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무릇 기사란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을 담지 않는 법.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사람을 보낼 테니까.”
허락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출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숙소로 돌아가니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가 된 분대원이 보였다.
“채비해.”
한마디로 상황을 전달하니.
“아우, 내 믿었수다. 분대장은 해낼 줄 알았수!”
“좋군요.”
렘과 작센이 한마디씩 거들고 나머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강이라도 장비는 챙겨 가야 할 것 아닌가.
“일단 대기, 곧 명령이 떨어질 거다.”
“그럽시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훈훈할 것이다. 드물게도 분대원 전부가 합심한 모습이었으니.
툭.
하물며 움직이다가 라그나와 렘이 부딪쳤는데도 둘 다 무심히 지나쳤다. 신소리 한 번 오가지 않았다.
“음흉한 들고양이야, 남는 망토 없냐? 더럽게 추운데.”
렘은 특히나 추운 걸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의 말에 작센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싸움이 일어나도 좋았을 상황이었으나 유려하게 넘어간다.
‘사이가 좋기도 하지.’
매일 이렇게 서로 적당히 물러나고 살면 얼마나 좋겠나.
물론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분대원을 보며 엔크리드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곧 중대장이 보낸 사람이 왔다.
“뭘 했길래, 분대 전체가 작전 차출이란 거냐?”
4소대장이다. 중대장이 보낸 전령이었다.
“암살자의 끈을 쫓아 보려고 합니다. 도둑 길드요.”
“……몸조심해라. 뒤에서 찌르는 비수는 기사 할애비라도 못 피해. 도둑은 위험한 놈들이다.”
소대장이 오랜 고사를 곁들이며 걱정 담아 말했다.
등 뒤의 비수.
한때 대륙을 호령하던 장군 하나가 자신이 굳게 믿던 부하의 단검에 죽었다.
아주 먼 옛날, 전설까진 아니어도 역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설화의 하나다.
실제로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일.
엔크리드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아니, 기사는 피할 수 있는데.”
라그나가 말하고.
“기사가 아니어도 피한다.”
작센이 동조했으며.
“등 뒤에서 덤비는 데 맥없이 찔리면 병신이지.”
렘이 마무리했다.
소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이 몰아쳤다.
“말을 말자.”
소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나갔다.
어쨌든 허락이 떨어졌기에.
“가자고.”
엔크리드가 일어나며 말했다. 어제보다 더 추워진 날씨 탓에 숙소 안이 얼음장 같았다.
장비라고 해 봤자 렘은 손도끼 하나가 전부.
라그나는 전에 엔크리드와 바꾼 아밍소드 하나.
작센도 숏소드로 보이는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아우딘은 기름을 흠뻑 먹이고 말린 짧은 곤봉 두 개를 챙겨 허리춤에 쿡 꽂고 나섰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지요. 혼내 주러 갑시다.”
아우딘이 나서며 말한다. 그걸 들은 렘이 쿡쿡 웃었다.
“그렇지. 나쁜 짓이지.”
다들 장비는 단출했으나, 작센은 두꺼운 털 옷을 껴입어 몸이 둔해 보였고.
라그나는 지나가는 거지도 탐내지 않을 천을 겹겹이 기워 만든 구멍 난 망토를 둘렀다.
그중 제일은 역시나 렘이었다.
“그러고 간다고?”
작센이야 당연히 허용 범위 안이고, 라그나도 관대하게 보면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여 줄 차림이다.
하지만 이건 뭔가.
모포를 아예 몸에 둘둘 말았다. 걸어 다니는 침상이라고 해야 할까.
팔을 뻗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발끝만 빼꼼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추운 건 싫수다.”
말린다고 들을까?
엔크리드는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다. 렘을 외면했다.
“가자.”
사고뭉치 분대는 그대로 시장 바닥을 향해 출발했다.
“위험할 것 같은데.”
크라이스가 홀로 중얼거리다가 따라나섰다. 팔뚝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을 치우느냐,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느냐에서 위험을 택한 거다.
어지간히도 눈을 치우기 싫은 거였다.
* * *
어떤 싸움이든, 끝나고 나면 수없이 되새기며 복기하는 건 엔크리드의 오래된 버릇이자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혼혈 요정은 휘파람 비도와 로튼으로 시선을 끌었다.
‘속임수.’
간단하지만, 위력적인 가림막이다.
이후 노린 건 근접전이다.
딱 한 수, 필살이라 부를 일격으로 싸움을 끝내려 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혼혈 요정은 심장 애호가였다.
그것으로 타격 부위 예측이 가능했으며 반복된 오늘을 통해 놈의 무기 형태도 이미 경험한 바였다.
모든 걸 계산하고 싸울 수 있었다는 거다.
‘실패했다면?’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난 운에 기대었나?’
혼혈 요정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계산대로 움직인다는 건 어느 정도는 운이 작용해야 했다.
