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벽은 벽이다.
“근육을 늘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형제님.”
아우딘의 맨손 단련법은 몸 근육 하나하나를 세분화해서 쪼개고 늘리는 게 핵심이었다.
“끄읍.”
엔크리드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왔다. 허벅지 뒤쪽 근육이 땅기다 못해 끊어질 것 같은데, 아우딘은 아예 엔크리드의 접힌 허리 위에 올라타서 힘을 더 실었다.
앉은 채로 발끝까지 손을 내민 자세가 된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어.”
“위협입니까?”
“내가 죽는다고.”
목소리가 모깃소리처럼 작았다. 정말 근육이 파열될 것 같았다. 그대로 숨 몇 번 고르면 정말로!
한계선을 오가는 수준이 되자, 그제야 아우딘이 등에서 손을 뗐다.
“이건 기초입니다.”
아우딘은 수차례 기초란 말을 반복했다.
한쪽 다리를 안으로 접어 골반 근육을 누르고.
한 손으로 기둥 따위를 잡고 허리를 반쯤 숙이고 몸을 틀기도 했다.
몸을 비틀고 늘리고 쥐어짠다.
그래, 쥐어짰다.
그것만큼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빨래 짜듯 몸을 쥐어짜고 나면 흠뻑 땀이 났다.
이건 사실 고문하는 법이 아닐까?
기초가 이 정도면 심화 과정은 사람을 분해하는 걸까?
잡다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아우딘이 알려 준 체조의 효과만큼은 탁월했다.
할 때는 괴로운데, 끝나고 나면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어디 가뿐해지기만 하나.
몸에 열기가 돌았다. 심장이 쿵쿵 뛰며 전신에 온기가 드니, 추위도 한결 견딜 만했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움직이는 것, 추위를 견디는 법이지요. 분대장 형제님.”
아우딘이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단련하는 거야 익숙한 일상의 일부다.
그리고 몸의 괴로움은 뇌를 더 팽팽 돌아가게 했다.
팽팽 돌아간 뇌가 생각을 이어 간다. 반복된 오늘,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를 떠올리게 하니.
‘그 솜씨.’
비도를 어떻게 던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엔크리드도 비도 던지는 건 꽤 자신 있는 편이었으나.
‘비교도 못 하겠군.’
탁월한 솜씨다. 어쨌든 대비하면 그만인 문제였다.
다가와서 찌르는 게 첫 번째 패턴.
그게 안 되면 비도를 던진다.
‘벽치고는 얇고 낮다고 해야 하나.’
검은 강의 뱃사공은 엔크리드 앞에 계속 벽이 나타난다고 말했으나.
‘이 정도면.’
쉬웠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거고.
“자, 보쇼. 이게 어렵수? 이게?”
렘이 갑자기 흥이 돋았는지, 침대에서 튀어나와 엔크리드가 한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어느 하나 막히지 않고 매끄럽다. 쭉 펴지는 몸을 보니 유연성이 남다른 몸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유연성 좀 기릅시다. 응?”
이 새끼, 묘하게 얄밉다. 아니, 본래 얄미운 놈이었다.
“이게 힘들다고? 이게?”
렘이 계속 이죽거렸지만 엔크리드는 상큼하게 무시했고, 반쯤 감은 눈으로 렘과 엔크리드를 지켜보던 라그나가 움직였다.
그 또한 몸을 쓰는 일에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다.
검술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려면 몸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라그나 또한 완벽하게 동작을 재현했다. 엔크리드가 낑낑대던 동작, 다리를 찢으며 허리를 숙이는 동작을 꼬집어 골라서 하는 게 라그나도 얄미운 타입이었다.
“몸을 비비 꼬는 취미가 생긴 겁니까?”
외박하고 돌아온 작센이 들어오며 말했다. 그가 보기에는 미친놈 소굴 같았다.
엔크리드는 땀을 흠뻑 흘린 채로 숨을 고르고.
