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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사는 기사-58화 (58/170)

58. 갖고 나니 보였다.

한때는 욕심을 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삶이었다.

꿈은 꾸고 그걸 바라되, 이룰 수 없는 걸 알기에 그저 발악하는 삶.

엔크리드의 삶이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욕망을 드러내고 달려들어도 된다.

아니, 오히려 그게 지금은 더 유리했다.

몸을 데우는 체조 이후, 작센에게 짧게나마 비도 던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더 배우고 싶다.”

“초심자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비도 던지는 걸 본 작센이 중얼거렸다. 엔크리드가 무심히 답했다.

“전장에서 이렇게 던지는 놈이 있더라고. 보고 배웠다.”

작센은 무표정인 채로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믿어, 진짜다.”

“그렇습니까?”

물론.

천재는 이런 게 되지 않던가.

둔재로 사는 내내 천재, 혹은 재능이 있다는 놈들이 하는 짓을 수없이 봤다.

지금은 그런 척, 천재인 척했다.

오늘을 반복하기에 할 수 있는 짓이었다.

욕망을 드러낸다는 건, 이런 태도를 고수해야 하기에 유리하다는 말이었고.

천재란 어떤가.

눈앞에 있는 게 쟁취해야 할 것임을 아는 그들은 제 욕구를 표현하는 것에 서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진심이기도 했다.

배우고 싶다는 욕구만 따지자면 엔크리드는 대륙 제일이었다.

“좋습니다.”

항상 같다. 고민은 짧고 이후는 진지함에 깃든다. 작센은 제대로 가르쳤다.

꽤 재밌는 시간이었다.

엔크리드는 비도를 쥐는 법, 던지는 법을 반복했다.

짧은 시간 땀이 흠뻑 흘렀다.

“근무 나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찮아.”

몸을 푸는 정도지, 혹사하는 수준은 아니니까.

다시금 시작된 오늘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곱 번째 오늘이었다.

잭과 보를 좌우로 두는 게 아니라 엔크리드는 맨 왼쪽에서 걸었다.

“제일 왼쪽에 서야 편해, 징크스야.”

엔크리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데 어쩔 도리가 있나.

잭과 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십니까? 거, 별나네.”

“네, 편한 곳에 서서 가시죠.”

땀은 금세 식었지만, 몸 안을 데우는 열기는 남았다.

일곱 번이나 반복한 오늘이지만, 공기가 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내리쬐는 햇살이 찬 바람을 뚫고 피부에 닿는다. 겨울새의 지저귐이 귀를 스친다.

흙을 밟는 감촉과 걸음걸음 느껴지는 땅의 울림이 좋다.

공기도, 땅도, 흙도, 바람도.

전부 몸을 감싸고 스치고 데우고 머물렀다가 흘렀다.

하늘도 맑았다.

매서운 추위, 사계 중 네 번째 계절인 겨울이 찾아와 한 해의 끝을 고하며 살을 에는 칼바람을 선사했지만.

그 바람조차 추위보다 상쾌함을 가져다줬다.

반복되는 오늘, 항상 치열함을 담아 오늘을 버텨 냈었다.

그런데 어째 오늘은 힘이 조금 빠진다. 평온함이 몸을 감싼다.

그렇다고 치열함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편했다. 지금 걷는 이 길도, 이 순간도, 모든 것이.

‘왜 마음이 편한 건지.’

모르겠다. 곧 죽을 걸 아는데.

그 고통,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발악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는데도.

해도 해도 죽는 건 매번 처음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데도.

“던지는 건 순간, 그전에는 전신에 힘을 뺍니다. 전신을 늘어뜨리고 평온한 가운데 집중합니다. 어려울 겁니다.”

작센의 말은 반만 맞았다.

어려운 건 맞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도 아니었다.

어렵지만, 할 만했다.

대담함, 야수의 심장이 준 공능이다.

