질 것이다.

국지전 규모가 아니라 전면전이 예상된다면 국가 단위로 힘을 모을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즈펜의 주 전력이 지금 모종의 일로 자리를 비웠다.

제대로 싸우려면 아즈펜도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의 끝자락, 상대방이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려 화산이 폭발한다고 해도 겨울이 다가온다면 참아야 했다.

나우릴리아도 이런 걸 예상했기에 전쟁 막바지에 전력을 투입했을 터였다.

반대로 아즈펜도 겨울을 오는 타이밍을 읽고 주술사를 투입한 거였고.

다만, 이쪽이 준비한 칼은 막혔는데, 저쪽이 준비한 비수는 팔뚝에 깊숙이 박혔다. 아팠다. 잘못하면 팔 한쪽을 못 쓸 정도로.

“외교 압박이라도 넣어. 기사단원을 전장에 내보낸 건 문제 맞잖아.”

무투파로 유명한 공왕이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고 코에서 불을 뿜었다.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자글자글 끓는 물처럼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난 게 느껴졌다.

아즈펜 공국은 세 개의 가문이 주축이 된 나라였다.

공왕 아즈펜.

무력의 휴리어.

그리고 행정과 정무의 엑킨스.

외교는 엑킨스 가문 담당이었다.

엑킨스 대신은 난감했다.

나우릴리아에서 보낸 서신 때문이었다.

붉은 망토 기사 단원이 투입된 시기와 비슷하게 서신이 날아왔다는 건, 나우릴리아가 변명거리도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방증이다.

서신에는 아즈펜 소속의 프록 장군이 적진에 모습을 드러내,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단원을 보냈다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유가 그럴듯했다. 너무도 적절했다.

하필 왜, 프록 장군 새끼가 거기에 가서는.

프록이야, 본래 제멋대로 사는 종이다. 그들에게 군인의 옷을 입혔을 때부터 이런 문제는 야기될 수 있었다.

‘장군이 아니었어도 다른 변명을 댔겠지.’

엑킨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우릴리아가 충동적으로 기사 단원을 보내진 않았을 거다.

프록 장군이 핑곗거리가 됐지만, 그가 아니었어도 나우릴리아는 적절한 변명으로 둘러댔을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즈펜은 당하고 끝났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주술이 망가진 것 때문이었다.

몰살의 안개가 성공했다면, 진짜 기사가 오지 않는 이상 긴 시간 지지부진 끌어온, 그린 펄 평원의 국지전은 아즈펜의 대승이었을 테니.

엑킨스는 적병 하나가 주술을 망쳤다는 보고가 떠올랐다.

‘이 새끼들이 경계에 실패해 놓고 적병 하나가 망쳤다는 핑계를 대?’

그게 말이 되나.

이 일에 관련된 놈들은 전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주술사는 퇴각 후 내빼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지나가던 산적이 그랬는지, 호위를 포함해서 주술사까지 전부 반으로 쪼개 놨다.

‘되는 일이 없어. 되는 일이.’

“야, 이거 그냥 넘어갈 거냐고!”

왕이 체통을 잊고 외쳤다.

올해 가을, 엑킨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시작된 비장의 한 수가 역풍을 맞았다.

지지부진한 국지전의 전장이 아즈펜의 패배로 점철되고 끝났다.

* * *

열흘, 엔크리드는 자기 몸이 전부 회복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엔크리드는 곧바로 렘을 찾았다.

“렘.”

“무슨 일이슈?”

경계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렘이 엔크리드 앞에 섰다.

“한판 하자.”

“뭘?”

“대련.”

“……이제 막 몸이 나은 거 아니유?”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금 몸이 근질거려 죽겠는데?

엔크리드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눈썹과 입꼬리만으로 제 심중에 품은 뜻을 표현하는 것이니.

“합시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또 쥐어 터져 봐야지.”

“덤벼라. 건방진 이민족.”

“어이쿠, 이번에는 다리가 부러지고 싶은 거요?”

엔크리드의 도발을 렘이 웃으며 받았다. 둘은 곧 숙소 밖으로 나갔다.

그걸 지켜보던 라그나는 렘이 한 말 중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동의했다.

자신이 본 미친놈 중에 분대장이 최고였다.

재능은 보잘것없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일어나자마자 싸우자고 덤비는지.

그로부터 삼십 분도 되지 않아 엔크리드가 숙소 문을 다시 열었다.

“라그나, 나와. 너의 게으름을 씻어 주마.”

신난 분대장이었다. 머리통 한쪽에서 피를 흘렸는지 피딱지가 관자놀이 부근에 남았는데도, 표정은 밝았다.

“네네, 합시다.”

라그나도 괜히 말씨름으로 심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몇 번 겨뤄 주면 될 일이었다.

이게 이들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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