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거북이와 변방의 학살자 (2)
“중대 안 옮길래?”
막사에서 나와 다섯 걸음도 걷기 전이었다.
부대 내에서 부대원을 직접 빼 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 상급 병사가 됐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부대 내에 상급이나 최상급 병사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또는 다른 이유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주술파괴자.
현재 부대 내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름이니까.
주목받고 관심을 받는다. 처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열다섯 먹은 애처럼 흥분하고 날뛸 일도 아니었다.
즐겁지만, 또한 즐겁기에 그냥 넘어가야 할 일도 있는 법이었다.
엔크리드는 경륜이 있었다. 서른이 될 동안 칼밥 먹으며 뒈지지 않고 살아온 경력이 어디 가진 않았으니까.
“1중대로 말입니까?”
“그럼 내가 머저리 같은 팔토 중대나 레이온 중대에 넣으려고 왔겠어?”
팔토와 레이온은 2중대와 3중대장의 이름이다.
“내 부대로 와라.”
엔크리드의 승급 대련은 모두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됐다.
그중 중갑보병대를 책임지는 1중대장, 그레이엄은 특히나 엔크리드가 마음에 들었다.
본래 군 내에서도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한 위인이었다.
차기 대대장으로 거론되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 그의 제안이다. 가볍지만은 않았다.
중갑보병대로 유명한 1중대는 사이프러스 사단의 핵심 병과이자, 군 내의 엘리트 코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엔크리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고민할 것도 없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거절? 왜? 중대장과 사이가 벌어지는 게 걱정된다면 내가 막아 주겠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답하는 엔크리드의 태도가 지나치게 담백했다. 고민의 기색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그레이엄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미련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습니까?”
그레이엄은 물끄러미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엔크리드는 뭐라 더 말해야 하나 싶어 눈을 마주쳤다.
“그래 보여.”
강압이나 강요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그레이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엔크리드가 왼손으로 왼쪽 허리춤을 누르고 고개를 숙이는 군례를 보였다.
군례를 받으려면 고개라도 끄덕여 줘야 하는데 그레이엄은 거울처럼 엔크리드의 동작을 따라 했다.
왼손으로 허리춤을 누르고 군례를 보인 거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덕분에.”
덕분에?
엔크리드가 멀뚱히 바라보자 그레이엄이 마저 말했다.
“살았다고. 고맙다는 말은 해야지.”
주술파괴자.
그 안개는 참으로 끔찍했다. 특히나 능력 있는 지휘관일수록 그 위력이 여실히 피부에 와닿았다.
요정 중대장이 전투 중에 대대장 욕을 무진장 했었는데.
그레이엄도 그녀 못지않게 대대장을 욕했다.
“머저리 새끼, 똥멍청이 새끼!”
전장 한복판에서 이렇게 외칠 정도였으니.
아무 일도 없었을 때야, 본인 밥그릇만 챙겨도 된다. 하지만 위기 상황이 됐을 때는 지휘관의 실력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대대장은 병신이었다.
적어도 그레이엄은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나 이번 전투의 공로를 은근히 자신의 것으로 돌린 게 제일 병신 같은 짓이었고.
결국, 부대 내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이전 전투 최고 수훈자는 대대장이 아니라는 걸.
멀뚱히 군례를 보인 두 사내가 자세를 풀었다.
그레이엄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엔크리드가 그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고마움, 미련, 아쉬움 등 몇 가지 감정이 섞인 인사였다.
“가라, 나 되게 서운하다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저 대신 렘이라도 보낼까요?”
엔크리드가 농담을 던졌다.
“그 새끼는 안 되지!”
그레이엄이 화가 난 척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둘은 곧 미소를 보이며 헤어졌다.
‘괜찮은 사람 같네.’
중갑보병 중대장과 이렇게까지 얘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엔크리드는 상대에게서 호감을 느꼈다.
막사가 바로 뒤지만, 조금 더 걷고 싶어졌다.
걸으며 오랜만에 도시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그리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시 중앙에 있는 시장 끄트머리까지 왔다.
군사 도시라고 해도 상인과 농민이 오가는 건 당연했다.
기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는 뜨내기 상인이 훨씬 많긴 했다.
보더 가드는 경계의 군사 도시라 불리는 곳이다. 주둔군 숫자만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인구 대비 군인의 숫자가 일 할이라고 하면 시민의 숫자가 만 명이 넘어야 했다.
하지만 만 명은 당연히 무리였고, 오천 명도 채 되지 않긴 했다.
그래도 도시는 잘만 돌아갔다.
