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2)
“운이 좋네.”
대련을 지켜보던 병사 하나가 말했다. 같은 용병 출신의 병사였다.
일전 논공행상 중 엔크리드에게 투덜대던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가 인상을 쓴 채로 앞으로 나섰다.
“안 지쳤지? 한판 더 하는 건 어때?”
승급을 위해서는 세 명의 중급 병사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또는 세 번 다 제압하거나.
한 명만 상대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에, 분대장님?”
왕눈이가 눈치를 봤다. 상대가 으르렁거리는 걸 보니 분위기가 살벌했다.
엔크리드는 의문이 섞인 눈으로 쓰러진 병사를 바라봤다.
이게 맞나?
고작 발 한 번 걸었는데, 그대로 승패가 갈렸다.
쓰러졌던 병사가 손목을 그러쥔 채 일어났다.
“운 좋은 새끼.”
손목을 쥔 병사가 말하며 물러나는데, 어찌나 아팠는지 눈꼬리에 눈물이 보였다.
아플 만하긴 하지.
그래도 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엔크리드는 시선을 돌렸다. 두 번째 상대를 향해서다. 그를 보며 엔크리드가 자세를 잡았다.
“안 지쳤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내가 상대하지.”
엔크리드는 조금 전 싸움을 짧게 복기했다.
‘운이 따랐다.’
병사는 쓰러지면서 너무 무방비했다. 몸을 보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당하리라는 걸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왜?’
방심의 이유는 상대를 얕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툭 찼다고 승패가 갈리나?
그게 말이 되나.
모르겠다. 그럼 다시 해 보면 될 일.
상대가 창을 끄집어냈다.
보더 가드에 주둔하는 보병 대대에는 크게 두 개의 병종이 존재했다.
하나는 경갑보병, 다른 하나는 중갑보병.
그중에서 장창을 무기로 쓰는 건 중갑보병의 특징 중 하나였다.
보더 가드가 작정하고 크로나를 투자해 키운 보병이다.
경갑병과는 위치가 달랐다. 그만큼 같은 중급 병사라고 해도 더 제대로 훈련받고 기술을 배운 병사라 할 수 있었다.
상대가 개인 전투용 단창을 겨누더니 창끝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엔크리드는 거기에 시선을 뺏기지 않았다.
“싸울 때는 상대의 몸 전체를 눈에 담는 겁니다.”
라그나의 말이다. 엔크리드는 그 말에 충실했다.
훙.
창끝이 옆구리 어림을 노리고 꽂혔다. 매가 먹이를 노리는 것처럼 날랜 찌르기였다.
‘느려.’
하지만 첫 번째 반복된 오늘에 만났던 찌르기 변태에 비하면 느렸다.
궤적이 선명히 보였고 피할 만했다.
엔크리드는 왼발을 중심으로 몸의 중심선을 틀어 자세를 바꾸며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창을 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옆구리 쪽에 끼운 거다.
턱 하고 창이 제압당하자, 상대가 창을 당겼다.
엔크리드가 당기는 힘에 맞춰 앞으로 뛰어들었다.
“엇!”
버틸 줄 알았던 엔크리드가 힘을 빼고 창과 같이 달려들자, 병사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화들짝 놀란 병사가 창을 쥐고 있던 양손 중 왼팔을 들어 가드를 세웠다.
엔크리드는 상대의 눈을 향해 검을 들어 찌르는 시늉을 한 뒤, 발을 내밀어 상대의 정강이를 걸었다.
오른발에 정강이를 건 채로 왼발을 앞으로 뻗고 골반을 틀며 어깨로 상대 가슴팍을 밀어친다.
뻑.
꺽 소리와 함께 묵직한 소리가 나면서 상대가 옆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검을 겨눌 필요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위에서 밑을 내려다봤다.
중갑보병, 1중대 1소대 소속 병사는 쓰러진 채로 엔크리드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 처음 눈앞에 마주했을 때보다 사고뭉치 분대장의 몸이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제압당하며 생긴 심리적 압박감 때문이었다.
‘씹.’
제대로 맞은 덕에 숨이 턱 막혔는데도 그는 사고뭉치 분대장을 욕하던 새끼를 욕했다.
물론 그중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뭐가 최하급이야.’
엔크리드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더?”
“아니요, 아니, 그만합시다.”
두 번째 중급 병사가 물러나고 세 번째 중급 병사가 나설 차례였다.
“바보들.”
엔크리드의 승급전을 쭉 지켜보던 병사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앤드류였다.
엔크리드와 함께 정찰 임무를 수행했던 그 앤드류다.
앤드류는 엔크리드가 그때도 이미 중급 수준은 훌쩍 넘었다고 판단했는데, 지금은 더 잘 싸웠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술이 완숙해졌다.
앤드류는 엔크리드에게 크로나를 전부 건 자신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지금 자신과 붙으면 누가 이길지 가늠했다. 그동안 자신도 수련에 매진했는데.