엔크리드는 스스로 물었다.
첫 번째 오늘, 찌르기 변태 새끼를 죽였을 때.
엔크리드는 전력의 찌르기를 무기로 삼았다.
그 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그야말로 도박판 위에 목숨을 올려 둔 짓이다.
그때를 복기하며 실수를 되새겼다.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한 걸까.
이번에는 아니었다.
‘다른 수를 썼어도.’
결국, 이긴 건 자신이었으리라.
개인 전술 면에서도 압도했으나, 그 이전 실력에서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혼혈 요정이 작정하고 싸움을 걸어오고 뒤에서 로튼이 남았다고 해도.
‘승산은 내가 더 높다.’
물론 지금처럼 깨끗하게, 별다른 부상 없이 이기긴 힘들었겠지만.
복기, 되새긴다. 그걸 수없이 반복한다.
걸으며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상황에 대입해 본다.
엔크리드를 발견할 순찰병은 두 번 놀랐다.
처음에는 시신을 보고 놀랐고, 상급 병사 수준이 된 사고뭉치 분대장을 보며 한 번 더 놀랐다.
말이 상급 병사지.
실제로 이만한 실력을 보인 일반병이 얼마나 있을까.
하물며 이번 전투 이전까지는 실력이 형편없었던 사람이었음에야.
결론만 말하자면 자타공인, 이제는 검술 면에서 이전처럼 바닥을 박박 기는 수준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엔크리드는 궁리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오늘이 있다곤 믿기 어려운 태도다.
하지만 또 이런 태도를 고수하기에 언제나 내일을 맞이한 걸지도 몰랐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엔크리드는 어젯밤 꿈까지 떠올렸다.
‘할 일이 없는 건지.’
아무리 봐도 불가해의 존재인데.
검은 강의 뱃사공을 말하는 거였다.
꿈에 나타난 뱃사공은 전처럼 비웃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뱉었을 뿐이다.
“너 뭐냐?”
입이 없는 자의 음성이다. 그러하기에 음성에 깃든 감정이 여실히 전해졌다.
아니, 뱃사공이 원해서 전해진 것이다. 엔크리드는 본능적으로 그리 느꼈다.
한마디 말에 담긴 감정은 의아함이다.
실망, 분노를 비롯한 어떤 감정의 편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
뭐라 답해 줄 수 없었다.
꿈이었으니까.
물론 일반적인 꿈은 아니었겠지만.
“분대장.”
너무 넋을 놓고 있었는지, 뒤에서 누가 팔을 붙들고 부른 뒤에야 엔크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미안, 뭐라고 했지?”
조금 전 자신에게 뭐라고 말한 걸 흘려들었다.
“그런 정신머리로 들어가면 도둑놈한테 칼 맞기 좋다고 했수다.”
렘이 말했다. 그렇게 긴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정작 말한 렘 새끼는 이대로 돌입하면 모포에 감긴 채로 칼 맞고 뒈질 것 같은 차림새였다.
작센이 그런 렘을 무시하고 말했다.
“작전은 있냐고 물었습니다.”
작전? 무슨 작전?
엔크리드의 눈에 꿈에서 만난 뱃사공과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의아함이다.
“무작정 도둑 길드를 수소문해서 쳐들어갈 생각입니까? 길드 본부 위치는 압니까?”
작센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두꺼운 옷 덕분에 팔꿈치 쪽이 들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지만, 작센 자신은 태연했다.
상대는 소매치기, 인신매매 등 안 하는 짓이 없는 놈들이다.
길드의 이름은 길핀.
말 그대로 길핀이 이끄는 조직이란 의미였다.
통념상 도둑 길드라 부르지, 사실상 범죄 조직일 뿐이다.
그런 놈들이 본거지를 밝히고 활동할까?
아니었다. 도시의 어둠과 뒷골목에 기생하는 벌레답게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몰라.”
“작전 수립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진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거요?”
렘도 끼어들어 물었다.
라그나는 끼어들지 않고 하늘을 보며 입김만 연신 뿜어내고 있었고.
아우딘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진짜 생각이 없었다고요?”
크라이스는 그 큰 눈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보고 물었다.
“본거지쯤은 네가 알 줄 알았지.”
“아무리 저라도 이 길드 위치를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밝혀내려고 접근하면 슥삭인데.”
말하며 크라이스가 손날로 목이 잘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범죄 길드가 상비군을 죽여? 그만한 위치였나? 그런 짓을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사실 관심이 없었다. 이런 거에 관심을 둘 겨를도, 여력도 없었으니까.
“소규모 인원 작전을 수행해 본 적 없습니까?”
재차 작센이 묻는다. 분대 전체가 움직이는데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인다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점점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기 바빴고.
검 한 번 더 휘두르기 위해 자는 시간을 쪼개던 나날이었다.