이곳은 국왕 직할령이니까.
왕국의 지원이 있기에 군사 도시 보더 가드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왕국에만 의존할 수 없기에 농사도 짓고, 상인도 오가는 거고.
그중 상단 유치 사업이 꽤 잘 됐다고 듣긴 했다.
하물며 최근에는 국왕의 명령으로 상단 몇 개가 도시에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시장이 전에 없이 붐볐다.
덕분에 여관 주인의 입꼬리가 천장에 걸렸다고 왕눈이가 한창 떠들었었다.
‘좋아할 만하네.’
그만큼 사람이 붐비긴 했다. 도시에 상단이 늘면 여관 주인의 기쁨도 늘기 마련이니까.
하물며 보더 가드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숙박업이다.
‘주요 상단의 거래 장소.’
도시 내 직업 군인의 수가 월등히 많아서 생기는 장점 중 하나, 치안이 탄탄하다는 거다.
순찰과 경계 근무를 설 병력이 차고도 넘쳤으니까.
그러다 보니 각 상단의 주요 거래 장소가 되곤 했다.
거주민은 많지 않으나, 오가는 사람이 많은 도시.
군사 도시지만, 교역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곳.
그게 보더 가드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엔크리드는 시장 끄트머리 쪽, 건물이 난잡하게 들어서 복잡한 구조로 변한 골목 초입을 힐끔 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째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몸을 돌려 막사 앞까지 돌아갔고.
그가 떠난 뒤, 골목길 안쪽에서 지저분한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거지가 기어 나왔다.
거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동냥질을 시작했다. 덮어쓴 모포 안에 든 눈빛이 매서웠다.
누군가 본다면 동냥질이나 하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 * *
숙소에 들어가기도 전에, 렘의 목소리가 엔크리드의 귀를 때렸다.
“우리 분대장이 우리를 버릴 준비 중이다. 다들 대비하라고.”
저 미친 자식.
“진짜예요?”
들어서자마자 숙소에 있던 왕눈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아니.”
대뜸 거절하고 설명하려는데, 다들 눈빛이 흉흉했다.
라그나가 눈을 반만 뜬 채로 말했다.
“갈 거면 나도 같이 갑시다.”
숫제 태연한 말투였다. 상관 명령이나 잘 따르면서 저리 말하면 모르겠으나, 라그나는 천성이 게을렀다.
누군가의 명령을 쉬이 듣는 법도 없는 인간이다.
그런 라그나를 반기는 부대가 있을까?
“음. 부대 이동이야 흔한 일이니까요.”
작센이 동조하며 제 짐을 훑어봤다. 수틀리면 짐 싸 들고 쫓아올 기세로 보였다.
작센은 그나마 낫긴 하지만.
‘얘도 뭐.’
괜히 사고뭉치 부대에 있는 게 아니다.
근무 시간은 잘 지키나, 이쪽도 훈련은 빼먹기 일쑤다. 갑자기 픽픽 사라지는 경우가 흔해서 어디 갔냐고 찾을 때도 많고. 서글서글하게 사람을 대한다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사람을 가리잖아.’
겉으로 한껏 티를 내며 사람을 가린다. 어떻게 봐도 부대의 일원으로 잘 녹아드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당연히도 지휘관 중 작센을 반기는 사람이 흔할 리 없었다.
“이거 미친 새끼들이네, 어딜 따라가? 분대장은 받아 줘도 너희를 받아 주겠냐? 너희는 분대장 앞길의 독이다. 그러니까 오지 마라. 나만 따라가면 될 거요. 믿으쇼. 내 저놈들을 다 쳐 내고 갈 테니.”
렘이 엔크리드 앞을 막고 가슴을 펴며 큰소리를 쳤다.
‘아니, 네가 제일 문제인데.’
엔크리드는 렘의 넓은 등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중갑보병 중대장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렘은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1대대 상관을 두들겨 팬 주제에.
상관 폭행으로 부대 내에서 렘을 싫어하는 걸 넘어 증오하는 이들도 많다.
라그나랑 작센도 받아 줄 것 같진 않지만, 하여간 굳이 따지자면 렘이 제일 큰 독이었다.
“넌 확실히 머리에 병이 있는 것 같다. 살면서 저런 놈 여럿 봤는데 전부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
라그나가 옆으로 누운 채로 말했다. 머리를 북북 긁어 대는 걸 보니, 며칠 머리를 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작센이 그 말을 받았다. 저 둘이 이럴 때는 또 왜 이리 환상적인 화합을 이루는지, 참 모를 일이다.