바로 옆에 있던 맥이 그런 앤드류를 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 자식은?”
“왜?”
“실력이 너무 늘었습니다.”
“얼마나?”
말하는 앤드류의 표정을 본 맥이 고개를 저었다.
“전과는 다릅니다.”
이전, 정찰 임무가 끝난 뒤 맥은 앤드류에게 사고뭉치 분대장과 제대로 겨뤄 보고 싶다면 마음을 다잡고 경험을 쌓으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을 번복해야 했다.
“지금 싸우면 어려워요. 저도 어렵습니다.”
맥은 앤드류의 검술을 봐줄 정도로 뛰어난 검사다. 그런 그가 어렵다고 한다.
앤드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되어야 했다.
자신을 한 방에 때려눕힌 사람 아닌가.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절로 마음이 가며 따르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한쪽에서 벤젠스도 대련을 지켜봤다.
막 근무가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연병장 구석, 부드러운 흙으로 만든 대련장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데?”
부하 하나가 상황을 말해 줬다. 벤젠스는 창을 옆구리에 끼고 투구를 벗어 창끝에 걸어 둔 채로 대련을 지켜봤다.
엔크리드는 두 번 싸웠고 상대를 두 번 눕혔다.
말로 하면 쉬웠지만, 본 사람 중 어느 정도 안목이 있는 이들이라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게 운이라면.’
행운의 여신이 남자로 환생한 수준일 것이다.
세 번째 상대가 쉬이 나서지 않았다.
크라이스는 그제야 제 분대장이 생각보다 잘 싸운다는 걸 알았다. 그도 눈치는 귀신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 상대는 직접 지목했다.
“거기, 2소대죠? 한판 하시죠?”
믿을 게 없다면 모를까. 믿는 바가 있다면 크라이스는 과감한 거간꾼이 될 수도 있었다.
필요하다면 도발해서라도 상대를 끌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
구경꾼 숫자가 훌쩍 늘었다. 여기서 나서서 두들겨 맞는 게 가히 좋은 광경은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 말하겠습니까? 왜, 뒤에서 남창이니 뭐니 말할 때는 당당한 것 같더니만.”
크라이스가 말하면서 입꼬리를 올려 상대를 비웃었다.
이 정도면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다.
“퉤, 좋아, 내가 하지.”
입이 거친 병사가 바닥에 침을 탁 뱉고 나섰다.
고운 흙 위에 선 채로 엔크리드를 바라본다. 엔크리드는 막 두 번째 싸움의 복기를 끝낸 뒤였다.
‘내가 너무 어려운 싸움만 했구나.’
상대가 너무 쉬웠다. 렘을 비롯한 분대원은 병사 등급제가 개판이라는 말을 해 왔다.
“중급이라고 전부 같은 중급이 될 수 있나? 그나마 상급 수준부터는 쓸 만하다고 해도, 그것도 편차가 너무 심하다 이거요. 그리고 목숨을 건 싸움의 승패가 꼭 실력만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실력이 떨어져도 머리를 잘 써서 상대를 죽이는 놈은 대륙에 널렸수다.”
렘의 말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인정받으려면 병사 등급제에서 위로 올라서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등급제 제도 위에 서거나.’
등급제 제도 위에 선 이들.
붉은 망토의 주인들이다.
보더 가드에 주둔하는 부대는 2개 대대다.
번갈아 가며 그린 펄에 파견 근무를 나가 주둔하기에, 보통 도시에는 대대 하나와 예비 부대가 자리 잡는다.
지금 도시에 주둔하는 게 바로 엔크리드가 소속된 1군이다.
2군 중 반은 그린 펄 평야의 야전에 나가 있다. 적과 싸우지 않더라도 진지를 지키는 건 당연했다.
매년 번갈아 가며 겨울을 지키는 것, 그게 보더 가드 상비군의 역할이었다.
고작 만 명도 없는 도시에 두 개 보병 대대와 왕국 직속의 직할대가 있다.
붉은 망토 기사단의 일원이 직접 전장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가끔 기사단원도 파견을 나온다.
이 모든 게 가능한 건 보더 가드가 왕국 직할령이기 때문이었다.
과거 아즈펜과의 사이가 좋을 때, 보더 가드는 향신료를 포함한 다양한 물자가 머무는 교역 도시였다고 했다.
이후 아즈펜이 침략 전쟁을 시작한 뒤, 이곳은 군사 도시이자 요새 도시로 탈바꿈됐다.
낮았던 성벽을 위로 쌓아 올리고 망루가 세워졌다.
세 개의 망루는 나우릴리아가 아즈펜을 노려보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그런 도시이기에 부대 내 주둔군도 대부분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변방의 도시이나 실전을 거듭한 병력이 집결된 곳.
그게 바로 보더 가드가 가진 힘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병사도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봐야 했다.
이런 이유로, 누구도 만만한 상대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이번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그랬다. 여기에는 엔크리드의 상대로 차고 넘치는 이들만 즐비한 곳이었었다.
