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집요함의 끝은 어디인가.
정말 별일 아니었다.
도시 순찰 근무야 툭 하면 하는 일이었으니까.
잦으면 한 달에 서너 번도 나가야 하는 순환 근무였다.
하물며 여기가 어디인가.
보더 가드.
국왕 직할령으로 어지간한 말썽은 용납하지 않는 치안의 도시다.
괜히 대형 상단끼리 거래의 장소로 손꼽는 곳이 아니었다.
나우릴리아에서도 극동, 아즈펜과 국경을 맞대는 변방의 도시이자, 전장과 가장 가까운 도시지만, 치안만큼은 으뜸이었다.
주둔군 숫자가 많으니 주야장천 근무를 돌린 덕이었다.
보더 가드는 우물을 중심으로 네 개의 여관이 있고 여관 넷이 모인 교차로이자 광장이 보더 가드의 시장판이었다.
분지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에 외곽으로 나가면 밑으로 완만한 경사가 보였고 북쪽 너머의 경사 밑으로는 강물이 흘렀다.
펜-하닐 강.
주변 대부분 도시를 책임지는 수원이다.
강 주변에는 농지가 있고 농가도 드문드문 보였다.
올여름에 강물이 범람해 둑 한쪽이 무너졌고, 둑을 다시 세우기 위해 일꾼 무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기도 했다.
대부분 사고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 드물게 농지 순찰이나 마물 처리도 하지만 오늘은 시장 순찰 근무였다.
“전 잭이고, 이쪽은 보입니다.”
3인 1조로 움직이는 근무였기에 두 명의 병사가 합류했다.
엔크리드와 잭과 보.
이렇게 셋이 시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 안개가 주술이었다고요? 칵 퉤, 아즈펜 개자식들 때문에 뒈질 뻔했는데 덕분에 살았네. 고맙수다!”
잭이 바닥에 가래를 뱉으며 말했다. 보병용 단창을 들고 건들거리며 말하는 꼴이 정말 고마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엔크리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아 둔 크로나 쓰지도 못하고 갈 뻔했습니다.”
보도 감사를 표했다. 발걸음이 특히나 가벼운 병사였다.
본래 재주가 많다는 얘기를 왕눈이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조합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엔크리드는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셋은 시장을 향해 걸었고 분위기는 좋았다. 엔크리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잭과 보는 같은 분대였다.
둘이 떠들면서 엔크리드를 치켜세워 주곤 했다.
“상급 병사라니, 실력이 엄청나시네. 아니, 시벌, 언제 한번 겨뤄 봅시다. 상급 병사 솜씨 구경 좀 하게.”
잭이 창날의 반대편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좋지.”
엔크리드는 대련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련은 누구랑 하든 결과적으로 배우는 게 있다고 생각했다.
“약속한 겁니다. 시벌.”
잭은 말끝에 욕을 달고 살았다.
“정찰 임무도 성공하셨다고, 앤드류 분대장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데.”
보도 엔크리드를 추켜세웠다.
“운이 좋았지.”
“겸손하기까지.”
보는 숫제 엄지를 들어 보였다.
칭찬에 기분 나쁜 사람은 없다.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실실 웃으며 끊임없이 떠들면서 걸었다.
시장 끄트머리에 다다라 단층 짜리 건물 몇 개를 지나쳐 시장에 들어선 참이었다.
한쪽에서는 들꽃 따위를 꺾어서 팔고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무두질한 가죽 따위를 팔았다.
엔크리드가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 시장을 중심으로 두고 저 멀리서 깡깡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장간에서 나는 소리였다.
시장 외곽 쪽에 있는데도 쇳덩이 만나는 소리가 은은하게 귀를 자극했다.
“아니, 그것만 받고 팔면 남는 게 없다니까.”
상인의 말소리와.
“오늘 구운 빵이에요!”
길가에 서서 제 가게로 오라고 호객하는 소년.
구르르르르.
시장 중앙을 오가는 수레까지.