근데 렘의 나이가 서른이었나? 엔크리드가 슬쩍 옆으로 발을 빼 렘을 보니, 서부에서 온 이민족 사내의 입꼬리가 삐뚤거리며 올라가는 게 보였다.
잔뜩 성이 난 얼굴이었다.
“분대장, 저 둘 죽이고 우리끼리 가도 되는 거 맞수?”
어딜 가, 애초에 누굴 죽여.
“아니.”
큰 싸움이 되기 전에 말리는 게 상책이었다.
“나 어디 안 간다.”
대강 말하고 사태를 수습하려 하자 왕눈이가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쉽게 가라앉진 않았다.
말로 해 보고 안 되면 몸으로 분대원 사이를 가로막으려는데 똑똑 하고 누가 문을 두드렸다.
종교쟁이 분대원만 자리에 없었지만, 그가 제 숙소에 오며 문을 두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손님이었다.
엔크리드가 눈짓하자, 왕눈이가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크라이스의 목소리에 엔크리드도 뒤로 몸을 돌렸다.
부실한 나무 문 너머, 변방수비대의 대원이 보였다.
독수리 견장을 단 토레스였다.
“또 보네.”
그가 손을 들어 인사했고, 엔크리드는 왼손으로 허리춤을 누르는 군례를 보였다.
“잠깐 얘기 좀 하지?”
“저랑?”
“그럼 누구겠어?”
엔크리드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렘을 포함한 모두에게 진정하고 있으라고 말하려고 몸을 돌린 엔크리드는 흠칫 놀랐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렘, 라그나, 작센이 제 뒤에 서 있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민첩하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그때 그 손버릇 나쁜 양반이네.”
렘이 말하고.
라그나와 작센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토레스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싸우자고 온 거 아니다.”
셋과 하나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숙소 내에 공기가 진득해지는 것 같았다.
침묵은 토레스가 깼다.
“사고뭉치 분대라더니, 정말 앞뒤 안 가리고 덤비네.”
토레스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누가 조금이라도 시비를 걸면 곧바로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 타이밍에 엔크리드가 그들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등으로 제 분대원 셋의 시선을 가리며 엔크리드가 말했다.
“나가시죠.”
괜히 사고가 나면 수습만 힘들 뿐이다.
숙소를 나가는데 뒤에서 렘이 흥 하고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와서 걷자, 토레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태가 왜들 저래? 다들 욕구불만이야? 끓어오르면 홍등가를 가라고 해. 피 볼 생각하지 말고.”
토레스는 엔크리드가 보지 못한 걸 봤다. 문이 열리는 순간, 렘이란 상관폭행범이 먼저 움직였다. 툭 하고 내딛는 걸음 하나에 살기를 싣고 엔크리드의 뒤에 섰다.
그 뒤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놈이다. 몸을 일으키나 싶더니, 소리 없이 앞으로 성큼 나서며 그도 엔크리드 뒤에 섰고.
그 순간 무슨 짓을 해도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엔크리드 앞에 놓이는 환상이 보였다.
마지막은 토레스도 모습을 놓쳤다. 적갈색 머리칼의 남자였는데, 어느새 그도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기가 전신을 찌르고 헤집고 난도질했다. 토레스가 예민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그 순간 손끝 하나 잘못 움직이면 죽는 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고작 일반병 셋한테?’
사고뭉치 분대원의 실력이 유명하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만약 엔크리드가 나서지 않았다면 상황이 우스워질 뻔했을까?
이전 엔크리드를 상대했을 때 토레스는 제 실력의 반만 보였다. 그거로 충분했다.
그럼 그 셋 중 하나를 상대로도 그럴 수 있었을까?
군 내에서 기사단을 제하면 최고의 훈련과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게 직할대다.
특히나 변방수비대는 이제껏 그 위용을 충분히 증명한 부대였고.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그래도 일은 일이고 할 말은 해야 했기에.
토레스는 숨을 몇 번 고른 거로 마음을 다잡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는 임무를 받았고, 그대로 수행했다.
“변방수비대로 와라.”
직할군, 변방수비대는 거북이 중갑보병대 이상의 제안이었다.
무려 왕국 직할군이었으니.
사이프러스 사단이 아닌 왕군의 지시를 직접 받는 부대.
매력적인 제안임이 틀림없었다.
“어떤가?”
토레스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변방수비대의 일원이라는 것에 자부심도 엿보였다.
엔크리드는 가만히 토레스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변방수비대는 뭘 지향합니까?”
수비대원이 되면 뭘 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병사로서 어딜 향해 가는가.
엔크리드는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