그사이 전략에 관한 걸 배울 틈은 없었다.
물론 용병으로서의 경험도 있었고.
분대장으로서 복무 경험도 있다.
소수 작전에 참여한 경험도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흐름과 외부에 나와 진행하는 소규모 작전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전장에서, 가령 이전 정찰분대를 이끈 것과 같은 소규모 작전은 익숙한 분야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물며.
‘그건.’
살아남으려고 궁리한 결과지, 치밀한 작전을 토대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전부 목숨을 던져 가며 알아낸 것들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그래야 하나?
또 목숨을 던지고 오늘을 반복해야 하나?
엔크리드는 걸음을 멈췄다. 더럽게 차가운 바람이 뒤집어쓴 망토 사이를 통과해 옆구리를 스쳤다.
시리디시린 바람이었다.
‘그러고 싶진 않은데.’
오늘을 반복하는 걸 방법의 하나로 쓰고 싶지 않다. 죽음의 고통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니.
무엇보다 본능이 말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온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수단은 생각해 뒀다.
“수소문하면 전부 알지 않나? 아무리 잘 숨겨도 도시 토박이들은 다 아니까.”
세상은 비밀은 없다. 비밀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이니까.
비밀을 아는 유일한 자가 죽으면, 아무도 그걸 알 수 없게 될 테니.
범죄 조직이 그렇게 자신을 숨길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결론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려울 거예요. 길핀 애들은 꼬리도 잘 끊고, 무섭기로 유명해요. 말단 애들 잡아서 달달 볶아 봤자 아는 것도 없을뿐더러 혹여 아는 게 있어서 실수로 불었다간 길핀이 팔다리를 전부 분지르고 혀를 잘라 버린다더라고요.”
보복을 통한 공포로 조직을 지배한다는 거다.
그럼 어떻게?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과 그에 관한 궁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곳이 전장이라면 전략에 맞게 위치를 지키는 법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분대장, 명령하십시오.”
생각에 잠겨 있자니, 하늘만 바라보던 라그나가 말했다.
엔크리드의 눈이 라그나에게 향했다.
검만 쥔다면 대적할 상대가 흔치 않은 검술의 천재.
엔크리드가 보는 라그나다.
평소의 라그나는 게으르고 허술한 인간이었다.
툭 하면 길을 잃고 주머니에 든 걸 흘리고 다니는 그런 인간.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라그나는 핵심을 잡아 후벼 팔 줄 알았다.
마치 검을 손에 쥔 것처럼 말이다.
“대장은 명령하면 됩니다. 명령 이행을 위한 방법은 할 줄 아는 놈이 하게 두면 됩니다.”
그 한마디.
작게 읊조린 라그나의 말은 엔크리드에게는 대단히 크고 무거운 말이었다.
대장이라 했다.
본래 그의 지위가 그러했다.
분대장, 분대를 이끄는 장이다.
그럼, 지금까지 엔크리드가 분대를 이끄는 장이 맞던가?
‘내가 분대장이었나?’
아니다. 실력은 형편없고 살아남기 위해 급급한 인간은 한 무리의 장이 되기 힘들다.
하물며 분대원 하나하나가 날고 기는 이들임에야.
하지만 지금 라그나의 한마디가 상황을 변화하게 했다.
“그러슈.”
렘이 인정하고.
작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거지요. 맞습니다. 형제님, 대장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우딘이 동조한다.
“맞는 말 했는데, 왜요?”
크라이스만 분위기에서 엇나갔다.
그는 본래 마음속으로도 엔크리드를 분대장으로 삼았기에 그렇다.
“그렇지. 맞는 말이지. 작센, 방법이 있지?”
등가교환의 작센은 정보를 교환하는 정보상이기도 하다.
크라이스의 정보가 얕고 넓다면 작센의 정보는 좁고 깊다.
“있습니다.”
“알려 줘.”
“시장에 있는 여관을 잡고 기다리시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방법을 말하라는데, 자리를 비우겠단다.
“맡겨 주시면 알아 오겠습니다.”
“좋아. 여관 잡으러 가자.”
결정했다면 돌아보지 않는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여관으로 가는 길, 아직 시장 한복판에 이르지 않아 주변에 사람이 많진 않지만 잘 다져진 흙길 위에서 엔크리드는 마저 제 생각을 말했다.
“길드의 본거지를 찾아서 한 번에 쓸어버릴 거야.”
상대는 범죄 조직이다. 혐의가 없다고 해도 무력으로 짓밟는 것에 따로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윗대가리라는 귀족이나 대대장의 뒷주머니에 구멍을 내고 찢어내는 일이 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무릇 기사란,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을 담지 않는 법.
어릴 때 보고 듣고 배우고 꿈꿨던 대로.
엔크리드는 그리 살아왔기에.
지금도 그렇게 하려 한다.