난잡했다. 시장은 본래 이런 법이었기에 익숙한 광경이었다.
“마른 사과가 맛납니다.”
엔크리드가 걷다가 이런저런 마른 과일을 모아서 파는 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됐습니다.”
상인은 금세 고개를 돌렸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근무가 끝나고 나면 오늘은 작센을 꼬드겨서 대련이나 해 볼까.
아니면 돌아가자마자 잭이란 친구랑 어울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날이 부쩍 추워져 몸이 자꾸 굳었다. 멈춰 있는 것보다 걷는 게 나았다.
“좀 더 걸을까?”
“네네.”
잭과 보가 곁에 붙었다. 좌우로 바짝 붙은 게 추워서 그러나 싶을 때다.
앞쪽에서 넝마를 뒤집어쓴 꼬마 하나가 오다가 앞으로 푹 쓰러졌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꼬마를 받아 냈고.
푹 하고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곧바로 몸을 틀려고 했으나, 추위 탓에 몸이 굳어 반응이 늦었다.
조금만 비틀어서 맞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단검은 서슴없이 내장을 헤집었다.
내장을 찌른 직후, 숨도 쉬지 않고 연속으로 심장 어림에도 칼날이 꽂혔다.
끔찍한 통증이 뇌를 때렸다.
칼을 쑤신 것과 동시에 비명 또는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오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두꺼운 천으로 입을 막았다.
시장은 번잡했다.
사람 하나가 기우뚱 쓰러져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거기에 잭과 보가 몸으로 엔크리드를 가렸다.
“아이쿠, 낮부터 한잔 걸치시더니만.”
잭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요.”
보도 맞장구를 쳤다.
뭐지, 이 새끼들?
엔크리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마침표는 자신의 배와 심장을 쑤신 꼬마가 찍었다.
“집요한 사랑꾼은 절대 잊지 않는다.”
꼬마가 아니었다. 넝마 안쪽에 큰 귀와 보석처럼 빛나는 눈이 보였다.
독특한 외모였다.
한쪽 눈은 녹색이었고, 다른 쪽은 갈색이었다.
오드아이다. 녹색 눈이 보석처럼 맑았기에 상대적으로 갈색 눈이 무척 칙칙해 보였다.
마치 맑은 물에 더러운 기름이 섞인 듯한 모양새였다.
피부는 얼룩덜룩 점박이 고양이처럼 얼룩이 졌고 입가와 눈가에 진한 주름이 있었다.
이목구비만 보자면 예쁘장한 외모였으나, 이렇게 한데 모여 있으니 어딘지 불쾌함을 줬다.
‘혼혈 요정.’
엔크리드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입이 틀어막힌 채로 피가 줄줄 바닥에 흘렀다.
엔크리드는 양팔이 붙들린 채였다.
잭과 보란 놈이 틈을 내주지 않았다.
“잘 가라.”
혼혈 요정이 말했다. 얼굴에 주름이 파인 것과 말하는 본새를 보니 어린놈은 아니었다.
덩치는 고작 열둘이나 열셋 정도 된 소년 같은데.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암살이라니.
거기에 집요한 사랑꾼이라니.
아즈펜의 독립 중대 이름 아닌가.
집요하다고 소문이 파다하더니만, 전장이 끝낸 후 암살자를 보냈다.
‘제대로 미친 새끼들이네.’
암살자 하나를 보내는 일에 들어가는 크로나와 수고를 생각하면, 일개 병사 하나 죽이겠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건 확실히 미친 짓이었다.
당하는 처지에서 보자면 더욱 화딱지 나는 일이고.
엔크리드가 힘을 줘 고개를 뒤로 젖히려 하자, 천으로 입을 막은 놈이 손에 힘을 줬다.
“풀어줘. 말할 게 있나 본데.”
요정 특유의 직감일까. 덩치 작고 늙은 혼혈 요정이 용케도 엔크리드의 속을 읽었다.
곧 입을 옥죄는 두꺼운 천이 느슨해졌다.