대담함은 죽음을 목전에 뒀음에도 모든 걸 끝까지 지켜보게 했고.

컨센트레이트 원, 한 점의 집중은 같은 상황을 전에 없이 다르게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게 대담함과 집중력의 합은 엔크리드에게 재능의 끝자락을 붙들게 했다.

본래라면 대담함도, 집중력도 이리 얻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엔크리드에게는 두 개의 끈이 있기에.

‘된다.’

고작 몇 번의 가르침과 몇 번의 반복.

서너 번의 반복 훈련만으로 몸에 익는다. 운이 크게 작용한 덕이었다.

본래라면 수없이 반복해도 얻지 못했어야 할 것이 손에 잡혔다.

그 가느다란 끈이 엔크리드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전에 없는 희열이었다.

“괜찮은 겁니까?”

옆에서 보가 물었다. 멍한 얼굴로 걷다가 히죽거리며 웃어 대니, 멀쩡한 상태라고 할 순 없었을 것이다.

침이라도 흘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 음, 괜찮아. 추태를 보였군.”

엔크리드는 괜히 입가를 닦으며 걸었다.

그의 경쾌한 걸음을 보며 잭과 보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잭이 눈짓으로 물었다.

‘저 새끼 살짝 미친 것 같은데?’

‘내가 봐도 그래.’

둘은 눈빛과 손짓만으로 대화를 나눴다. 익숙한 일이었다.

도둑 길드에 몸을 담았던 시절부터 쓰던 수신호였다.

“날이 좋네.”

엔크리드가 말했다.

“추워 뒈지겠는데요?”

잭이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본래 상대를 한껏 띄워 줌으로써 방심을 유도해야 하는데,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상대가 너무 풀어져 있으니 절로 반항심이 생겼다.

이 새끼는 진짜 뭔가 싶었다.

“추운 건 당연하지. 사계 중 끝 계절이다.”

겨울은 혹독하다. 하지만 혹독함과 추위에 속아 정겨움을 놓쳐서는 안 되는 법.

몸에 힘을 빼는 건 단순히 머릿속으로 되뇐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작센의 시범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위에 혼혈 요정 암살자가 겹쳐졌다.

몸에 힘을 빼려면 정신의 이완이 먼저다.

정신적 부하, 위협과 불안.

엔크리드는 그걸 전부 던져 버렸다.

이완된 정신 속, 혼혈 요정이 휘파람 비도를 던지는 장면이 무수히 되새겼다.

그건 기실 오늘의 반복과 다름없었다.

패배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목숨을 수없이 던진 상황에서는 또 무엇을 배웠는가.

반드시 목숨을 던져야만 뭔가를 얻어 내는 단계는 지났다.

수없이 질문을 되뇐다. 그러며 적당히 풀어진 몸과 마음 덕에 어딘가 걸음이 흐물흐물했다.

걷되, 순찰 근무를 위한 엄정함은 없었다.

그리 걷다 보니 어느새 시장이었다.

“거, 분대장, 뭐가 그렇게 좋은 겁니까?”

잭이 발을 멈춰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닐 것이다. 물으며 슬쩍 몸을 틀어내는 게 보였으니까.

보도 걸음을 뗐다. 둘 다 압박을 넣을 위치로 옮겼다.

적당히 주변 시선을 가리며 언제든 칼을 뽑아 찌를 수 있도록 엔크리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엔크리드는 둘을 시야에 담아 둔 채로 딱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며 발을 뻗었다.

잭의 정강이를 발끝으로 콕 찍는다.

몸과 마음이 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뜻대로 몸이 움직였다.

상대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을, 기묘한 타이밍의 발차기였다.

딱.

“억!”

정강이를 맞은 잭이 머리를 숙였다. 엔크리드는 가볍게, 정말 경쾌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가벼운 동작으로, 왼손으로 잭의 뒤통수를 누르고 무릎을 치켜세웠다.

떡!