“너 딴생각했지?”
상대가 물었다.
“아니.”
엔크리드는 뜨끔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를 얕보지 말 것.
무수히 많은 검술 교관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된 도시의 과거까지 곱씹었다.
얕보지 말라니, 한때는 참 와닿지 않는 말이었는데.
‘내가 누구를 얕볼 수 있나.’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그저 흡족했다.
성장의 기쁨과는 별개의 희열이다.
실력을 증명하고 내보이는 것.
그게 엔크리드에게 즐거움을 줬다.
“뭐가 그렇게 좋냐?”
상대가 또 물었다. 엔크리드는 자기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는 걸 깨달았다.
“싸우는 게 재밌어.”
“미친놈.”
호흡을 고른 상대가 덤빈다.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엔크리드는 상대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움직였다.
땅을 디딘 발부터 힘을 끌어모아 무릎을 지나 허리에 얹는다. 그 기세 그대로 힘을 줘 검으로 상대의 검을 후려쳤다.
까-앙!
경쾌한 쇳소리가 울렸다.
상대의 가슴이 열린다. 후려친 검을 회수해 찌르는 시늉을 하자, 상대도 팔을 당겨 수비 자세를 취하려 했다.
엔크리드는 찌르는 시늉만 하고 검 끝을 위로 들며 거리를 좁혔다.
그러곤 당황한 상대의 눈을 보며 칼날끼리 붙인 뒤, 왼발을 내밀어 상대 발뒤축에 걸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줘 앞으로 밀었다.
상대는 검을 가까스로 가슴 앞으로 당긴 채였다.
칼날끼리 붙은 검은 공격에 쓸 수 없다. 상대 병사는 속절없이 당했다.
콰당.
아킬레스건이 걸려 넘어진다. 병사는 버틸 재간이 없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엔크리드가 넘어진 상대의 정수리 위로 검날을 붙였다.
모든 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세 번의 싸움으로 엔크리드는 제대로 실력을 보였다.
쓰러진 병사가 위로 눈을 치켜떠, 머리 위에 얹어진 검을 확인했다.
“……내가 졌다.”
병사가 말했다.
나우릴리아는 예부터 강자를 숭상했다. 괜히 기사의 나라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앤드류도 맥도.
뒤에서 그걸 지켜보던 벤젠스도.
어느새 와서 구경하던 요정 중대장도.
렘, 라그나를 포함한 사고뭉치 분대원도.
한때 엔크리드를 뒤에서 욕했던 병사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기울어지는 햇살이 칼날에 비춰 빛난다. 빛이 엔크리드의 얼굴 반쪽을 스쳤다.
스며드는 햇살, 늘어지는 그림자, 차디찬 기온 덕에 어깨 위로 솟아오르는 흰 열기.
그 모든 게 묘한 환상을 보게 했다.
전장 한가운데, 주술의 매개인 깃발을 찢고 살아나온 엔크리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들 인정하지 않고 밀어냈던 사실이 현실이 되어 머릿속에 박혔다.
몰살의 안개, 그 주술을 부순 자가 그들을 구한 사람이었다.
“설마 했는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건 곧 인정이었다.
그의 실력을 몰랐을 때는 비난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못난이처럼 구는 것도 한때다.
두 번째로 패했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입을 함부로 놀렸다. 사과하지.”
엔크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보더 가드의 상비군은 이런 인간들 천지다.
실력 없이 자신 앞에 서는 걸 용납 못 하는 거친 부대.
그게 변방의 검, 보더 가드의 군대다.
반대로 실력으로 증명하면 곧바로 존중하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중급 병사를 압도함으로 자신을 증명했으니.
“주술파괴자.”
누군가 중얼거렸다. 환호는 없었다.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별명으로 굳어지긴 할 듯했다.
주술파괴자라니, 과한데.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이제 뭘 해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상급 병사랑 붙을 차례 같은데.”
중급 병사 셋을 발 거는 거 하나로 끝냈다.
그럼, 이제 뭐가 남았나.
뭐가 남긴 뭐가 남나.
상급 병사가 남았지.
이런 와중에 또 싸울 생각을 해?
크라이스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정말 못 말릴 분대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대로 다시 싸움을 붙여야 하나?
그리 생각하는 와중이다.
“휘이익.”
누군가 휘파람을 불고, 한 걸음 나선다. 나선 병사가 수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밌네.”
독수리 문양의 견장을 단 병사였다. 견장이 상징하는 건 그가 왕국 직할대인 변방수비대의 일원이라는 표시였다.
아즈펜의 독립 중대 그레이 독만큼이나 유명한 부대였다.
프론티어 슬래터, 변방의 학살자란 별명이 붙은 이들이자, 거칠고 거친 보더 가드 내에서도 가장 살벌한 부대.
총원은 이백, 다만 국왕 직할대로서 전원 상급 병사 이상으로 구성된 부대다.
나선 건 그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