“아즈펜에서 보낸 거냐? 잭과 보는 첩자고?”
엔크리드는 짜르르 올라오는 통증을 삼키며 물었다.
“비슷한 거지.”
“내 뒤에는 누구냐?”
“죽어가는데 그런 것도 알고 싶어?”
“모르고 가면 억울하니까. 지옥에서 기다릴 거다.”
“로튼.”
마지막 말은 뒤에서 속삭여 줬다.
로튼?
이 새끼도 아는 이름이다.
잭, 보, 로튼.
전부 정찰대 아닌가.
죽을 때가 되니, 머리가 팽팽 돌며 절로 기억이 떠올랐다.
그린 펄 전장에서 정찰 임무를 가게 된 이유.
잭은 팔이 부러졌고 보는 코가 깨졌으며 로튼은 뱀에 물렸다고 했었다.
이 새끼들 전부 일부러 정찰 임무에서 빠진 거였네?
“이런 씨.”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집요했지?”
요정은 그렇게 말하곤 그림처럼 옆으로 비켜섰다.
놈이 총총 외곽으로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골목길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잭과 보도 은근히 팔을 놓더니 슬그머니 떨어졌고.
로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몇 마디 말을 나누면서 기력을 몽땅 썼다.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힘이 남았다고 해도 소리를 지르진 않았겠지만.
대신 쓰러지며 뒤를 보려고 노력했다.
로튼 이라고 했지만, 다른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근데 로튼이 어떻게 생겼더라?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봐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엔크리드는 몸에서 힘을 뺐다.
입가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내장은 불쏘시개로 들쑤신 것 같았다.
통증이 몸을 적시고 피는 바닥을 적셨다.
추위가 한결 더 강렬하게 몸을 감쌌다. 몸이 덜덜 떨렸다.
‘개자식들, 갈 거면 끝장을 내고 가든지.’
이대로 피를 흘리다 죽는 건 최악이다. 차라리 한 번에 가는 게 낫지.
“꺄아악!”
지나가던 여급이 바닥에 고인 피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엔크리드는 눈을 감고 죽음을 맞이했다.
* * *
번쩍.
다시 눈을 뜬 아침.
벌떡 하고 일어나자, 옆에서 렘이 모포를 둘둘 싸맨 채로 물었다.
“악몽이유?”
“아니.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고 싶어서.”
“더럽게 추운 날이네.”
렘은 아침부터 툴툴거렸다. 막사 연병장에 큰 모닥불을 피우고 불침번이 밤마다 숙소 안쪽으로 달군 돌을 넣어 놓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추위를 견디는 건 어림도 없었다.
크로나가 넘쳐난다면 모피나 마법으로 만든 난로 따위를 들이겠지만.
일개 병사에게 그만한 크로나는 없었다.
사실 마법 난로까지도 필요 없었다. 은은한 열을 낸다는 마수 가죽이면 딱일 텐데.
그조차도 비싼 물건이긴 했다.
결론만 말하면 전부 허황된 꿈이라 하겠다.
“크라이스, 안 춥냐?”
“추워요. 엄청.”
렘이 괜히 크라이스에게 물었다. 왕눈이는 여기서 크로나를 넘치게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법 난로 어떠냐?”
“귀족이나 쓴다는 걸 우리가 쓴다고요? 배가 불렀네요. 차라리 내일부터 귀족이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응? 도끼날로 안마받고 싶다고?”
“툭 하면 폭력으로 해결하는 건 안 좋은 버릇입니다. 분대장님!”
왕눈이가 대화의 끝으로 엔크리드를 찾았다.
“괴롭히지 마.”
부대 내 괴롭힘을 사전 차단한 엔크리드의 시선이 근육을 드러내고 일어나는 종교쟁이 분대원에게 향했다.
이름 아우딘 픔레이.
무슨 이유인지, 사고뭉치 분대에 몸을 담은 근육질의 병사다.
오늘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작센은 무슨 일인지 외박이지만, 렘과 왕눈이, 라그나는 침대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모포를 둘둘 싸매고 있어도 추웠으니까.