밀가루 반죽 메치는 소리가 터졌다. 맞은 잭의 머리가 다시 위로 들렸다. 콧잔등이 부러져 피로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시벌, 그 가격에는 못 줘!”

본래보다 한 타이밍 빠르다. 오늘 짠 계획과는 별개의 움직임이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일 뿐.

‘상관없지 않나.’

엔크리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고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약이라도 한껏 들이켠 것 같았다.

실제 약을 먹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몸이 가벼웠다.

“무슨!”

보가 놀라는 게 보였다. 엔크리드의 손은 어느새 놀란 보의 목덜미를 향했다.

“칫!”

놀란 보가 목을 뒤로 뺐다. 예상한 바였다.

기습의 묘미를 살려 움직이면 보는 언제나 한 가지 패턴으로 반응했다.

그 패턴을 벌써 다섯 번을 넘게 봤으니.

익숙했다.

엔크리드는 뻗은 왼손 대신 왼발로 땅을 찍으며 몸을 반대로 틀었다.

왼발을 축으로 틀어 내고 회전한다.

정면을 보는 게 아니라 측면으로 틀며 오른손을 뻗는다.

순식간에 팔의 리치가 길어졌고, 오른손이 물러나는 보의 얼굴에 닿았다.

닿는 거로 끝일 리가 없었다.

펑!

끊어친 주먹이 가죽 북 터지는 소리를 만든다. 근력과 속도, 집중력을 통해 달아오른 엔크리드의 주먹이 보의 얼굴도 깼다.

“끅!”

얼굴을 움켜쥔 보가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걸 보며 엔크리드는 부드럽게 몸을 바로 돌렸다. 조금 일찍 시작한 탓일까, 모른다.

반복되는 오늘이라고 해서 항상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모든 건 변할 수 있다.

엔크리드는 그걸 아주 잘 알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 혼혈 요정이 보였다. 넝마를 벗지도 않은 채로 놈의 손이 움직였다.

아래에서 위로.

오른손을 따라 빛살이 날아왔다.

방어 수단을 따로 만들지 않은 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나.’

순간 시간이 느려진다.

엔크리드에게는 두 번째 경험이었다.

집중력이란 것이 한계를 깨는 순간이다.

천재의 범주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수없이 맞이할 시간의 틈.

아즈펜과의 마지막 전장에서 콧수염 병사의 일격을 흘렸을 때도 이와 유사한 감각이 빛을 발했다.

지금도 그랬다.

물론 엔크리드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반쯤 홀려 있었다.

홀린 정신이, 타오르는 집중력이, 칼날 같은 감각이, 야수의 대담함이.

빛살을 보았다. 그 목적지를 예측하게 했다.

‘피할 수 있나?’

없다. 그럴 시간은 없다. 쪼개진 신간의 틈이 닫힌다. 고속으로 회전하던 엔크리드의 뇌가 답을 도출했다.

퍽! 삐이이익!

팔로 막는다. 심장 앞을 막은 왼팔에 칼날이 꽂혔다.

휘슬 대거가 뿌리는 소음이 들렸다 싶은 순간 팔뚝에 통증이 일었다.

묵직한 충격과 칼날이 주는 열통.

통증 또한 아련하게 느껴졌다.

주변의 소란이 아스라이 멀리 들렸다.

보고 나니 갖고 싶어졌고.

갖고 나니 보였다.

엔크리드의 눈에 휘슬 대거의 궤적이 보였다.

그렇게 막았다.

고개를 들고 적을 본다. 어느새 넝마를 던져 버린 혼혈 요정은 양손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살아 있는 연발식 쇠뇌 같았다.

아니, 그보다 매섭다.

처음 건 못 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있었다.

손의 시작점을 봤고, 날아오는 빛살의 종착점을 예측했다.

휘이이이이이이!

두 개는 완벽하게 피했고 하나는 볼을 스쳤다.

휘파람 비도가 울음 세 번이 합쳐져 묘한 화음을 만들어 냈다.