그 앞에는 미친 야만인이 허리를 접고 손으로 발끝을 쥔 채 싱글벙글 웃는 낯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게으름뱅이가 다리를 찢고 앉았다.
다들 단체로 돌아 버렸나.
“추위를 이기는 단련법을 익히는 중이었습니다. 형제님.”
아우딘이 상황을 정리했다. 작센은 관심 없다는 듯, 그들을 피해 제자리로 향했다.
엔크리드는 근무를 나갈 시간이 다가왔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순전히 호기심에 입을 열었다.
암살자가 던진 단검, 처음 보는 형태였다.
“이런 모양의 단검 써 본 적 있어? 던지는 용도고.”
“그게 뭐요?”
“아니요.”
“없습니다. 형제님.”
손잡이가 없는, 던지는 칼날을 설명한 참이었다.
렘과 라그나, 아우딘이 말을 하고 왕눈이는 당연히 모르기에 입을 다물었는데 작센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폈다.
“어디서 본 겁니까? 그건?”
“본 건 아니고.”
이제 보러 갈 참이지.
“혹시 손잡이 쪽에 둥근 홈이 파여 있지 않았습니까?”
작센이 앉지도 않고 물었다. 외투를 벗어 한쪽에 걸어 두려고 손에 든 채였다.
“응.”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었다. 반복한 오늘에서 그 칼날을 맞고 온 참이었다.
끝에 둥근 홈, 있었다.
“그건 왜 묻는 거요?”
렘이 도로 침대에 들어가며 물었다.
“그냥 어디서 들어서.”
말하고 몸을 돌리는데, 엔크리드가 있는 침대에서 파란 눈의 흑표범이 나왔다.
어젯밤 품에 파고들어 자던 표범이 이제야 눈을 떴다.
어지간히 침대와 잠을 좋아하는 놈이었다.
추운지 일어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고는 몸을 앞뒤로 쫙 늘렸다. 그걸 본 엔크리드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표범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작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하면 피하십시오. 휘파람 비도라는 겁니다.”
“휘파람 비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던질 때 나는 소리 때문에 붙은 별명이고 주로 암살에 애용하는 무기입니다. 다루기 힘들지만, 제대로 다루는 사람을 만나면 음, 도망가십시오.”
작센의 말투는 언제나 그렇듯 차갑지만, 친절했다.
다만 내용이 문제였다.
도망가라고?
그냥 단검 좀 던질 줄 아는 놈인데?
그르륵.
쓰다듬는 게 좋은지, 표범이 기분 좋은 울음을 흘렸다.
그걸 본 왕눈이가 쓰다듬으려 하자, 표범이 금세 표독스럽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우, 알았다. 알았어.”
더 다가오면 콱 물어 버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표범이 분대원에게 해라도 입히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금세 그런 걱정은 접었다.
표범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렘이나 다른 분대원을 어찌할 순 없을 테니까.
왕눈이만 조심하면 되지만, 표범은 딱 봐도 엄청 영특해 보였다.
며칠 지내 봤는데 문제도 없었고.
엔크리드는 표범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근무 갔다 올게.”
엔크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손 단련 체조 계속하십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형제님.”
어디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엔크리드가 항상 빠져들어 사는 게 무엇인가.
검이다.
검술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와 작센의 고개도 움직인다.
다들 엔크리드의 일이라면 반응이 충실하다.
참 신기한 일이긴 했다. 어지간한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이들인데.
엔크리드는 근무를 위해 막사 밖으로 나섰다.
같은 일의 반복이라 생각했고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했는데, 작센 때문에 생각이 조금 꼬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피하라고? 도망가?’
지금 실력으로?
정면으로 싸운다고 해도?
그걸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 지금부터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가는 목숨과 오늘이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있을 테니.
아쉽지 않을 것이다.
수없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엔크리드는 어떤 오늘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 했다.
어떤 필요 때문에 희생하는 오늘이 있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서도 뭐라도 하나 더 얻고 넘어가려 했다.