“분대장 일어난 김에 돌 좀 몇 개 가져다주슈.”
모닥불에 밤새 달군 돌 몇 개라도 있으면 그나마 좀 나을 것이다.
“응.”
대답하고서도 엔크리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아우딘이 침대에 나와 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
“형제님, 춥다고 침대에만 있으면 몸이 굳습니다. 몸을 움직여 열을 내면 추위를 이겨 낼 수 있지요. 자, 따라 해 봅니다.”
“꺼져라. 널 조각내서 네 피로 내 몸을 데우기 전에.”
“좋지 않습니다. 형제님, 지금 그 말은 듣는 사람이 불쾌할 수 있습니다.”
“불쾌해? 그럼, 성공이다. 그런 의도였다.”
“형제님은 천국에 가고 싶으신 겁니까?”
참, 한결같은 모습 아닌가.
평소라면 진즉 말렸어야 할 엔크리드는 말없이 아우딘을 보다가 말했다.
“몸의 열기를 온존하는 단련법이 있다고 했지? 나 가르쳐 줘.”
렘을 지긋이 바라보던 아우딘이 고개를 돌렸다.
“맨손 단련법 말입니까?”
아우딘도 춥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잘 버티는 건 맞았다.
추워도 몸이 굳지 않게 하는 단련법이라고 아우딘이 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지금 그게 떠올랐다.
쓸모가 있을 듯싶었다.
몸을 덥히겠다고 제자리에서 방방 뛸 순 없으니.
몸이 굳지 않게 하는 단련법을 배워 두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충동적이었지만, 또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엔크리드는 배우는 일에 목마른 인간이었으니까.
“응. 그거.”
“가르쳐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시간 괜찮으십니까?”
“지금은.”
“하루 이틀이면 기본 틀은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어렵진 않습니다.”
아우딘은 엔크리드가 배우겠다고 하는 게 기꺼운 듯 웃었다.
곧장 시작하겠다고 자세를 바로잡는 엔크리드를 본 렘이 침대에 붙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니, 분대장, 돌 가져다 달라고. 나 추워.”
아, 깜빡했다.
엔크리드는 돌부터 가져다줬다.
근무까지는 앞으로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아침 먹고 몸을 단련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맨손 단련법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나, 쓸 만했다.
그리고 다시 근무에 나섰다.
“어쩌다가 너희랑 같이 근무를 서네?”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아, 시벌, 영광이오. 주술파괴자랑 같이 근무를 서서.”
잭이 답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시장에 들어서고 대비했기에, 요정 꼬맹이가 다가오기도 전에 그를 노려봤다.
잭과 보가 팔을 잡으려 했고 엔크리드는 양옆으로 주먹을 뻗었다.
뻑, 틱!
잭은 턱을 맞았고 보는 반사적으로 피했다. 보는 날쌨다. 스텝을 밟고 옆으로 금세 빠졌다.
그러면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무장으로 숏소드 한 자루가 그의 허리춤에 매여 있었다.
요정은 아직 멀다. 그럼, 보부터 처리해야 하리라.
엔크리드도 롱소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뽑아서 휘두른다. 집중해 대담함을 무기로 감각의 칼날을 갈았다.
그와 동시다.
휘이이이!
묘한 소리를 들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날아오는 무언가가 더 빨랐다.
퍽!
엔크리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밑으로 시선을 내리니, 심장 어림에 꽂힌 칼날 끄트머리가 보였다.
손잡이나 기타 장식이 하나도 없는 오롯이 양쪽으로 칼날만 존재하는 비도였다.
쓰로잉 나이프 중에서도 이런 건 다루기가 엄청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집요한 사랑꾼은 사냥감을 잊지 않는다.”
어느새 다가온 요정이 속삭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대비했는데.’
뭘 던질 걸 예상하지 못했다. 알았다고 해도 막기 힘들 정도로 고명한 솜씨이긴 했다.
엔크리드는 확실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세 번째 오늘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