전부 피한 엔크리드가 팔뚝에 꽂힌 단검을 뽑았다.

팔뚝에서부터 피가 흘렀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가 노린 점을 맞은 게 아니라, 엔크리드 자신이 원한 부위로 막은 거였다.

덕분에 팔에 칼자국은 남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팔뚝 위에 붙여 둔 가죽 방어구도 제 역할을 했고.

“이놈이.”

혼혈 요정은 화가 잔뜩 난 채로 거리를 좁혔다. 좁히며 몸 어디에 숨긴 건지 여전히 빛살을 쏟아 낸다.

전부 피할 순 없었다.

아니, 그래도 더 버틸 순 있었을 건데.

오늘은 여느 날과 달랐다.

어느새 뒤에 로튼이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미처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로튼이 엔크리드의 등을 떠밀었다.

퍽.

그거로 끝이었다. 세 개의 비도가 소음을 토해 내며 심장에 하나, 옆구리에 하나, 목에 하나 꽂혔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엔크리드의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힘을 쥐어짜, 턱 하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어 버티자, 끄르륵하고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뜨끈한 뭔가가 역류했다. 참지 못해 입을 벌리니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꺄아아악!

그제야 주변의 비명이 귀에 제대로 박혔다.

몽롱해진 정신이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통증이 여실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엔크리드의 앞으로 혼혈 요정 암살자가 다가왔다.

표정이 가히 좋진 않았다.

“너.”

그는 한마디 말을 뱉고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집요한 사랑꾼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다.

그 말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암살자의 눈이 엔크리드의 얼굴로 향했다.

“이 새끼가.”

그러곤 독이 오른 두꺼비처럼 눈을 부라렸다.

엔크리드는 웃고 있었다.

“끅끅.”

피거품을 토해 내면서도 그는 웃었다.

여기에는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정은 상대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느꼈으나, 엔크리드는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죽어 가며 생각해 보니.

‘고작 일곱 번.’

반복한 오늘이 일곱 번이었다.

그런데 돌파구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 너머가 보였으니.

고작 일곱 번.

아니, 고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절망과 좌절을 모르기에 오롯이 내일만 보고 달렸기에, 할 수 있는 것.

보잘것없는 재능은 곧, 끝없이 노력하는 인간은 만들었고.

끝없는 노력은 한 인간에게 재능의 끝자락을 잡게 해 주었으니.

기적이었다. 아니, 기적이란 건 없었다.

이건 그저 반복된 오늘 속 그 어떤 하루에서도 좌절과 절망을 품지 않았기에 얻어 낸 보상이었다.

하루, 다시 일어날 오늘에서.

엔크리드는 이걸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미친 새끼가.”

퍽!

요정은 코앞에서 길게 쭉 뻗은 칼날로 엔크리드의 목을 다시 한번 뚫었다.

그거로 끝이었다. 절명의 순간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암전이 세상을 뒤엎는다.

어둠 너머, 강을 타는 뱃사공이 보였다.

낄낄!

그는 다시 엔크리드를 비웃었다.

엔크리드는 다음에 뱃사공을 만났을 때가 퍽 궁금했다.

과연 저 비웃음이 어찌 변할지.

* * *

“좋은 아침.”

다시 눈을 뜬 아침.

엔크리드는 가뿐하게 일어났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휘파람 비도를 던지는 법을 배웠고.

또한 완벽하다 할 수 없지만, 아우딘에게 몽크의 기초 체조를 배웠다.

“추워 뒈지겠는데, 뭐가 그리 좋은 거요?”

“좋은 꿈을 꿔서.”

아주, 정말 아주 좋은 꿈이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보낸 하루였다.

그 하루, 그 오늘.

엔크리드는 재능을 가진 자의 삶을 엿봤고.

더없이 흡족했다.

그와 동시에 나아갈 길도 보였다.

나아갈 길,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벽을 넘을 방법을 말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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