그렇게 반복된 오늘이 그에게 준 본능.
그 본능이 그에게 속삭였다.
몰골이 이상한 혼혈 요정 암살자 새끼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어이구, 주술파괴자 상급 병사님!”
잭과 보는 똑같았다. 엔크리드를 치켜세우고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모르고 봤다면 모를까.
알고 보니, 의도가 엿보였다. 과도한 칭찬으로 헛바람을 들게 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방심을 유도했다.
‘이렇게 보니까 되게 용의주도한데.’
암살 대상자가 고작 일개 병사인데도 이렇게 한다고?
완벽주의자일까?
혼혈 요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상대의 성격을 유추하는 사이, 시장에 도착했다.
“사람 참 더럽게 많네요.”
옆에서 잭이 너스레를 떨며 붙었다. 반대쪽에서 보도 간격을 좁혔다.
“그러네.”
난 답하며 앞에서 넝마를 뒤집어쓴 놈이 다가오는 걸 봤다. 그러다 갑자기 좌우로 팔을 폈다.
퍽!
이번에도 잭만 맞고 보는 피했다.
엔크리드는 과감하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추위 때문에 몸이 굳긴 했지만, 아우딘의 체조가 도움이 됐다.
처음 맞이했던 ‘오늘’보다는 몸이 덜 굳었다.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보의 멱살을 쥐자, 보가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엔크리드는 야수의 심장이 주는 대담함으로 주먹의 궤적을 끝까지 보다가 예측해, 고개를 꺾어 피했다.
틱 하고 주먹이 귓불을 스쳐 갔다. 그 뒤는 엔크리드의 시간이었다.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비틀어 보의 숨통을 조였다.
“꺽!”
놈이 신음을 흘렸다.
“흡.”
엔크리드는 짧은 호흡을 들이켜며 보를 방패 대용으로 쓸 생각으로 옆으로 휘돌렸다.
가볍다고 해도 무장을 한 성인 남성의 무게가 팔에 실렸다.
들고 허리를 틀어 원심력을 이용해 휘둘렀다.
반쯤 몸을 틀어, 보를 당겨오는데 엔크리드의 눈에 넝마를 뒤로 던진 혼혈 요정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다. 요정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왜?
이쪽에는 인간 방패가 생긴 참인데?
당황해야 했다. 암살자가 짜둔 판을 암살 대상자가 예측하고 반응한 거였으니까.
혼혈 요정은 태연했다. 비웃음과 함께 손만 휘둘렀다.
암살자의 늘어뜨린 손이 품에 닿은 순간이다. 빛살이었다. 번개였다. 말 그대로 눈에 잡히지 않는 속도로 단검이 날았다.
암살자의 손이 가슴에 닿고 앞으로 튕겨 나가는 속도에 맞춘 빛살.
보를 휘둘러 앞을 채 가로막기도 전이었다. 단검이 날아와 심장 어림에 꽂혔다.
삐이휘!
휘파람 소리만 뒤늦게 귀에 꽂혔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통증이 암살자가 한 짓과 자신에게 생긴 일을 알려 줬다.
단검을 던졌고 그게 심장에 꽂힌 거다.
“이런.”
본능이 옳았다.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조금 전 단검을 던지는 솜씨 하나만 봐도 보통내기라 할 수 없었다.
그럼 단검을 던지지 못하게 하면 어떨까?
단검이 몸에 꽂혔는데도 주변 사람이 인지한 건 엔크리드와 병사 둘이 다투는 모습뿐이었다.
“이거 놔!”
멱살을 잡힌 보가 외치며 발로 엔크리드의 배를 찼다. 손아귀의 힘이 쭉 빠진다. 엔크리드는 배를 얻어맞고 멱살을 풀었다.
심장에 단검이 꽂혔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울컥하고 입에서 피가 흘렀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지는 걸 버티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혼혈 요정이 물었다.
“너 예상했지? 둘 연기가 별로였나?”
주변에서 꺄악 하고 비명을 내지르는데 혼혈 요정은 그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 너와 나, 둘뿐인 것 같았다.
“……왜?”
마지막 숨을 아끼며 물었다. 주변 비명과 소란 속에도 암살자는 정확히 엔크리드의 말소리를 들었다.
“왜 묻냐고? 궁금하니까. 마치 알고 반응하는 것 같았거든.”
엔크리드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숨을 골라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연기가 형편없었다. 지나가는 개가 비웃을 만큼.”
요정은 고개를 끄덕이곤 좌우로 손을 뿌렸다.
뻐벅.
근거리에서 휘두른 손짓에 단검 두 자루가 날았다.
엔크리드의 눈에 잭과 보의 이마에 꽂힌 칼날 끝이 보였다.
두 개의 홈, 휘파람 비도, 휘슬 대거.
“그, 저.”
“왜, 왜.”
둘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뒤로 쿵 하고 넘어갔다.
혼혈 요정은 거기까지 손을 쓰고 멈췄다.
엔크리드는 뒤쪽에 로튼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로튼은 이런 상황에 덤비지 않았다.
어디서 몸을 숨기고 있겠지.
혼혈 요정은 로튼까지는 죽이지 않았다. 또 모르지,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쫓을지도.
어쨌든 그건 엔크리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집요한 사랑꾼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아.”
암살자의 말에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안 놀라?”
“놀라야 하나?”
“음, 보통은 놀라지.”
미안한데, 벌써 세 번째라.
엔크리드는 놀라는 대신 가슴에 뽑힌 단검을 쥐고 뽑았다.
푹.
심장에 꽂혔던 단검이 뽑히자, 극통이 밀려왔다.
뚫린 가슴팍에서 피가 콸콸 새어 나왔다.
엔크리드의 눈이 금세 흐려지자, 암살자가 말했다.
“재밌는 놈이네.”
응. 그러냐?
‘더 재밌게 해 주마.’
엔크리드는 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암전과 동시에 뱃사공이 보였다.
“낄낄낄.”
그는 별말 없이 자신을 비웃었다. 퍽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눈코입 어느 하나 보이지 않고 몸짓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뱃사공이 전하는 느낌만은 명확하게 다가왔다.
뱃사공의 비웃음은 짧았다. 암전 이후 다시 새로운 아침이 밝았으니까.
* * *
“좋은 아침.”
벌떡 일어난 엔크리드는 아우딘을 붙잡고 간단히 체조에 대해 듣고 배운 뒤, 돌아온 작센을 보자마자 그의 소매를 붙들고 밖으로 나갔다.
작센은 자신의 소매가 붙잡힌 순간, 상대를 밀치려다가 분대장인 걸 확인하고 멈췄다.
“잉? 어디 가슈?”
뒤에서 렘이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등가교환의 작센은 의외로 아는 게 많다. 대중적인 정보는 왕눈이가 잘 알지만, 정작 그보다 중요한 정보는 작센을 통해 얻어야 했다.
등가교환의 작센이란 별명이 붙은 건 이런 정보상을 겸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바라는 걸 주되, 상대도 그가 바라는 걸 줘야 한다는 거다.
“휘슬 대거, 알지?”
작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어디서 들었습니까?”
작센의 반응을 관찰한 엔크리드는 휘슬 대거가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알려 줘. 휘슬 대거에 관해서.”
“……거래입니까?”
지금은 분대원이 아닌 등가교환의 작센이었다.
“응.”
대가는 상관없었다. 오늘을 반복하면 사라질 대화였으니까.
내일을 맞이한다고 해도 갚아 주면 될 일이기도 했고.
다만, 고작 네 번째 오늘에서 넘어설 수 없을 벽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이 대화는 잊히리라는 걸 예감하긴 했다.
벽은 벽이다. 쉽게 넘을 수 있는 건 없다.
뱃사공의 비웃음이 말로 변해,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